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정리/38도선은 이렇게 그어졌고 禁斷의 선으로 굳어졌다! 趙甲濟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對日참전을 약속하였다. 유럽에서 승리한 뒤 90일 이내 만주로 진격할 것임을 다짐하였다. 4월5일 소련은 1년이 남은 日蘇 불가침 조약을 연장하지 않겠다고 일본에 통보하였다. 스탈린은 바실리에프스키를 극동군 사령관으로 임명, 6월27일에 작전계획을 완성하였다. 만주, 요동반도를 주된 목표로 하고, 북한의 함북 라진 웅기 청진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한국에서 일본 등 反蘇세력을 배제하고, 미국 등과 함께 공동점령 관리한다는 정도의 구상을 갖고 있었다. 소련은 김구 이승만에겐 부정적 시각을 가졌다. 1945년 7월4일, 미국 전쟁부(육군성에 해당)의 전략 정책단은 일본과 한국을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이 분할 점령하는 구상을 했다. 7월10일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미군이 일본과 한국의 남부를 점령하는 계획을 토의하였다. 7월16일 미국은 뉴멕시코 사막에서 최초의 원자탄 실험에 성공하였다. 깊이 3, 지름 330미터의 거대한 구덩이가 파졌다. 지켜본 오펜하이머는 “이제 내가 죽음, 곧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힌두교의 경전 문구를 생각하였다고 한다. 트루먼도 7월25일자 일기에서 “우리는 역사상 가장 두려운 폭탄을 갖게 되었다”고 썼다. 7월17일,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소련 영국 정상회담에서 트루먼은 원폭 보유에 자신감을 갖고 회담을 주도하였다. 처칠은 뭔가 새로운 사건이 생겼다고 눈치 챘다. 다음 날 점심을 하면서 트루먼은 처칠에게 원폭 성공을 알려주었다. 이걸로 전쟁은 끝낼 수 있게 되었다고 자신하였다. 트루먼은 원자폭탄을 빨리 투하하여 소련의 참전 빌미를 없애고 싶어 하였다. 워싱턴에서는 원자폭탄으로 일본은 물론 한국도 단독 점령이 가능하다는 견해가 등장하였다. 7월24일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다”고 애매하게 이야기하였다. 스탈린은 “잘 사용되기를 바란다”는 정도의 반응이었고 큰 관심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원폭 개발 계획으로 침투한 간첩 클라우스 푹스, 그리고 워싱턴 주재 영국대사관에서 원폭 관련 업무를 보던 간첩 맥클린을 통하여 상세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비밀경찰 총수 베리아에게 연락하여 진행중이던 소련의 원폭 개발 계획을 재촉한다. 1945년 8월6일 아침 리틀 보이라는 별명을 가진 우라늄 원폭이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일본은 항복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항복을 선언하진 않았다. 8월9일 오전 나가사키에 패트 맨이란 별명의 플루토늄 원폭이 투하되었다. 8월8일 소련은 일본 정부에 선전포고하고, 8월9일부터 만주, 다음날 북한지역을 공격한다. 앞서 7월24일 포츠담에서 소련군 참모총장 안토노프와 미국의 마셜 육군참모총장은 소련의 극동지역 작전계획을 논의한다. 안토노프는 소련의 작전 목표가 만주와 요동반도 장악임을 분명히 하고 한국에 대한 작전 계획이 있느냐고 마셜에게 물었지만 없다는 답을 들었다. 마셜은 그러나 육군참모본부 작전국장 존 헐 중장에게 한국으로 군사력을 전개하는 준비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헐 중장은 38도선 근방에서 미국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하는 구상을 하였다고 한다. 7월26일 포츠담의 美蘇 군사회담에서 함경북도를 소련의 작전지역에 포함시키는 데 합의한다. 1903년 러시아는 일본에 39도선을 경계로 조선을 분할하자는 제의를 하였으나 거절되었다. 1896년엔 일본이 러시아에 38도나 39도선을 경계로 두 나라가 조선을 분할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러시아가 반대한 적이 있다.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明에 조선의 경기 충청 전라 경상도를 일본에 넘기고 조선은 그 이북만 통치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였지만 明이 거부하였다. 포츠담의 美蘇 군사회담엔 합참 소속의 전략정책단장 링컨 준장이 배석하였는데 그는 나중에 38도선 획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7월30일 미국의 전쟁지도기구인 합동전쟁계획위원회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에 對日 참전대가로 쿠릴 열도 사할린 그리고 북한지역의 점령을 제안할 것을 건의하였다. 8월2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일본은 막후에서 항복 조건을 타진하고 있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하여 거부한다고 하지 않고 묵살한다고 하였다. 트루먼은 거부라고 해석하고 원폭 투하를 서두른다. 8월9일 소련군 158만 명은 만주로 밀고 내려가는데, 그날 함북 경흥군에 진입하였다. 12일엔 소련 해병대가 함북 웅기, 나진항을 장악하였다. 13일엔 청진을 공격, 16일에 점령한다. 두 방의 원자폭탄을 맞고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한 8월9일에서 10일에 걸쳐 도쿄의 천황 궁궐 방공호에서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렸다. 스즈키 총리는 항복을 건의하였지만 군부는 결사항전을 주장하였다. 昭和 천황은 “견딜 수 없는 것도 견딜 수밖에 없다”면서 항복을 결단하였다. 10일 일본 정부는 스위스와 스웨덴의 일본 공사관을 통하여 연합국에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항복하겠다는 통보를 하였다. 