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철님의 서양화 / 당신을 사랑합니다
▲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59.5x72.7cm, 2016
함몰되지 않기 위한 몸짓, 그 변주를 읽는다.
존재라는 거푸집 안에서의 다층적 공존방식
홍경한(미술평론가)예술가들은 동기화하거나 재해석할 뿐
더 이상 신이 창조한 자연을 캔버스에 올곧이 있는 그대로 옮기려하지 않는다.
재현의 대상으로써의 자연이 표현의 대상으로써의
자연으로 자릴 바꾼 지도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여전히 예술가들에게
태초의 날것이요, 시(詩)이며 화(畵)이고 악(樂)이다.
작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삶의 매개이자 회로이면서 묵묵한 예술적 지표다.
▲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53x72.7cm, 2016
▲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53x72.7cm, 2016
▲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53x72.7cm, 2016
▲ 정철, 월하정인, Acrylic on Canvas, 60.6x72.7cm, 2016
작가 정철의 작업 배경에도 자연이 놓여 있다.
첫 개인전을 연 1993년 이후 발표한 <무덤 앞에서> 시리즈는
‘목마른 그리움이 목 타는 그리움’으로 치닫던 일상을
기억의 환류 아래 담아낸 연작이다.
1) 어딘가 정처 없는 읊조림이 낱낱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작업해온 <믿고 싶은 땅>과 <산> 시리즈 역시
작가의 마음에 담긴 대지와 거대한 자연의 위용 및 본질을
자신의 존재성과 결부시킨 작업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연은 실체적 자연이 아니라
부재한 존재를 대리하는 기호이며 결핍된 유토피아로써의 자연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화사를 관통하는 변주이다.
우선 정철의 작업을 대표하는 <믿고 싶은 땅>과 <산> 연작은
조형형식면에서 사뭇 다르다.
전자는 비교적 추상적, 은유적 여운이 강하지만
후자는 산(山)의 형상과 물의 흐름,
사람의 모습까지 구체적으로 곁들이고 있어 구상계열에 가깝다.
또한 전자는 가감과 생략을 통한 꿈틀거림이 인상적일뿐더러
짙은 그리움과 고독을 풀어헤치는 격정성이 눈에 띄는 반면,
후자는 차분함과 일상성이 지배적이다.
주 색깔과 표현에서도 차이가 크다.
<믿고 싶은 땅>이 대체로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누르기 어려운 감정 아래 단일색으로 완성된다면
<산>은 상대적으로 다양한 컬러와 묘사를 내보인다.
특히 <믿고 싶은 땅>은 재료의 선택이 자유로운 대신
<산> 시리즈는 개념적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리얼리티라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를 나타낸다.
드물게도 작가는 서로 상이한 듯한
이 두 형식의 작업을 격년제로 펼쳐낸다.
한해는 <믿고 싶은 땅> 연작을,
그 다음해는 <산> 연작을 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스스로의 자기함몰에 젖지 않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예술적 인간으로 살기 위한
자발적 담금질로 비춰진다.
흡사 느닷없이 불쑥 치밀어 오르는 어떤 무엇으로 인해
도무지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을 때의 외마디 비명,
하지만 이내 침묵의 고요 속으로 침잠하는
자정순환의 고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그가 언급한 자기함몰의 두려움이란
작가 자신의 예술관,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나름의 질서라고 해도 딱히 그르진 않다.
▲ 정철, 월하정인, Acrylic on Canvas, 60.6x72.7cm, 2016
▲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60.6x72.7cm, 2016
▲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60.6x72.7cm, 2016
▲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60.6x72.7cm, 2016
하지만 이 두 형식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맥락이 감지된다는 것인데.
그건 원형으로써의 자연, 거스를 수 없는 대지를 품은 자연,
그 자연의 순수와 믿음, 실제적 인간으로써의 깊은 관념과 사색의 연관성이다.
그리고 그건 모든 포박으로부터의 탈주와 속박의 강약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그림들을 훑어보면
예나 지금이나 예술의 가치와 목적을 어느 일정한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예술적 인간으로서의 성숙을 지향하는 작가적 태도를 읽게 한다.
예술을 예술 내부에 한정짓지 않은 채
현재 이 순간, 머물었거나 머물게 될 모든 장소와 기억,
그 진한 여운을 예술로 꽃 피우기 위한 힘겨운 투쟁 역시 달라지지 않고 있다.
나아가 그의 그림들은 화제와 물체간의 대조,
추상과 구상의 대립 또는 조화, 도식과
자유로움의 유기적 상호성이라는 등선에 서 있다.
이것은 정철의 작업이 시지각을 넘어
자발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표현을 가리킨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정철이 새롭게 선보이는
이번 모리스갤러리 개인전 출품작들은 기존과는 또 다른 버전이다.
