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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귀갓길 칼 든 강도 가방에서 장학증서 · 표창장 등 취업서류들이

새벽 귀갓길 칼 든 강도 가방에서 장학증서 · 표창장 등 취업서류들이 …

도주하던 강도를 검거했다는 기쁨도 잠시, 신원 확인을 위해 소지품을 뒤지던 경찰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가방 안에 있던 서류 봉투에서 서울 명문 사립대의 장학증서와 우수학위 표창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 해운대에서 심야 강도행각을 벌이다 붙잡힌 김 모(30) 씨는 이 학교 사회체육학과를 졸업한 재목이었다.

김 씨가 부산 남구 자신의 집을 뛰쳐나온 건 지난달 22일. 2007년 대학을 졸업한 뒤 4년간 집에서 백수생활을 해오던 터였다. 아버지는 정년퇴직했고, 형도 마찬가지로 명문대를 나왔지만 무직인 상태다. 김 씨는 다가오는 추석이 두렵기만 했다. 결국 김 씨는 "다른 지역에 취직했으니 걱정 말라"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왔다. 오랫동안 아들의 취업을 학수고대해 온 김 씨의 부모는 아들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타지 취직했다며 집 나간
4년 백수 명문대 졸업생
PC방 전전하다 강도짓
              :
"우리 사회가 어쩌다
엘리트 청년마저 … "
피해자, 되레 선처 호소


장학증서 등 취업 관련 서류를 챙겨 나오기는 했지만 김 씨는 막막했다. PC방을 전전하며 대기업 영업사원 등으로 원서를 접수했지만 고령의 '취업장수생'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김 씨의 수중에 남은 돈은 1만 5천 원. 다시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 계속됐다. 이성의 끈은 보름 만에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7일 오전 4시 1천 원짜리 과도를 구입한 김 씨는 해운대를 어슬렁거렸다. 해운대구 우1동 해운정사 앞을 지나던 김 씨의 시야에 새벽 식당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박 모(48·여) 씨가 눈에 들어왔다. 이성을 잃은 김 씨는 박 씨에게 달려들어 "소리치면 죽인다"며 흉기를 겨누고 돈을 요구했다. 김 씨는 박 씨의 수중에 있던 가방과 현금 등 40만 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았다.

순진했던 초보 강도 김 씨는 "돈은 가져가더라도 휴대폰만은 돌려 달라"는 박 씨의 애원에 순순히 휴대폰을 건네주고 도주했다. 휴대폰을 돌려받은 박 씨는 김 씨가 사라지자마자 곧장 112에 강도신고를 했다.

인근 지구대에서는 곧장 순찰차 4대가 출동했다. 범행 장소인 해운정사에서 해운대역 앞까지 300m 정도를 달아난 김 씨는 택시를 잡아타고 도주하려 했지만 앞을 막아선 순찰차에 붙잡히고 말았다. "길 가던 시민을 왜 막느냐"고 항의하던 김 씨는 순찰차를 타고 뒤따라온 박 씨의 모습을 보고 곧 고개를 떨구었다.

경찰조사 결과 김 씨는 지난 4년간 갖은 방법으로 임용고사 등 취업을 준비해 왔지만 매번 낙방의 고배를 마셔 온 것으로 밝혀졌다. 설상가상으로 사귀어 오던 동갑내기 여자 친구마저 최근 직장에서 해고되면서 상황은 더욱 김 씨를 옥죄어 왔다. 경찰은 김 씨가 '취직은 했으니 명절 선물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등이 이중삼중으로 겹치면서 이를 견디다 못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검거 이후 김 씨는 "어머니가 편찮으시니 제발 집에는 연락을 취하지 말아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취직했다던 우리 아들이 부산에 있을 리 없다"며 경찰서를 찾아온 김 씨의 부모는 억장이 무너지고 말았다. 보름 가까운 반 노숙자 생활로 김 씨는 온몸에 악취를 풍기며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조사과정에서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벌벌 떨었다.

아내가 강도를 당했다는 소식에 흥분한 채 달려온 박 씨의 남편도 김 씨의 사정을 듣고는 말문을 닫았다. 박 씨 부부는 선선히 합의를 해준데 이어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김 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탄원서까지 써주고 돌아갔다.

당시 김 씨를 검거한 경찰관은 "내 자식도 군대 다녀와 딱 저 나이 또래인데 검거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눈에 자꾸 밟히더라"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됐기에 전과 한 건 없는 엘리트 청년을 저 지경까지 몰고 갔는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했다.

해운대경찰서는 8일 김 씨를 특수강도 혐의로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