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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서구 항해·造船기술 전수받아… 日 근대 해군의 기반 다졌다

서구 항해·造船기술 전수받아… 日 근대 해군의 기반 다졌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50.하] 나라 운명 바꾼 존 만지로… 日해군·조선업의 산파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입력 2021.09.28 03:00

 

 

 

 

 

워싱턴 도착한 日사절단 - 1858년 맺어진 미·일통상조약 비준을 위해 미국으로 파견된 첫 일본 사절단이 1860년 5월 15일 워싱턴 DC의 해군 조선소에서 미군 장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주문 생산한 목제 기선 ‘간린마루’와 미국이 제공한 배 포해튼호를 타고 미국 선원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여곡절 끝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고, 임무를 완수한 뒤 무사히 귀국했다. 간린마루의 태평양 왕복 항해는 일본에 ‘우리도 서구 열강들처럼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고, 이후 일본의 조선업과 해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 해군 역사유산 사령부 소장. /게티이미지코리아

만지로는 일본 개화의 숨은 주역 중 한 명이다. 미천한 어부 출신으로 우연한 기회에 미국 포경선을 타고 세계일주 여행을 했고 미국에서 거주하며 항해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쌓은 후 귀국한 만지로는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일본의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 일본이 무엇보다 긴급하게 필요로 한 것은 대선(大船)을 갖춘 강력한 해군이었다. 1854년 5월, 막부가 주도하여 마스트 3본 형태에 용골(龍骨)을 갖춘 최초의 서양식 범선 호오마루(鳳凰丸)호를 건조했고, 이어서 증기선 건조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만지로가 조선(造船) 디자인에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미국의 항해 학교에서 공부할 때 너새니얼 보디치(Nathaniel Bowditch)의 ‘미국 항해술 개설(The New American Practical Navigator)’이라는 교과서로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지식을 얻었기에 귀국 후 이 책을 공들여 번역했고,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네덜란드에서 증기선 도입

그러는 동안 막부에서는 네덜란드에서 증기선을 도입하고 해군 운용에 관한 지식을 전수받자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1855년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가 호의로 증기선 숨빙호(Soembing, 자바의 화산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후일 간코마루(觀光丸)로 개칭했다)를 선사하는 동시에 해군 교관단을 파견하여 해군 관련 지식을 교습해주었다. 1857년에는 일본이 주문한 증기선 군함 야판(Japan)호와 제2차 교관단이 함께 들어왔다. 이 배는 3본 마스트에다가 외륜이 달린 목제 기선이었다. 기관(機關, 모터)은 항구를 드나들 때에만 사용하고, 항해할 때에는 돛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곧 이름을 ‘역경(易經)’에서 따온 ‘간린마루(咸臨丸)’로 바꾸었다. 막부는 1년 반의 1차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교관이 되어 다음 기수 학생들을 가르치는 식으로 군함교수소(軍艦敎授所)를 운용했다. 이렇게 하여 일본 근대 해군이 첫걸음을 뗐다.

日 최초의 증기 함선 - 일본 나가사키에서 관광객 유람선으로 쓰이는 일본 최초 증기 함선 ‘간코마루’의 복제 선박. /데이비드 스탠리/플리커

미국 총영사 타운센드 해리스의 압박으로 1858년 미⋅일통상조약을 맺자, 2년 후인 1860년 이 조약의 비준을 위해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게 되었다. 만지로는 통역으로 사절단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에도 직접 도움을 주었다. 쇼군은 워싱턴에 대사를 파견하는 이 기회를 이용해 지난 수년간의 노력을 통해 근대 선박을 운용할 실력을 갖추었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선원들 또한 그동안 갈고닦은 원양 항해술을 직접 실험해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사절단을 간린마루호에 태워 태평양을 건너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런데 미국 측이 보기에 이것은 너무 위험한 실험이었다. 그래서 간린마루호는 시험 항해를 하고, 사절 일행은 미국이 제공하는 선박 포해튼(Powhatan)호로 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경험이 부족한 선원들이 처음 태평양을 건너는 항해를 한다고 하니 죽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많은 사람이 탑승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렇게 빈자리가 남는 것을 이용해 후쿠자와 유키치 같은 호기심 많은 인물들이 선원 자격으로 동행할 수 있었다.

미국 측도 걱정이 되어 항해 엔지니어 존 브루크(John Brooke)와 10여 명의 미국 선원을 간린마루에 태웠다. 외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항해한다는 사실에 자존심 상한 선장 가쓰 가이슈(勝海舟)와 사무라이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렇지만 막상 먼바다로 항해해 나가자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브루크는 일본 선장과 선원들의 항해 실력이 형편없다는 기록을 남겼다. “배가 구로시오해류를 타자 롤링이 심해졌다. 모든 일본 선원이 병이 났다. 안개가 끼어 시계가 안 좋았다. 일본인들은 돛을 잘 조정하지 못했고 사관들은 무능력했다. 아마도 이들은 악천후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선원들은 완전히 우리에게 의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항해 경험이 풍부한 만지로가 배의 운항에 큰 도움을 주었다. 브루크는 만지로의 활약에 대해 찬탄했다.

