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왜 조선 전역의 태항아리를 파냈을까?
입력 2021.09.04 13:24
태(胎)라는 것은 태반이나 탯줄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왕녀가 태어나면 태를 소중하게 보관하는 풍습이 있었다. 생명의 시작을 함께하는 태가 아이의 운명과 연결돼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태는 출생 즉시 백자 항아리에 소중하게 담겼다. 그리고 산실(山室) 안 미리 점지해 놓은 길방(吉房)에 뒀다가 길일을 택해 태를 꺼내 깨끗이 씻은 뒤 다시 항아리에 담아 밀봉했다. 그리고 땅에 묻었다. 이렇게 묻는 것을 태봉(胎封)이라 했고, 묻은 곳을 태실(胎室)이라 했다.
이렇게 출산 후 태를 잘 갈무리하는 일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고 여겼다(그 말이 맞는다면 아마도 갈무리를 대충 했을 몇몇 임금들의 묘호가 뇌리를 스쳐가는 순간이다). 아직 사람이 아기일 때 그의 태를 먼저 땅에 묻는 것이니, 그리고 그것이 그가 평안하게 잘 자라기를 기원하는 뜻이라니 현대인에게는 조금 기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항아리는 이중으로 구성됐다. 태를 담는 작은 내(內)항아리와 그 항아리를 담는 커다란 외(外)항아리. 뚜껑에는 구멍을 뚫은 손잡이를 만들었고 몸체와 뚜껑에 끈을 교차시켰다. 들고 다니려는 것이 아니라 밀봉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태지석(胎誌石)을 함께 묻었다. 숙종 임금의 태항아리의 경우엔 이렇게 쓰여 있다.
辛丑年八月十五日卯時生 元子阿只氏胎(신축년팔월십오일묘시생 원자아지씨태).
신축년인 1661년(현종 2년) 8월 15일, 오전 5~7시에 해당하는 묘시에 태어난 ‘원자 아지씨’의 태라는 뜻이다. 숙종은 원자, 그러니까 아직 왕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맏아들로 태어났는데, 사실 원자로 태어난 조선 임금이 의외로 그렇게 많지 않다. 더구나 숙종의 아버지 현종도 효종의 외아들이었다. 이 남다른 정통성이 숙종의 왕권 강화에 큰 힘이 됐다. 그런데 ‘아지씨(阿只氏)’란 무엇인가. 우리말 ‘아지씨’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당시 ‘지(只)’자를 ‘기’로 발음한 것인지, 당시 ‘아기씨’의 발음이 ‘아지씨’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조선 19대 임금 숙종의 태항아리. /문화재청
이 숙종의 태항아리를 국립고궁박물관이 ‘9월의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로 선정했다. 높이는 외항아리 31.2㎝, 내항아리 17.3㎝. 이 얼마나 단아하고 품격 있는 백자 항아리란 말인가. 기교를 최소화하고 오직 항아리의 용도 자체에만 집중하면서도 유려한 선엔 기품이 살아 있다.
숙종 태항아리(위에서 본 모습). /문화재청
이런 예술성을 인정 받아 국보로 지정된 태항아리도 있다. 고려대 박물관에 있는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다. 전국에 산재했던 태실 보관 장소가 보물로 지정된 곳도 있다. ‘서산 명종대왕 태실 및 비’다. 명종이 과연 대왕이라 불릴 만한 사람인지는 의문이지만 문화재 이름이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히 땅에 파묻었던 태항아리가 왜 박물관에 있는 것일까? 누가 그것을 도로 파내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문화유산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보통 가장 먼저 일본을 의심한다. 그런데 중국에 가 보니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사라진 유물에 대해서 보통 ‘(중일전쟁 때) 일본군이 가져갔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러시아에 가 보니 거기선 ‘(2차대전 때) 독일군이 가져갔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범인’은 과연 일본이 맞았다. 1928년 조선총독부가 ‘태실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며 전국의 태실 54곳을 파내 경기 고양의 서삼릉으로 모두 옮겼다. 광복 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서삼릉을 발굴조사하며 태항아리를 수습했고, 이후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고궁박물관이 이 항아리들을 보관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국립고궁박물관 모두 문화재청 소속 기관이다.
도대체 일제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①그들의 명분대로 도난 방지를 위해서였을까, ②또는 별도로 관리인이 필요한 54개 시설을 없애 관리 비용을 줄이려는 속셈이었을까, ③아니면 일각의 주장대로 ‘민족 정기 훼손’이 진짜 목표였을까? 설사 맨 나중의 말이 맞는다고 해도. 그것은 엄밀히 말해 이미 망한 나라인 조선왕조가 부활하는 것을 막을 뿐 ‘민족 정기’로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닐까. 정답은 미스터리지만, 대략 이 세 가지 안에 있을 것이다.
유석재 기자
문화부에서 학술 분야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유석재 기자의 돌발史전'과 '뉴스 속의 한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메일은 karma@chosun.com 입니다. 언제든지 제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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