듬성듬성한 화면에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의 남녀가 등장하는 이들 작품들은
양자 간 애정과 그에 따른 연민이 강하다.
보편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연인의 스토리를 담아내고 있기에
소박하면서도 도시인들에게 흔한 외롭고 쓸쓸한 여울도 감지된다.
근작에 자주 출현하는 인물들의 표정은 비교적 무덤덤하나
복합적인 감정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 중 몇몇의 작품들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그림이다.
굳이 정의하자면 일종의 풍속화, 장르화라 해도 딱히 틀리지 않다.
내용은 이해하기 쉽다. 남녀 간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심리를
작가의 시선으로 풀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긴 설명이 주저리주저리 달려 있지는 않다.
그저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봤음직한 상황을 그려놓았기에
하나하나가 일상의 방사이자 보편성의 반추로 남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작들은 편하다.
유의미한 부분은 ‘삶이란
시간의 일부일 뿐’이라는 기존 포괄적 관념을 넘어
또 다른 실험의 연장을 내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또한
'함몰되지 않기 위한 몸짓’으로 해석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사실 예술가에게 있어 방법성과 재료, 기술은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용에 따라 달리하는 그릇일 뿐 그 이상의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
따라서 정철이 지금 어떤 그림 스타일을 내보이던
그건 작가 고유의 철학의 맥락으로 읽어야지
그것 자체로 섣불리 판단해선 곤란하다.
오히려 정철의 그림들은 지금도 평면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러 차원의 접근법을 연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통찰적 시각, 경험적인 지각대상과
존재의 원리적 개념대상을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우리가 바라봐야할 지점은 바로 그것이다.
특히 근작에서 주목해야할 핵심은
존재성 안에서의 다층적 공존방식이다.
일면적인 세계, 총체적인 대상과 그 종합적인 표현의 방법적 구상,
조형적인 표현의 불완전성을 향한 충실한 지각이
어떻게 예술로 발화될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불어 예술가를 옥죄는 현실적 제약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정철,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60.6x72.7cm, 2016
▲ 정철,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53x72.7cm, 2016
▲ 정철,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60.6x72.7cm, 2016
▲ 정철, 정철, 당신을 사랑합니다, Acrylic on Canvas, 66x120cm, 2016
▲ 정철, 월하정인, Acrylic on Canvas, 99x48cm, 2016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과거의 작품들과 오늘의 이 작업들이
어떤 순환의 고리를 지니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선 과거의 그림들이 개별적인 기호 아래
화자의 심상을 옮기는 전이적 도구로서 존재했다면
현재의 그림들은 분명 그 어떠한 것들이
시초의 모습을 드러내는 선에서 멈춰져 있음을 발견토록 한다.
표면적으로 지루함이 배제되고 간략화 되었음에도
무언의 언어들이 공유의 단락을 들추게 한다는 점에서
시선을 끌기에 아쉬움이 없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작들은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애써 이것저것을 논하지 않아도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쉽고 차분하게 다가오는 편이다.
그렇다고 현재를 기반으로 한 일상성,
그것을 모티프로 삶의 근원에 대해 묻는 도정이
조형형식이 달라졌다고 하여 변하는 건 아니다.
따라서 정철 작업의 가치조건은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전혀 다른,
그러나 혹자에겐 연장선에서 확인될 것이다.
1) <믿고 싶은 땅> 시리즈는
즉흥적이며 순간적인 상황에서 비롯된다.
여기엔 일상적으로 행하는
사전 미감의 유추나 스케치 등을 통한 형태분석은 없다.
오직 실존의 메타포를 근간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그 작품들은 주위 공간과 섞이며 교통하는 수순을 밟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굳이 분리해 해석자면 이러한 징후는 <믿고 싶은 땅>에서 강하다.
그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스친 생각은
왠지 모를 고독과 침묵이 흐르고 공허감마저 만연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이 그토록 가슴 속에 응결되어 있기에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이 다가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힘들게 세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 미술인들의 응어리인지도,
아니면 인간의 존재성에 대한 자문이거나
무언가 정형적인 틀 속 에서의 거부와 항거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은 심리적으로 불편하고 비정형적으로 드러난다.
간혹 구상성을 획득하고 있음에도 제도적이지가 않다.
일그러진, 그래서 상당히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그의 작품들은
표피적 관점에서 볼 때 조형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의도를 내포하지 않고 있음이 확연하다.
돌아 보건데, 그 작품들은
한결 같이 육중하고 꺼끌꺼끌하다는 느낌이 배어 있으며
도식화되고 규칙적인 것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거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는 수십 년간 몸에 밴 기존성에 대한 거부의 몸부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