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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현실이 된 한라산 구상나무 대규모 枯死, 대책은 없나?

전문가 칼럼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현실이 된 한라산 구상나무 대규모 枯死, 대책은 없나?

조선비즈
  •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
    •             


    입력 2019.10.05 05:00

    지난 9월 하순 한반도에 찾아온 태풍 ‘타파’는 여지없이 많은 피해를 남기고 갔습니다. 어떤 태풍이건 피해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을 수는 없기에 오는 것이 반갑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태풍에게 그런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해안의 적조현상을 해결한 것과 같은 긍정적 기능이 동전의 양면처럼 자리합니다. 큰 나무가 넘어진 곳에는 그 밑에 갇혀 지내던 씨들이 발아해 새 아침을 시작합니다. 비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져나가면 햇빛이 땅바닥까지 도달해 그곳의 어린 식물에게 기회의 시간을 부여합니다.

    목말라 하던 지역에 큰 비를 내려주기도 하고, 각종 병충해에 시달리던 식물의 몸을 깨끗이 씻어주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식물의 씨를 먼 곳까지 무료로 배달해 주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린 개체를 솎아내 주는 작업도 태풍이 합니다. 이렇듯 태풍은 생태계의 질서를 새로이 재편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태풍 ‘타파’가 남기고 간 흔적을 안고 있는 백록담 풍경.
    태풍 타파는 제주도에 700㎜ 이상의 폭우를 쏟아부었습니다. 덕분에 만조를 이뤘다는 사라오름과 백록담의 비경을 보기 위해 평일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아침 7시 30분에 벌써 성판악휴게소 주차장에는 만차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습니다.

    예보대로 날은 쾌청했습니다. 하지만 해발 750m인 성판악휴게소의 아침기온은 쌀쌀하다 못해 좀 추웠습니다. 급히 반소매 옷을 덧입고도 모자라 점퍼를 하나 더 챙겨 넣고 백록담으로 향한 발걸음을 출발시켰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바람 없는 숲속의 따뜻함은 미련스레 꽁꽁 여민 등산객의 웃옷을 도로 하나씩 벗겨냈습니다. 그 옷들은 모두 짐이 되어 10시간 10분 동안 등에 업혀 다녀야 했습니다.

    숲속은 바람을 막아주어 따뜻하다.
    2시간 45분 만에 도착한 진달래밭대피소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컵라면 종류는 팔지 않은 지 오래고, 현재 공사 중이라 아무것도 살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준비해 오지 않은 등산객이 체력이 떨어지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을텐데, 등산로 입구에서 안내라도 충실히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공사 중인 진달래밭대피소에서는 현재 아무것도 살 수 없다.
    진달래밭대피소에 이르기 전부터 두 눈을 놀라게 한 광경은 구상나무 고사목(枯死木)이었습니다. 한라산 숲을 굳건히 지켜주던 푸른 병사들이 몰살당한 듯 백골 상태가 되어 나자빠진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흡사 구상나무의 무덤을 보는 듯했습니다. 허옇게 말라 죽어가는 모습도 그렇지만 쓰러진 나무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건 이번 태풍이 한 짓이 아닌 게 분명했습니다. 구상나무의 고사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만, 이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구상나무 고사목 풍경
    위 사진의 허옇게 나타난 부분이 모두 구상나무 고사목이다.
    그동안 많은 조사와 연구에도 불구하고 구상나무 고사의 뚜렷한 원인을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올 3월에 한라산 구상나무의 고사 원인 중 하나가 ‘전염성이 강한 병해’라는 사실을 처음 규명했다고 합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에서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라산 구상나무의 쇠퇴 및 고사에 관여하는 병해 8종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병해가 왜 유독 구상나무에만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나 설명은 부족해 보입니다.

    구상나무 숲이 검푸르게 나타난 2009년 10월 6일의 모습.
    허옇게 고사목이 드러난 2019년 9월 24일의 모습.
    구상나무 숲이 짙은 녹색이었던 2010년 7월 7일의 모습.
    이미 고사가 진행된 2014년 5월 28일의 모습
    올해 5월에 제시된 견해는 주목해 볼 만합니다. 수분 과다를 구상나무 고사의 원인으로 지목한 연구결과입니다. ‘한라산 구상나무 공간적 고사패턴 분석을 통한 고사원인 추정’이라는 논문으로, 한라산 구상나무 고사의 원인 중 하나가 강수량 증가와 증발량 감소 등으로 인한 토양의 수분 과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연구와는 정반대의 결론입니다. 기존에는 기후변화에 따른 건조와 가뭄 등으로 구상나무가 수분 스트레스를 받아 고사에 이른다고 추정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많은 수분이 한라산의 구상나무를 죽음으로 내몬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수분 저장률이 높은 제주조릿대가 점점 들어차면서 땅 속의 수분이 지나치게 많아지게 된 것이 한라산 구상나무를 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 논문에 따르면 경사도가 큰 지역일수록 고사율이 낮고, 일사량이 높은 지역일수록 고사율이 낮다고 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경사도가 작아서 토양에 수분이 상대적으로 많고, 일사량이 적어 수분 증발량이 적은 곳에서는 구상나무가 고사할 확률이 높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토양 수분의 과다를 구상나무 고사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왼쪽 주목은 푸른 반면에 오른쪽 주목은 고사했다.
    왼쪽 사스래나무는 건재한 반면에 오른쪽 구상나무는 고사했다.
    이 연구결과에 개인적인 견해를 곁들이자면 침엽수와 활엽수의 차이도 한몫 거들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라산에서는 구상나무와 같은 침엽수인 주목의 경우에도 적잖이 고사가 진행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활엽수인 사스래나무 같은 경우에는 건재한 편입니다. 활엽수다 보니 상대적으로 증산작용이 활발한 사스래나무는 토양에서 빨아올린 수분을 넓은 잎을 통해 많이 배출하므로 별 탈 없이 자라는 것 같습니다.

    만약 토양내 수분이 고사의 원인이라면 문제는 과연 어떻게 하면 토양의 수분을 낮출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라산을 꼭 짜서 탈탈 털어 햇볕에 말린다면 구상나무가 잘 살 수 있을 텐데, 이런 만화적 상상력 외에 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백록담 분화구 안에서도 구상나무 고사목이 나타난다.
    학술조사 허가를 받아 들어가 본 분화구 안에서도 고사한 구상나무 개체들이 보였습니다. 심은 건지 모를 어린 개체도 다수 볼 수 있긴 했습니다만 미래가 밝아보이진 않았습니다.

    구상나무 고사는 한라산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어서 지리산 등지에서도 같은 문제가 보고됩니다. 세계적인 한국특산종인 구상나무를 이젠 세계에 내놓고 자랑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구상나무뿐 아니라 여러 침엽수가 빠르게 고사하는 실태가 전국의 주요 상록침엽수림에서 나타난다고 합니다. 수십 년 전에 했던 학자들의 경고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분화구 안쪽의 어린 구상나무의 앞날도 밝아 보이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