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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만주군관 경력과 여운형의 일제 학병 지원 독려 [펌]

친북 좌파 인사들이 주축인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가 펴낸 친일 인명사전에 박정희를 등재한 것을 계기로 그의 친일 여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그가 일제시대에 자신의 영달을 위해 독립운동을 방해하거나, 동포들에게 피해를 준 사례는 단 한건도 없다.
그의 친일경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그가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위해 초과한 나이 때문에 국가를 위해 헌신 봉사하겠다는 혈서를 써 보냈다는 것과, 만주군관학교 졸업 후에 일본 육사 위탁교육을 받고, 그 후에 만주군 소위로 1년여 재직하다 중위 진급 한달만에 해방을 맞은 것이 전부이다.
그 정도 경력이 일제시대를 산 수천만명 중 4389등 안에 들 정도의 거물급 친일이 될만하가?
면장, 순사, 헌병오장하면서 동포를 괴롭힌 자들도 숱하게 많다.
일제시대에 박정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동포가 단 한명이라도 있는가?

그런데도 그의 행위중 무엇이 그를 거물급 친일파로 단정하여 사전에 등재까지 해야할 사유가 된단 말인가?

혈서?
일본도 아니고 만주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혈서인데도?
당시 국내서 학교만 다녀도 일왕에 대한 충성맹세는 예사로 하던거고,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우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君が代 )를 부르며, 
일장기에 대한 경례나 동방요배(東方遙拜), 신사참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반 학교에서도 일본군이 되기 위한 군사훈련(교련)을 받았다.
김대중도 목포상고 시절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나돌아 다닌다.
왜 박정희만 혈서쓰고 만주군관학교 입학한 것이나 만주군 소위 1년 한것만으로
특별히 거물 친일파로 불러야 되는가?
 
혈서 안쓰고, 군관학교 가지 않았으면 된다고?
마찬가지로 국내서도 학교 안다녔으면 저런 맹세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박정희만 친일파인가?
민족을 위해 무슨일을 하거나,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하려해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한 것은 불문가지이고,
그런 것을 배우자면 일본식 교육을 하는 학교에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 다니기 위해서는 속마음은 어떻든 겉으로는 순응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참고 : 일제시대 한국인들(학생들)의 동방요배(東方遙拜) 및 신사참배 사진
이 수많은 사람들도 박정희처럼 친일 사전에 올라 있나?]

그런 학교를 다닌 것이 친일이 아니라 거기서 배운 지식을 어떻게 활용했는가로 친일 여부 판단을 내려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지식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동포를 괴롭히는데 썼다면 분명히 친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지식을 활용해 본격적인 경력을 쌓기도 전에 해방을 맞았으니 제대로 친일할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만주군 소위로 1년 재직한 것이 친일행위일 수는 없다.
독립군도 제대로 정규 군사 교육을 받고, 군경험도 있는 인재가 필요했고,
민주군이나 일본군에 재직하며 군사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도 당연히 필요했다.

해방이 되지 않았더라면 박정희는 만주군에서의 경험을 살려 독립군에 투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만주군 장교로 계속 있으면서 중요 군사정보를 독립군에 알려 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진짜 개인 영달을 위해 본격적인 친일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 어느 쪽으로도 명확한 방향 설정이 되기 전에 해방이 되었다.
그러니 그가 단지 만주군에 1년간 있었다는 것만으로 친일파로 몰 근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가 만주군 소위 때도 독립군과 모종의 연대가 있었다는 증언까지 나와 있다.

[참고: 박정희 대통령 광복군제3지대 2중대장 /
박정희는 대통령 재직시 해방후 독립군에 투신한 것에 대해 쑥쓰러워 했고, 사람들이 그의 독립군 경력을 미화하려고 하는 것을 제지했다. 하지만 그가 만주군 재직시 독립군 측과 연락이 있었다는 증언은 사실로 보인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다니면서 습득한 지식과 견문을
일제시대가 아니라 해방후 국군에 봉직하며 본격적으로 활용했고,
이후 국가경제 건설에 더욱 중요하게 활용한 것이다.
좌파들은 죽어도 인정하기 싫겠지만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가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경에서 선생이나 계속했더라면 한국은 필리핀이나 인도보다 못사는 나라로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박통은 일제시대에 배운 지식과 경험을 개인 영달을 위해 동포를 괴롭히는데 쓴 게 아니라,
해방후 나라를 지키고 경제를 일으키는데 썼는데도 친일파로 모는 것은

배은망덕한 짓일 뿐더러 자기 밥상에 똥싸는 일이나 완전히 똑 같다.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입학은 단순한 개인 영달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20세기 후반에 나라의 명운을 바꾸는 엄청나게 중요한 선택이었다.
동포를 괴롭힌 적도 없고, 독립운동을 방해한 적도 없으며,
자신들을 밥먹여 살릴 경륜이 얻어지는 시기의 행적을 굳이 친일이라 불러야 한다면
그 친일 덕에 밥먹고 살게된 정도를 넘어 다이어트 걱정까지 하게된
오늘날 한국인들 모두 친일파 사전에 올라야 한다.
임헌영 본인과, 박정희를 증오하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김일성이 독립운동했다는 말은 검증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해방 당시에 듣보잡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을 제치고 북한지도자가 된 것은
순전히 스탈린의 낙점을 받았기 때문일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이 충성을 맹세한 김일성이 생전에 입에 달아놓고 한 말이
인민들이 이팝과 고깃국을 먹게 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북한 인민들은 3백만이 굶어 죽는 참사를 겪고도
여전히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고 있다.