美병원·천문대 둘러보며 문화충격

간린마루호와 포해튼호는 1860년 2~3월 중에 어렵사리 태평양을 건너서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공식 사절인 77명의 사무라이들은 기차를 타고 파나마지협을 지난 다음 다시 배를 이용해 워싱턴으로 향했다.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을 만날 때 이들은 에보시(烏帽子)라는 검은 모자에 비단 기모노를 입고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 인사들이 소박한 프록코트를 입고 있고, 부인들도 동행한 데다가 식사 후에 남녀가 함께 춤추는 광경을 보고는 놀라움에 입을 벌리고 서있었다. 의회를 방문해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자, 자기네 같으면 진작 칼을 뽑았을 거라고 수군댔다. 이후에도 미국 여러 도시를 돌며 병원⋅천문대 등을 둘러보고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일본의 선각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직접 보고 눈을 떠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간린마루호는 귀국길에 올라 성공적으로 일본에 돌아왔다. 간린마루의 태평양 왕복 항해는 당시 엄청난 위업으로 칭송받았다. 일본도 서구인들처럼 최신 항해 기술을 구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이 시기 이후 일본의 조선업과 해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중 특기할 인물이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다. 만지로에게 항해와 조선에 대해 배운 제자 중 한 명인 이와사키는 1875년 미쓰비시 증기선 회사를 설립하고 상하이 노선을 열었다. 정부와 유착 관계에 있던 미쓰비시 회사는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를 인수받아 조선회사로 발전시켰다. 조만간 일본은 주요 증기선 조선 국가로 발돋움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日 사절단 기념비 - 1860년 3월 17일 최초의 일본 사절단을 태운 일본 함선 간린마루가 도착한 것을 기념해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기념비. 샌프란시스코의 자매 도시인 오사카가 1960년 기증한 것이다. /Eugene/Flickr

메이지유신 이후 새 체제에서도 만지로는 여러 학교의 교수 요원으로, 혹은 해상 사업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중 하나가 유럽 시찰이다. 근대화된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메이지 정부는 1870~1871년 유럽에서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전쟁 상황을 직접 관찰한다는 목표로 시찰단을 파견하는데, 만지로 또한 여기에 동참하게 되었다. 유럽으로 가려면 먼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로 간 다음 뉴욕으로 이동하여 유럽행 배를 타야 했다. 일행이 뉴욕에서 5일 동안 머물 때 만지로는 이틀간 외출을 허락받아 페어헤이븐을 방문했다. 1870년 가을 어느 날, 위트필드는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나가보았다가 만지로가 서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무인도에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던 자신을 구출하여 포경선에서 함께 일하며 세계의 바다를 돌고, 그 후 미국 생활과 교육을 주선했던 은인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만지로는 공직을 떠나게 되었다. 공무로 출장을 나가서 사사로운 일로 대열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면 그의 건강 상태도 안 좋았을 뿐 아니라, 메이지 정부로서도 그동안 많은 경험이 쌓여서 만지로의 지식과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은퇴한 만지로는 1898년 71세 나이로 사망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 뇌리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직접 쓴 영어교재, 학생들 필독서 돼

그렇지만 만지로의 영향은 그 후로도 알게 모르게 지속되었다. 예컨대 그가 저술한 영어 교과서는 오랫동안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게이오 대학 창설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만지로에게 영어를 배웠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만지로의 지식은 메이지 체제의 중요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서 1889년 헌법에 반영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만지로는 서구인은 야만인이라는 편견을 깨고, 일본의 문호를 개방하는 데에 일조했다. 아마도 만지로는 일본이 국력을 키우는 동시에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배워서 평화로운 국제 협력 관계를 이루기를 꿈꾸었을 터이지만, 실제 역사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강대국으로 부상한 두 나라는 20세기 전반 세계대전에서 충돌하게 된다.

[만지로의 제자 후쿠자와 유키치]

게이오대학 창설자 “서구 사회 보고싶다” 訪美 사절단 동행

간린마루를 타고 미국에 간 사람 중에는 젊은 시절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도 있었다. 그는 서구를 직접 보고 싶다는 일념에 선원 자격으로 이 배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가 직접 경험한 미국의 과학 기술은 그리 큰 흥분을 안겨주지 못했다. 철도 같은 것은 이미 책을 통해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가 주목한 것은 미국의 사회·정치 제도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초대 대통령 가문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일본은 도쿠가와 가문의 자손들이 2세기 반 동안 통치하지 않는가. 그런데 미국인들은 워싱턴 대통령의 후손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았다. 혹시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까 해서 그는 웹스터 사전을 사가지고 왔다. 미국에서는 신분이 큰 의미가 없고 오직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가쓰 가이슈 선장도 감동을 받았다.

여성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도 매우 인상적이어서 선장은 미국에서 들었던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 レディーファースト)’라는 말을 일본에 퍼뜨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진관을 찾았다가 그 집 딸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귀국한 후 사람들에게 젊은 서구 여자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때까지 일본인들은 서구 여성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