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책략’(朝鮮策略) 以後 140년, 그때와 비교해 달라진 것 있나?)
지도자는 無能하고, 국민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우병 선동(煽動)'에 놀아날 만큼 수준이 낮다. 나라 망하는 공식(지도자의 無能 + 국민의 未開함)의 뼈대가 갖추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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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는 中國을 全的으로 의지하게 되고, 지식(知識)과 교양(敎養)이 부족한 國民들은 자유민주진영 美國과 日本을 배척하다가 亡國의 길을 걷는다’
'중국의 조용한 침공'이라는 책을 쓴 '클라이브 해밀턴' 교수(호주 찰스 스터트大)의 朝鮮日報 인터뷰 記事(7월 20일字) 中 일부는 이렇다.
'한국의 정치 지도층은 지레 겁을 먹고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나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독립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도박’이다…어렵게 쟁취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지금, 親中 정치인, 親中 재계 엘리트, 親中 여론 형성자들에 의해 팔려가고 있다. 이들은 자유와 독립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만의 부(富)와 정치 권력, 사회적 영향력만 생각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주권국가로서 ‘독립’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만약 대답이 ‘별로’라면 중국의 돈을 받아먹고 계속 머리를 굽신거리면 된다. 반대로 ‘아주 많이’라면, 중국이 부과하는 경제적 처벌을 감내하면서 자유를 얻기 위한 값을 치러야 한다…한국인들은 오늘날 중국의 위구르 인권 탄압 같은 범죄 행위에는 둔감하고, 70년도 더 지난 과거 전쟁 범죄에는 매우 민감하다, 놀랍다. 하지만 진실은 동북아를 지배하려는 중국의 야망을 견제할 수 있는 한국의 동맹은 일본이라는 점이다. 중국 공산당은 한국 내 반일 감정을 격화시키기 위해 적극 움직이고 있다. 한국 내 일부 반일 민족주의 단체들은 중국 공산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記事의 타이틀은 '중국에 겁 먹고 나약한 한국 정치인들…어렵게 쟁취한 독립 지킬 수 있나'라고 되어 있는데, 朝鮮日報에는 같은 날자로 '美·EU·英·日·나토 "중국 사이버 활동 규탄"…한국만 쏙 빠졌다'는 타이틀의 記事도 게재되어, 묘한 앙상블을 연출했다. 호주를 향한 中國의 전방위 침투 전략을 고발한 '해밀턴' 교수의 이 책은 2018년에 출간되어, 中國 공산당의 본질을 꿰뚫었다고 평가받으며 호주와 美國의 對中國 전략을 수정하게 만들 만큼 반향을 일으켰다.
朝鮮의 개화파 관료 김홍집(金弘集, 1842~1896)은, 1880년 8월 日本을 방문하여 近代化된 모습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한 달 後 귀국하면서 당시 日本 駐在 淸國 외교관 '황준헌'(黃遵憲, 1848~1905)으로부터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책을 받아온다. 책에는, 당시 南下를 추진하는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朝鮮과 日本, 淸國이 서로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는 황준헌(黃遵憲)의 생각이 담겼다. 朝鮮에 대한 지적(指摘)으로는 이렇게 나온다.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朝鮮을 위태롭게 여기며 바라보는데, 정작 朝鮮人들만 임박한 재앙(災殃)을 알지 못한다.
이어, 거론한 것이 '연작처당(燕雀處堂)'이다. '불이 나서 집이 모두 불타게 되었는데도 한가로이 처마에 앉아 지저귀는 제비와 참새’라는 뜻이다. 제비와 참새는 당연히 朝鮮을 가리킨다. 황준헌(黃遵憲)은 朝鮮이 구사(驅使)할 만한 전략과 관련해 이렇게 조언(助言)했다.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
中國과 親하고, 日本과 結束하며, 美國과 連帶하여 자강(自彊)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귀국한 김홍집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高宗)에게 전달했다. 고종(高宗)은 책 내용에 관심을 보이며 관료 등 주요 인물들에게 회람시켰다. 하지만, 당시 朝鮮의 爲政者나 知識人들은 時代의 변화 흐름을 읽지 못했다. 오히려 책 내용에 反對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움직임이 더욱 강해졌고, 1881년 3월 25일 영남 유생(儒生)들로부터의 만인소(萬人疏, 집단건의)가 접수되기에 이르렀다. 만인소(萬人疏) 本文은,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려 통곡하고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는 글귀로 시작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한 고종(高宗)은, 김홍집(金弘集),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 개화파 관료를 ‘역적’(逆賊)으로 宣布하고 處刑을 명령했다. 친러(親露) 정권 고종(高宗)에 의해 동원된 보부상(褓負商) 등 수천 명의 군중이 김홍집(金弘集) 등을 處刑하기 위해 모여들었고, 日本軍은 김홍집(金弘集) 등을 호위했다.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은 日本 망명길에 올랐으나, 김홍집(金弘集)과 정병하(鄭秉夏)는 日本軍의 만류를 뿌리치고 거리로 나섰다가 붙잡혀 광화문 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당시 駐韓 日本 공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김홍집(金弘集)의 최후는 이랬다.
