어제 정오의 총격으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는 어제 유세 일정을 하루 전인 7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범인은 유세장소를 미리 알고 대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아베 전 총리는 당초 나가노현 유세에 나설 예정이었지만 자민당 내 ‘아베파’ 소속 의원이 출마한 나라에 오는 것으로 일정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통상 유세 때 이용하는 유세차에 탑승하지 않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연설을 하다가 변을 당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그는 역 앞 로터리의 차도와 인도를 가르는 가드레일 앞에 설치된 연설대에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NHK 영상에 잡힌 범인은 아베 전 총리 뒤에서 박수를 치다가 자리를 옮겨, 가방에서 총을 꺼내 아베에게 다가가 능숙한 자세로 총을 쏘는 자세를 취했다. “판단을 했다. 그는 안 되는 이유를 생각하는 것은…”이라고 말하는 순간 터진 총성에 아베 전 총리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용의자는 약 5m 거리에서 한 발을 더 쏘았다. 아베 전 총리는 왼쪽 가슴에서 피를 흘린 채 아스팔트 차도 위에 쓰러졌다. 하얀 연기가 났다.
나라소방서에 곧바로 출동 요청이 들어와 구급차가 출동했다. 이후 닥터헬기로 갈아탄 뒤 낮 12시 20분 나라현립의대병원에 도착했다. 이 병원의 후쿠시마 히데타다 구급의학과 교수는 “아베 전 총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심폐정지 상태였다”며 “목에 총상 2곳이 있었고 심장의 큰 혈관이 손상돼 있었다. 신체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대량의 출혈이 발생해 피가 멈추지 않았다”고 밝혔다. 병원은 200mL 혈액을 100봉지 이상 수혈했지만 결국 피격 5시간 반 만인 오후 5시 3분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병원 측은 기자회견에서 “용의자가 쏜 두 발 중 한 발이 아베 전 총리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고 밝혔다. 범인은 전직 해상자위대원 야마가미 데쓰야(41)로서 총격 직후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는 별다른 저항 없이 총을 떨어뜨렸다. 쇠파이프로 추정되는 2개의 원형 통을 총신으로 사용해 손으로 만든 총은 길이 40cm에 총신은 검은 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다.
나라현 경찰본부는 브리핑에서 “용의자가 특정 단체에 원한을 갖고 이 단체와 연결됐다고 생각하는 아베 전 총리를 노렸다고 진술했다”고 발표했다. 아사히신문은 이 단체는 종교 단체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범인은 2002년부터 3년간 히로시마현 구레의 해상자위대 부대에서 임기제 자위관으로 3년간 근무한 뒤 그만뒀다. 자위대 시절 연 1회 정도 소총 분해, 조립을 비롯해 실탄 사격 등 총을 다루는 훈련을 받았다.
최근에는 교토 지역 창고에서 파견직으로 지게차로 짐을 나르는 일을 했다. 회사 관계자는 “말수가 적었고 얌전했다.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진 않았고 차 안에서 점심을 먹곤 했다”고 했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그는 현장에서 약 3km 떨어진 아파트에 살았는데 주민들은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라현의 공립고교를 함께 다닌 동급생에 따르면 고교 재학 시절 응원단에 있었지만 얌전한 성격이었고 같은 반 친구와도 대화를 거의 안 했다고 한다.
아베 암살은 레이건 암살 기도와 비슷하다. 두 사건에선 동선노출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1981년 3월 28일 미국 청년 존 힝클리는 워싱턴에 들렀다가 30일에 레이건 대통령이 힐턴 호텔에 가서 미국 노동계 인사들에게 연설을 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다. 성적 망상장애를 앓던 그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며 편지를 써보내고 있었는데 미국 대통령을 쏘면 냉담한 포스터가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3월30일 오후 그는 호텔 앞에서 레이건을 기다렸다. 연설을 마치고 나온 레이건이 대기중인 리무진으로 다가가는데 힝클리 5m 앞을 지나갔다. 그를 향해서 권총 여섯 발을 쏘았는데 측근들이 피격당하고 레이건은 직접 맞지는 않았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자동차 안으로 밀어넣는 쪽을 향해 쏜 총탄이 車體를 맞고 튕겨서 레이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해가 레이건은 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動線노출이 힝클리의 암살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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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0일부터 윤석열 대통령은 매일 공관과 집무실을 같은 경로로 출퇴근하고 있다. 동선이 매일 두 번 5년간 노출된다. 역대 한국 대통령이 직면했던 암살위험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위험한 출퇴근길은 국민들의 악몽이 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나라 치고 출퇴근하는 대통령은 없다. 청와대, 엘리제궁, 백악관은 집무실과 숙소가 같은 건물이나 경내에 있다.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대통령은 국가의 소유물로서 소통보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동선 사전 노출로 암살되었고 레이건, 드골,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은 九死一生했다.