그날 정오 도고 외상은 일본주재 말리크 소련 대사에게 항복 결정을 직접 통보하였다. 스탈린은 트루먼보다 한 나절 먼저 알게 되었다. 8월10일 오전 트루먼 대통령은 긴급 각료 회의를 소집, 일본의 항복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냐를 토의하였다. 번스 국무장관은 천황제를 유지할 순 없다고 반발하였지만 스팀슨 전쟁장관, 포레스털 해군장관 등이 수락을 건의, 트루먼은 일본의 항복을 수용하기로 한다. 이 자리에서 미국이 한국全域을 점령하여야 한다는 해리만 등의 건의가 있었지만 트루먼은 미군이 전개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면서 분할점령에 동의하였다. 8월10일 저녁 전쟁부 차관보 존 맥클로이는 파견 근무중이던 두 육군 대령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에게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할 수 있는 선을 그으라고 지시하였다. 가능한 넓은 지역을 확보하도록 하되 미군의 능력을 고려할 것을 지침으로 주었다. 두 대령은 옆방으로 들어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한반도 지도를 보면서 간단하게 38도 선을 분할 점령선으로 결정하였다. 한국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러스크의 회고에 의하면 38도선 이남에 서울과 부산항이 있다는 점이 크게 고려되었다고 한다. 38도선은 일본의 조선군사령부와 만주 주둔 관동군사령부의 관리 경계이기도 하였다. 매클로이는 8월12일에 열린 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조정위원회(SWNCC)에 38도선 안을 내어놓았다. 해군은 39도선을 주장하였는데 링컨 준장(합참 소속의 전략정책단장)은 소련이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반대, 38도선 안을 통과시켰다. 8월14일 스팀슨 전쟁부 장관과 포레스털 해군부 장관은 일치된 의견으로 38도 분할 점령안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 裁可를 받았다. 8월15일 트루먼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한반도 분할 점령안을 통고하였다. 대통령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던 24군단을 한국으로 보내도록 맥아더 사령관에게 지시하였다. 스탈린은 8월16일 미국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다만 소련군이 쿠릴 열도뿐 아니라 혹카이도의 북반부를 점령하였으면 한다는 수정제안을 하였을 뿐이다. 미국은 스탈린이 며칠 간 숙고한 뒤 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너무나 빠른 답신에 놀랐다. 스탈린이 왜 38도선 분할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는지 지금까지도 여러 설이 있다.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다는 생각이 원래 없었고 다만 소련에 적대적인 세력이 전부를 지배하는 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된 관심은 러일전쟁 때 일본에 당한 수모가 하나의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일본 점령에 소련이 참여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한반도 점령을 둘서 싸고 미국과 대결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도 하였을 것이다. 미국은 그러나 스탈린이 그토록 원하던 일본 분할 점령 관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스탈린은 1945년 9월20일 한반도 분할을 한반도 분단으로 악화시키는 운명적 조치를 취한다. 스탈린은 소련군최고사령관 자격으로 안토노프 육군참모총장과 공동 명의로 연해주군관구 및 북조선주둔소련군사령부에 親蘇 북한정권 수립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 지시문은 1993년 2월26일자 마이니치 신문에 의하여 그 全文이 공개되었다. 지시의 핵심은 소련군의 지원 하에 북한에 ‘부르조아민주주의적 정권을 수립하라’는 것이다. 이는 공산주의 세력과 비공산주의 세력을 묶어서 민주주의란 위장 명칭 아래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북한정권을 단독으로 세운다는 것이다. 한국 공산주의 연구의 전문가인 이정식 교수는 이렇게 썼다. <이 지령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는 것이었다. 남북의 재통합이나 민족 재통일을 위한 모든 논쟁과 노력을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 뒤의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김구 김규식의 노력은 스탈린과 김일성에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의 명령은 38도선을 군사분계선이 아니라 영구분단선으로 굳히는 방향으로 우선 집행되었다. 소련군은 주한미군의 38도선 자유왕래를 논의하자는 제안을 거부하고, 38도선에 있던 소련군 연락사무소를 폐지하였으며 드디어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였다. 38도선이 禁斷의 분단선으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스탈린에게 있다. 스탈린의 운명적 결정 중 지금까지 한민족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은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정권 수립의 도구로 삼기로 한 결정이다. |
[ 2021-07-05, 23: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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