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11월 21일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운명에서 분수령이 된 날이라 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홀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소비에트 사회의 최상층 인사들 즉 음악가, 작가, 배우, 화가, 그 밖의 온갖 유명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명예가 손상된 이 작곡가의 <교향곡 제 5번> 초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작곡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고 가십과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어떤 센세이션과 스캔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떠한 테러가 횡행하더라도 사교생활은 결국 계속되는 것이다.
마지막 음표가 울리고 나자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에 있었던 주요 쇼스타코비치 작품들의 소비에트 초연이 거의 항상 그랬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은 거대한 도덕적 압력 하에서 중대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한 정직하고 사려 깊은 예술가가 행한 노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교향곡은 신경을 극도로 곤두세우는 박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작곡가는 열에 들떠서 미궁에서 나가는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자 그는 결국 어떤 소비에트 작곡가의 표현처럼 자기가 <이념의 가스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얼어붙은 땅의 휴머니즘 -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은밀히 유통되던 카세트 테이프 가운데 ‘혁명’이라는 게 있었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교향곡 5번 D단조.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 사람의 작품으로 제목까지 불온하기 짝이 없으니 당시에는 몰래 들어야 하는 음악이었다. 은밀한 호기심으로 이 곡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 곡을 ‘인터내셔널가’에 버금가는 이념 음악으로 신비화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음악 자체에 대한 이해는 뒷전이었다.
30년대 소련. 스탈린 1인 숭배 체제 하에서 3천만 명이 숙청 당한 공포 정치의 시대였다. 어떤 음악을 써야 할지 작곡가보다 ‘당’이 더 잘 알던 시대였다. 문화 예술은 암흑 속에서 낙관주의를 설파해야 했다. 당의 지침에 순응하지 않는 예술가에게는 어김없이 ‘형식주의’ ‘타락한 자본주의’ 등의 딱지와 함께 생명의 위협이 가해졌다. 이념과 체제의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던 시대였다.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1936년 1월,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라는 <프라우다>의 비판을 받았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쇼스타코비치는 그해에 완성한 교향곡 4번 C단조의 초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짙은 고독과 염세적인 분위기에 싸인 이 곡은 ‘타락한 부르주아 음악’으로 평가될 게 예상됐고, 그것은 곧 작곡가의 신변을 위협할 게 분명했다. 1937년 11월에 발표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압제에 대한 쇼스타코비치의 대답이었다.
1악장과 3악장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일소하는 4악장의 당당한 화음과 강력한 타악기의 향연은 아무리 혹독한 억압에도 꺼지지 않는 민중의 승리를 표현했다고 해도 좋고, 운명을 대하는 개인의 낭만적인 의지를 그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탈린 체제의 전진과 승리를 찬양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변 비평가들은 ‘낙관적 비극의 전형을 그렸다’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의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이 곡은 초연 당시 1시간이 넘도록 박수를 받았다. 연주 시간 45분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곡의 피날레에서 나는 생기에 찬 낙관적인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앞의 세 악장에서 드러난 비극적인 느낌들에 대한 해결책을 추구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모호한 표현으로 체제와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아간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훗날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가 완전히 의기투합한 것처럼 보인 적도 있었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레닌그라드가 포위된 1941년 완성한 교향곡 7번 C장조 ‘레닌그라드’. 쇼스타코비치는 나치에 대항하여 온 인민이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고, 전쟁의 포연 속에서 절반밖에 남지 않은 볼쇼이관현악단 멤버들을 불러모아 이 곡을 연주했다. 평화를 호소한 이 음악회는 연합국 내에서 ‘쇼스타코비치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스탈린에 대한 저항 의지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이 곡을 ‘레닌그라드’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이미 철저히 파괴했고 히틀러가 마지막 타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다.”