그들이 친일파라고 욕하는 박정희는 남한 사람들이
이팝에 고깃국을 넘어 다이어트 걱정하고
가난뱅이도 자동차까지 굴리며 살수있게 하는 경륜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시절에 얻었다.
박정희가 그런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남한도 북한과 처지가 똑 같아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을 친일 행위로 몬다면
민족문제연구소 사람들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연구소를 구성하는 좌파집단의 정치적 목적이 개입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가 소속되었던 만주군이 모택동의 팔로군과 대치한 것을 들어 박정희가 친일한 증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만 말도 안되는 억지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에 대한 것은 [中共 팔로군 토벌이 친일이라는 억지]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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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일개 20대 청년이 혈서 쓰고 만주군 장교를 1년 한 것만으로 거물 친일파로 모는 사람들은
일제말 민족지도자급 인사였던 여운형의 수차례 일제 학병 지원 독려 발언은
왜 단 한번도 문제삼지 않고, 심지어 그를 독립유공자로 훈장끼지 추서하는가?

민족지도자급 인사가 청년 학생들이 사지로 나갈 것을 권유한 것도 독립운동인가?

[참고 : 여운형 '일제학병 권유 격문' 찾았다]
또 여운형에게 훈장을 추서한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의 아래 발언은 왜 단 한번도 문제삼지 않는가?

유명한거죠

1943년 목포상고 재학시 반장을 하던 소년 김대중. (왼쪽에서 4번째)
이 사람도 군복입은거 보니 일왕에 충성맹세한 거 분명하고, 사전에 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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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 흑백논리 의 친일 명단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총독부 전직 관료들을 싫어하면서도 등용했다. 총독부 판사를 지낸 사람을 법무부 장관으로 쓰면서 “일제 앞잡이를 20년이나 했구먼”이라고 마뜩찮아 했다. 이 대통령은 해방 후 정국에서 ‘친일 청산’보다는 ‘공산화 저지’가 더 급하다고 판단했다. 이 대통령이 공산당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친일파 관료와 경찰을 동원하고, 확고한 ‘반공()’으로 남쪽의 자유와 번영을 지킨 것은 당시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최근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보도자료에서 ‘용공() 좌익세력들의 국가정통성 훼손’이라는 비판에 대해 ‘친일 친미 친독재로 기회주의적인 변절을 거듭한 자들과 그 후예들이 치부를 감출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반공이었다’고 응수했다. 반공을 곧바로 ‘친일 친미 친독재’와 연결짓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오늘의 북한 현실이나 냉전 후 국제질서를 보더라도 이 대통령의 ‘현실적 반공’은 사후에 정당성을 얻었다.

임 소장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반공법 위반 등으로 두 번 옥살이(문인간첩단 사건, 남민전 사건)를 했지만 다 민주화유공자로 확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남민전은 도시게릴라 투쟁을 벌이려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다.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오류’가 바로잡힌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리영희도 비판한 임헌영의 관점

임 소장은 2005년 리영희 씨와의 대담을 수록한 ‘대화’에서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적 관점을 편든다. 그러자 리 씨는 “고르바초프 정권 이후에 소련에서 한국전쟁 관련 기밀문서가 대량으로 비밀 해제돼 1948년 말경부터 북이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음이 밝혀졌다”고 설명하면서 오류를 지적한다. 이어 임 소장이 맥아더의 ‘6·25 전황 조작설’이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자 리 씨는 “미국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고정관념으로 단정하는 일일랑 경계하라. 과학적이 되라”고 충고한다.

임 소장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거에 대해서도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파들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보낸 지령문을 보면 소련군은 북에 진주한 직후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음이 드러났다.

좌파 현대사 연구의 대부()격인 리 씨는 ‘대화’에서 “이북에서는 새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친일파를 비롯한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되고 있었는데, 같은 민족의 땅 이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는 한숨과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라고 말한다. 리 씨는 “좌익인사들이 항일과 독립운동의 주축이었음을 해방 후 세대가 알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남쪽보다 북쪽에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과 맥이 닿는 논리이다.

하지만 정통성 논쟁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북한 전역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와 찬양구호로 뒤덮은 세습독재국가이자, 인민을 굶겨 죽이는 ‘인권의 지옥’에 어떤 정통성이 있다는 말인가. 좌익 항일애국지사들이 지하에서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 사실상 국권을 상실해 40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이승만 김구 선생처럼 해외에 나가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도 있지만 국내에서 민족을 계몽하는 교육 언론 사업, 경제의 독립을 위한 산업 활동을 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일제에 일면 수동적()으로 협력하고, 일면 저항하면서 독립 후에 대비해 민족의 힘을 양성했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려면 시대적 상황과 일생의 행적을 따져봐야 한다. 한때의 어쩔 수 없는 ‘수동적 협력’을 들추어내 친일로 단죄하다 보면 해방공간에서 성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반민특위도 단죄의 대상을 악질적 민족반역자 200여 명으로 국한했던 것이다.
‘민족의 힘’ 육성한 인물 평가해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중반을 산 선조들은 한일강제병합을 막지 못했고, 학교에서 매일 아침 일왕이 있다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황국신민()의 선서를 외치고, 창씨개명을 하고, 신사참배를 하며 살아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친일파’의 후예들이다. 누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자기들의 잣대가 절대적이라는 독선에 빠져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들쑤시는 것은 또 다른 편 가르기이고 후손 망신주기이다. 특히 남쪽보다 북쪽에 더 정통성이 있다는 사관()에서 나온 명단이라면 ‘대한민국 61년’에 대한 상처내기이다.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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