‘군중들은 김홍집을 난자(亂刺)하는 것도 모자라 시신의 다리에 새끼줄을 비끄러매고 종로(鍾路) 바닥을 쓸고 다니다가 ‘대역부도 죄인’(大逆不道 罪人)이라고 써 붙인 다음 다시 몽둥이로 때리고 발로 짓이기며 돌로 찍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황현(黃玹, 詩人,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도 비슷하게 나온다.
‘朝鮮의 관헌들이 金弘集 總理大臣을 경무청의 문 앞으로 끌어냈다. 관헌들은, 성난 군중들이 모여들어 입추(立錐)의 여지가 없음을 보자, 군중들을 뒤로 물러서게 한 다음, 칼을 뽑아 들고 總理大臣 金弘集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金弘集이 쓰러지자 경관 수 명이 칼을 들고 달려들어 일제히 가슴과 등을 난도질했다. 그리고 시체의 다리 부분을 거친 새끼 줄로 묶고 종로로 끌고 다니며 ‘大逆不道 金弘集’이라고 크게 쓴 장지를 붙였다. 그러자 길에 가득차 있던 보부상(褓負商)들이 시체를 향해 큰 돌을 던지고 발로 짓이겨 시체에 온전한 곳이 한 군데도 없도록 만들었다.’
김홍집의 夫人(남양 홍씨)은, 아들을 죽이고 自殺했다.
南下하는 '러시아'를 경계해야 한다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이라는 책을 받아든 고종(高宗)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러시아'에게 몸을 의탁(依託)하고 개화파 관료들을 處刑했다가 결국 亡國의 길을 걸었다.
朝鮮은, 나라 망하는 公式(지도자의 無能 + 국민의 未開함)을 그대로 따랐다. 지도자의 無能은 卑怯으로 연결되고, 국민의 未開함은 殘忍함으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고종(高宗)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은 無能이 초래한 卑怯의 사례이며, 개화파 관료를 향한 군중의 惡行은 未開함이 초래한 殘忍함의 사례다.
오늘날에는 호주의 한 知識人이 南下하는 中國을 경계해야 한다는 책을 냈다. 그런데, 140년 前 조선책략(朝鮮策略) 당시와 비교해 오늘의 韓國 사정은 크게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지도자는 無能하고, 국민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광우병 선동(煽動)'에 놀아날 만큼 수준이 낮다. 나라 망하는 공식(지도자의 無能 + 국민의 未開함)의 뼈대가 갖추어진 것이다. 다른 것이라면, 140년 前에는 경계 대상이 ‘러시아’였고 지금은 그것이 ‘中國’으로 바뀌었다는 점뿐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140년 前 事件이 그대로 再現된다면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된다.
‘지도자는 中國을 全的으로 의지하게 되고, 지식(知識)과 교양(敎養)이 부족한 國民들은 자유민주진영 美國과 日本을 배척하다가 亡國의 길을 걷는다.’
이미 이런 조짐은 확연하다. 지도자는 중국몽(中國夢)에 함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국민들은 또 이런 지도자가 좋다고 온갖 실정(失政)에도 불구하고 50%를 넘보는 지지율로 화답하고 있다. 아울러 허구한 날 자유진영의 日本을 못잡아 먹어 집단 히스테리를 부리는 상황이다. 亡國 공식(지도자의 無能 + 국민의 未開함) 그대로다. 개선(改善) 없이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언젠가, GDP 10위圈이었던 國家가 유일(唯一)하게 亡國에 이른 희한한 事例로서 ‘韓國’이 세계 속에 회자(膾炙)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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