전쟁이 끝난 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9번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이 곡이 세계2차대전의 승리를 기리는 장대한, 기념비적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베토벤의 9번이 그러했듯 쇼스타코비치의 최대 걸작이 나올 걸로 은근히 기대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기대를 비웃기나 하듯 단순하고 귀엽고 유머가 넘치는 교향곡을 내놓았다. 스탈린은 격분했고 1948년 ‘즈다노프의 비판’이 이어졌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스탈린 1인 숭배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저열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
음악은 인간의 마음과 의지 그 자체를 표현하는 가장 추상적인 예술이다. 문학은 언어로, 미술은 구체적인 회화나 조형물로 말하기 때문에 체제를 옹호했느냐 비판했느냐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그러나 음악, 특히 가사 없는 교향곡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한 개인이나 집단이 판단하려고 할 경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음악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무한히 다양한 뉘앙스와 표현의 섬세함, 바로 그 점이 음악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곡가보다 당이 음악을 더 잘 알던’ 스탈린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 공포 정치 속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의 의지를 묘사한-적어도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에 의하면-교향곡 5번을 소련 공산당이 찬양한 것은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이 시대를 웃으며 살아가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지휘자 게르기에프는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독재자요, 폭군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억누를수록 쇼스타코비치는 더욱, 더더욱 강해졌다. 스탈린의 압제는 이런 의미에서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음악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레코드는 키릴 콘드라신 지휘의 모스크바필하모닉이 녹음한 전집(멜로디아)을 일단 쇼스타코비치 해석의 준거틀로 볼 수 있다. 음질에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작곡가와 40년간 교류한 콘드라신의 해석이 갖는 무게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낱장으로 발매됐다. 그밖에 예프게니 므라빈스키 지휘의 레닌그라드필하모닉(1967년/Praga), 겐나지 로제스트벤 스키 지휘의 소련문화성교향악단(1984∼1987년/멜로디아) 등 소련 음악가들의 연주를 우선 듣는 게 순서일 것 같다.
'혁명', '레닌그라드'
1925년 이제 막 출범한 소비에트연방에서 19살이 된 쇼스타코비치는 졸업작품으로 <1번 교향곡>을 발표하며 그 음악성을 국내외에서 인정받았다. 그의 <1번 교향곡>은 당시 소련의 레닌그라드뿐 아니라 베를린, 필라델피아에서도 연주되었으며, 소련에서도 국제적으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음악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20세기 초반 유럽의 음악계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새롭게 형성된 '현대 음악(전위 예술, 표현주의 등)'의 거대한 물결이 한 흐름으로 잡아가고 있었다. 소련을 넘어 유럽사회에까지 유명해진 쇼스타코비치는 당연하게도 이 새로운 조류에 푹 빠져든다.
그런데, 1930년대 초반부터 사회개조, 사상개조, 인간개조, 당파성, 계급투쟁의 무기로서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예술관'이 형성됨에 따라 '작곡가가 아니라 당이 음악을 결정하던 시대'가 시작되자 이와 함께 쇼스타코비치의 불행과 아슬아슬한 서커스가 시작된다. 1번 교향곡 이후로 연이어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대중적 인기도와 음악적 완성도가 하늘을 찌를수록 당의 질시와 견제, 협박이 그에 비례해서 커진다. 이때 발표한 <3번 교향곡>의 부제가 '5월1일' 즉, 노동절에 대한 교향곡이다.
비판이 높아지면 이런 곡을 한번씩 발표하면서 비판을 잠재웠던 것이다. 그런데 4번 교향곡을 발표하기 전에 발표한 '므첸스크의 맥베드 부인 op.29'라는 오페라는 드디어 스탈린과 당의 심기를 크게 건드리고 만다. 이 작품에 대해 1936년 당과 프라우다는 '부르주아적인 퇴폐성을 띤 형식주의자의 불협화음',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로 몰아세우며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는다. 그러자 쇼스타코비치는 고독과 염세주의를 표방한 4번 교향곡의 발표를 포기하고, '혁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5번 교향곡>을 1937년에 먼저 발표한다. 암울한 앞부분과 당당하고 강력한 타악기의 후반부를 이루는 '혁명'에 대해 쇼스타코비치 본인은 첫 공연에서 '당국의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답변'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당과 스탈린은 볼셰비키 혁명을 찬양한 음악이라고 판단하고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극치라며 '낙관적 비극의 전형', '더 밝은 미래의 비전을 들려주었다' 등의 찬사와 함께 쇼스타코비치를 복권시켜 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쇼스타코비치는 '앞부분의 암울한 부분이 바로 스탈린주의 치하에 짓눌린 민중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하여 아슬아슬한 곡예를 부리며 스탈린주의를 비꼬았다.