*1963년 11월 리 하비 오스왈드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가 텍사스 달라스를 방문, 딜리 플라자 거리를 지나가게 될 것이란 기사를 현지신문에서 읽는다. 해병대 출신으로 사격에 능한 그는 마침 이 거리에 면해 있는 교과서 창고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소련에 가서 살 정도로 親蘇的이고 정서가 불안정한 그는 11월22일 낮 망원경이 달린 이탈리아제 카빈 소총을 들고 6층 창가에서 기다리다가 81m 떨어진 거리를 지나가는 차량에 탄 케네디를 저격, 두 발을 명중시켰다. 그중 한 발이 머리를 맞혀 케네디는 사망했다. 動線 노출이 치명적이었다. 동선정보가 암살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오스왈드에게 동기를 부여한 것이다.
*1981년 3월 28일 미국 청년 존 힝클리는 워싱턴에 들렀다가 30일에 레이건 대통령이 힐턴 호텔에 가서 미국 노동계 인사들에게 연설을 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다. 성적 망상장애를 앓던 그는 여배우 조디 포스터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며 편지를 써보내고 있었는데 미국 대통령을 쏘면 냉담한 포스터가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3월30일 오후 그는 호텔 앞에서 레이건을 기다렸다. 연설을 마치고 나온 레이건이 대기중인 리무진으로 다가가는데 힝클리 5m 앞을 지나갔다. 그를 향해서 권총 여섯 발을 쏘았는데 측근들이 피격당하고 레이건은 직접 맞지는 않았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자동차 안으로 밀어넣는 쪽을 향해 쏜 총탄이 車體를 맞고 튕겨서 레이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해가 레이건은 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動線노출이 힝클리의 암살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1962년 8월22일 오후 파리에서 드골 대통령 부부가 탄 시트로엔 승용차가 암살단의 기관단총 집중사격을 받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따르던 경호원 두 명은 사살되었지만 드골 부부는 살았다. 대통령 승용차는 14발을 맞고 타이어가 터졌으나 노련한 운전자가 加速하고 시트로엔의 서스펜션 시스템이 뛰어나 死地탈출에 성공했다.
드골의 알제리 독립방침에 분노한 군인들이 그날 12 명의 암살단을 조직, 넉 대의 차량에 타고 파리 중심부 길가에서 기다렸다. 그들은 엘리제 궁 내부의 협력자로부터 드골의 동선을 파악했다. 저녁 8시10분, 대통령 일행이 군사박물관 앵발리드 앞을 지나는 도로를 이용, 공항으로 갈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암살단은 길목을 지키다가 100발 넘게 퍼부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드골의 사위가 "숙이세요"라고 외쳤고 뒷 창문을 뚫은 총탄은 드골의 숙인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드골 부부는 깨진 유리조각 세례를 받았다. 드골이 목숨을 잃을 뻔한 것도 動線이 노출된 때문이었다. 드골은 고향인 콜롱베와 엘리제 궁을 자주 오갔는데 암살단은 이 사실을 알고 그 길목을 노린 것이다.
*1992년 5월23일 토요일 오후, 시칠리아 팔레르모 근교 고속도로. 마피아 수사담당 지오바니 팔코네 판사 부부가 탄 차량과 경호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망을 보던 마피아 행동대원이 원격조종 단추를 눌렀다. 도로 밑 수로(水路) 위에 묻어두었던 수백kg의 폭약이 터져 그 위를 지나던 차량 두 대가 날아갔다. 판사 부부와 경호경찰관 3명이 즉사했다. 마피아 수뇌부는 팔코네 판사가 수백 명의 마피아 범죄자들을 잡아가두는 데 복수를 한 것이다. 그들은 팔코네 판사가 주말에 집으로 갈 때 지나다니는 길을 알아두었으므로 치밀한 진행을 할 수 있었다. 동선이 고정되면 암살을 면밀하게 준비할 수 있다. 노출시간이 길수록 연습시간도 길어지고 성공확률이 높아진다.
*북한공작원 두 명은 1970년 6월22일 국립현충원의 현충문 지붕에 올라가 폭탄을 설치하던중 터져 실패하고 달아났다가 사살되었다. 6월25일 남침기념일에 참석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노린 암살기도였다. 암살이 동선을 따라서 계획된다는 이야기이다. 1974년 8월15일 문세광은 그날 조간신문에서 광복절 기념식이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잠입, 박정희 대신 육영수 여사를 암살했다.
*북한공작원들은, 1983년 10월9일에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아웅산 묘소에 참배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묘소 지붕에 폭탄을 장치, 당일 원격조종으로 폭파시켜 한국방문단의 장차관급 17명이 죽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도착이 늦어 살았다. 당시 이기백 함참의장이 중상을 입었다. 만약 대통령과 합참의장이 동시에 당했더라면 안보공백이 생길 뻔했다. 국방부 청사를 대통령 집무실로 쓰면 합참 건물과 가까워 북한의 공격으로 국가 및 군사 지휘부가 같이 無力化될 위험이 있다.
*동선의 상시적 노출은 이처럼 위험하다. 잠재적 암살자들에게 암살동기를 자극하거나 확산시킨다. 정치적 암살 위험보다도 정신장애자에 의한 암살위험이 더 심각할지 모른다. 동선이 고정되어 있으면 고정표적처럼 되어 타격을 준비하고 훈련까지 하는 데 충분한 시간대를 제공한다. 시간이 길면 암살방법도 저격, 폭발물 설치, 드론 등 다양하게 동원가능하다.
*이런 위험 때문에 윤석열 다음 대통령은 집무실과 공관을 통합하려 할 것이다. 移轉이나 新築이 불가피하다. 윤석열 부부는 다음 대통령들을 위해서라도 집무실과 숙소로 2원화된 용산이전 계획을 백지화하든지, 국방부 청사 안에 숙소를 마련하든지, 아니면 숙소와 집무실을 아우르는 건물을 신축하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대통령은 소통보다 안전이 더 중요하다. 5년 임시직인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에겐 다음 대통령들까지 위험에 노출시킬 권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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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대통령 경호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는 한 元老의 견해를 소개한다.
1. 같은 動線을 오가는 대통령의 출퇴근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고 매우 위험하다.
2. 대통령 경호의 가장 큰 원칙은 動線보안인데 이를 미리 공개하는 것 자체가 暗殺企圖 유발이 될 수 있다.
3. 특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대통령이 위치하게 된다는 점이 저격표적으로는 최고이다.
4. 요사이 기술발달로 저격수는 먼 거리에서 파괴력이 강한 총탄을 정확하게 쏠 수 있다. 대통령 승용차를 아무리 강화하더라도 당할 수가 없다.
5. 사회가 다양한 만큼 암살의 동기도 다양하다. 특히 공격성 정신질환자 그룹이 위험하다.
6. 윤석열 대통령이 공관과 국방부를 오갈 때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친다. 대통령 승용차는 멈출 수 없다. 앞뒤로 상당한 거리를 비워놓아야 한다. 통제에 5분이 걸리면 이로 인한 교통체증이 풀리는 데는 30분 이상 걸린다.
7. 암살방법도 저격, 폭탄 설치, 드론 등으로 다양해지는데 대응도 이에 따라야 한다. 출퇴근 동선의 상시적 노출은 대응 자체를 복잡하게 만든다.
8. 윤석열 대통령이 머무는 시간은 집무실보다는 공관이 더 길다. 거기에도 비서실, 경호실, 미사일 방어망 등이 설치되어야 하니 청와대가 두 개가 되는 꼴이다.
9. 항공통제가 중요한데 청와대는 등뒤에 북한산이 있어 미사일이나 항공기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나 용산은 트여 있어 불리하다.
10. 집무실과 공관의 분리는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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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살된 라빈, 아베 두 대정치인을 생전에 인터뷰한 적 있다. 특히 나의 라빈 수상 인터뷰는 그가 한 언론 마지막 인터뷰였다. 이스라엘 텔 아비브 공항을 1995년 11월4일 새벽 5시50분(현지시간)에 출발한 루프트한자 여객기는 비행 4시간만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했다. 귀국 비행편을 기다리며 종일 라인강변을 구경한 기자는 현지시간 4일 저녁 8시30분에 대한 항공기에 올랐다. 약 13시간만에 김포공항에 착륙, 바깥으로 나와 택시를 탔더니 운전기사가 라빈총리 피살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이때처럼 큰 충격을 받은 것은 10·26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기자가 이자크 라빈 총리를 인터뷰한 것은 피격 34시간 전인 3일 오후 1시30분∼2시30분(현지시간) 사이였다. 인터뷰를 마치는 길로 귀국행에 올랐고, 프랑크푸르트를 이륙한 그 순간에도 라빈 총리는 산 사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기자는 라빈총리의 녹음테이프를 리시버로 들으면서 대화를 정리했기 때문에 바리톤 음성의 느릿한 영어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때였다.
기자가 지난달 30일 이스라엘에 도착하여 맨 먼저 재미있게 읽은 기사는 이스라엘 교육부장관이 「요사이 반정부 시위현장에 총기를 휴대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단속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라빈 총리에게 했고 라빈 총리는 「실천불가능」이란 이유로 건의를 묵살했다는 보도였다.
자위목적의 총기 총탄 휴대가 허용돼 있는 이스라엘에선 민간인들이 소총이나 기관단총을 메고 뒷호주머니엔 탄창을 쑤셔박은 채 예사로 돌아다니고 시위현장에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총기에 의한 사고는 거의 없었다. 이번 피살을 막기가 어려웠던 것은 동족에 의한 범행이었기 때문이다.
기자가 텔 아비브 국방장관실(그는 국방장관을 겸직중에 있었다)에 서 라빈 총리와 마주 앉아 맨 처음 주목한 것은 넥타이였다. 라빈총리가 회고록에서 「청년장교 시절엔 넥타이를 맬 줄 몰라 남이 매어준 매듭을 풀지 않고 계속 사용했고, 주미대사 시절엔 춤을 출 줄 몰라 만찬 때는 식은 땀을 흘렸다」고 실토한 대목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남보라색 넥타이를 맨 라빈 총리는 한국과의 협력관계, 중동평화협상과 경제발전 전망을 이야기할 때는 신이 나는 듯했고, 테러에 대해서는 단호한 말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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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은 안전한가?
wind11
2022. 7. 9. 09:15
윤석열은 안전한가?
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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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9, 03:4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