그리고 2차 대전이 터지면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그 전의 어정쩡한 태도와 달리 분기탱천하여 흩어져있는 볼쇼이 악단을 모아서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라는 곡을 발표하고, 소련의 민중들에게 독일의 나찌즘에 맞서서 레닌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 가열차게 싸워나가자고 선동한다. 이에 대해 당에서는 극찬하며 스탈린 상을 시상한다. 그러나 종전 후에 발표한 <9번 교향곡>에 대해 또다시 1948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소집한 소련 음악가 회의에서 '타락한 부르주아의 형식주의 추종'이라는, 이른바 '지다노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 정책을 찬양하는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를 발표하여 이를 무마하고 1950년 다시 스탈린 상을 수상했다. 이러한 쇼스타코비치의 정치적, 음악적 비극은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여러 가지 다양한 실험적인 기법을 비교적 자유롭게 도입하며 새로운 쇼스타코비치로 우뚝 선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러한 목숨을 건 시소타기 속에서도 러시아 민속 음악, 재즈, 바흐를 바탕으로 15개의 교향곡과 현악 4중주를 비롯해 2개의 오페라, 하나의 오페레타, 6개의 협주곡을 남겼다. 그리고 이외에도 독주곡. 실내악. 성악작품. 영화 음악. 발레 음악 등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147개의 작품을 남겨놓고 1975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마감했다.
스탈린의 압박이든, 정치적 타협이든, 아니면 혁명의 열정이든 간에 그의 교향곡 5번 '혁명', 7번 '레닌그라드' 등은 지금도 명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Dmitrii(Dmitrievich) Shostakovich 1906∼1975
소련 작곡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광산기사로서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 초보교습을 받은 뒤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하여 L. 니콜라예프에게 피아노를, M. 스타인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25년에 졸업하였다. 26년 졸업작품 《교향곡 제 1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명성을 높였다. 다음해에는 쇼팽국제콩쿠르에서 명예상을 받았고 그 후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계속하여 10월혁명에 붙인 《교향곡 제 2 번(1927)》, 메이데이를 위한 《교향곡 제 3 번(1929)》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었다.
34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1963년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로 개정 초연)》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자 유럽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도 잇따라 상연되었는데, 이 오페라에서 사용되었던 전위적 수법은 36년 1월 《프라우다》지에서 철저한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37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방침에 따른 작풍으로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하여 압도적인 성공으로 명예를 회복하였고, 그 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레닌그라드음악원·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진을 지도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다시 <서구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에 빠졌다>고 A.A. 주다노프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평이한 어법으로 소련의 국토개조계획을 칭찬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1949)》를 발표하였다. 다시 53년 I.V. 스탈린 사후에 발표한 《교향곡 제10번》에서도 논쟁을 일으키는 등 늘 화제대상이 되면서 정력적으로 대작을 작곡하였다. 소련의 이른바 <해빙기>를 맞아 60년대부터는 반체제적 텍스트를 사용하고, 내용도 사색적인 경향을 취하는 등 새로운 전개를 보였다.
작품은 오페라·발레음악·영화음악과 극의 부수음악을 포함하는 관현악곡·협주곡·실내악곡 외에 피아노독주곡과 가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특히 극음악의 작품이 많으나 내용과 밀도에서 교향곡과 현악 4 중주곡이 창작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곡이 넘는 교향곡은 생애를 통하여 몰두하였던 장르로 모두가 대작인 동시에 작곡가가 놓였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작품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지니고 있다. 전 15곡의 현악 4 중주곡은 후반에 집중 작곡했으며, 매우 세련되고 충실한 내용을 보여 B. 바르토크의 현악 4 중주곡과 함께 20세기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작풍은 서유럽의 모더니즘 영향을 받았던 1920년대, 다시 서방측의 새로운 기법에 접근했던 말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30년 스탈린에 의한 <형식에서 민족적, 내용에서 사회주의적>으로 요약되는 정치적 요구에 따라 평이한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취하면서 장대한 효과를 올렸다. 그의 사후 수년 후에 발표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은 그의 숨겨진 내면을 알 수 있는 실마리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922년∼27년까지 결혼 전 사랑하던 타디야나 글리벤코에게 보낸 편지가 91년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