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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모던 경성] ‘단발娘'은 저항의 상징?

[모던 경성] ‘단발娘'은 저항의 상징?

[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 조선의 첫 단발랑 강향란, 인습타파 내세운 사회주의 계열 주세죽, 허정숙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1.10.30 06:00

 

 

 

 

 

1934년 일본 카마쿠라 바닷가에서 포즈를 취한 최승희. 쇼와시대 사진가 쿠와바라 키네오(桑原甲子雄)작품이다. 최승희는 당대 대표적 '단발미인'이었다.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이 개최한 최승희 탄생100주년 '불꽃처럼 바람처럼, 무희 최승희'전에 나왔다. /광주시립미술관

 

1932년 스물넷 김기림이 잡지에 이런 글을 썼다. ‘’미쓰·코리아’여 단발하시오’(동광 37호 1932년 9월)

단발은 기생이나 카페 웨이트리스사이에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그는 ‘단발의 여러 모양은 또한 단순과 직선을 사랑하는 근대감각의 세련된 표현’이라고 옹호했다. 모더니스트 시인다운 발상이었다.

고등교육 받은 신여성들이 간혹 단발을 하곤 했다. ‘동광’에 함께 기고한 김활란 이화여전 교수도 삼사년 전에 단발을 했다. 김활란은 ‘머리를 깎게 된 특별한 동기는 없다’면서도 ‘단발을 하면 간편한 것은 두말할 것없고, 미적 방면으로 보더라도 각기 자기 얼굴 모양에 따라 그 얼굴에 조화되도록 머리를 자르면 미를 손상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더 ‘미’를 나타낼 수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김활란은 근자에 여학교에 단발하는 여학생이 많아졌다면서도, 이화전문에 두 세명, 이화고보에 몇 명 정도라고 했다. 1930년대 초까지도 여학생의 단발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의사 현덕신의 단발

동대문 부인병원 의사 현덕신(1896~1962)은 서른살이던 1926년 단발을 했다. 이화학당을 나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현덕신의 단발은 신문에 소개될 만큼 화제가 됐다. ‘밤에 자다가 갑자기 왕진을 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급한 환자나 방금 해산하려는 산모가 있는 때에는 일분일초를 다투게 됩니다. 그럼으로 저는 무엇보다 그런 때에 시간을 덜 들게 하자는 것이 단발한 첫 목적이라고 하겠고, 또는 머리를 깍고 보매 생각하던 것보다도 더욱 가뜬하고 편리하외다.’(조선일보 1926년 7월4일 ‘이야기거리’) 현덕신은 ‘실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1930년 1월7일자에 실린 최승희. 단발랑답지않게 수수한 결혼관을 가졌다고 썼다.

◇첫 단발랑, 강향란

조선의 첫 단발랑(斷髮娘)은 강향란으로 알려져있다. 기생 출신인 그는 청년 문사와 사귀다 결별당하자 머리를 잘랐다. 1922년 단발로 학교에 다니는 사진이 보도되면서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강향란의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그의 뒤를 따른 단발랑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다.

1925년 주세죽, 허정숙, 김조이는 ‘종래의 제도를 타파하고 부자연한 인습을 개혁한다’면서 함께 단발을 했다. 사회주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 간부들이었다. ‘부녀자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건 외국에서는 이미 진부한 일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 조선에 있어서 그것을 단행한 그 용기는 다대타 한다.’ (조선일보 1925년8월23일 ‘부인단발’) 신문은 단발여성에 우호적이었다.

 

◇치열한 단발논쟁

모던 걸의 단발은 스캔들이었다. 1895년 ‘을미개혁’ 당시 남성의 단발이 강제되면서 반일(反日) 정서를 불러일으켰으나 구한말 이래 곧 유행으로 정착됐다. 하지만 여성의 단발엔 거부감이 강했다. 단발 여인들은 거리를 걷을 때마다 ‘단발랑’이라며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1920년대 ‘신여성’ ‘별건곤’ ‘동광’같은 잡지들은 앞다퉈 ‘단발 찬반논쟁’을 특집으로 다뤘다. 여성 단발 비판의 핵심 중 하나는 ‘무분별한 서양문화 수입’이었다. 소파 방정환은 여성 단발을 서양 것을 수입한 ‘허영심의 발로’라고 비판했다. 대중잡지 ‘별건곤’ 필자는 이렇게 호소한다. ‘외국 문화가 배울 것이 많고 외국 풍조에 본뜰 것이 많으나 이 단발만은 아주 그만두십시요! 머리를 깎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머리를 아니 깎겠다고 될 것이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특징을 잃지 말고 외관에 있어서만 남달리 차리지 말고 내적 충실을 힘쓰시기 바랍니다.’(김병준, 여자 단발이 가한가 부한가’, ‘별건곤’1929년1월 )

◇스타 단발랑 최승희

‘단발랑의 상해도착’ ‘단발랑의 호소’처럼 단발 여성을 가리키는 ‘단발랑’은 신문,잡지의 최신 유행어였다. ‘화려한 무대에 아리따운 자태를 맘껏 날리며 몽땅 찍어버린 단발랑의 그야말로 소위 모ㅡ던인 (최승희)씨에게는 아름답고도 자유스러운 연예관이 있으려니….’(조선일보 1930년1월7일 ‘1930년의 조선여인은 장차 어떻게 변할 것인가’) ‘단발랑’은 당대 무용스타 최승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1930년대 후반 ‘퍼머’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신문에도 새 유행으로 퍼머를 소개하는 기사가 났다. ‘한때는 단발이라면 소위 ‘모던 걸’이라고 하야 일종 이단자와 같이 보아왔는데 어느새 단발은 소학교나 여학교에서 제복, 제모와 같이 취급되는 형편입니다.쪽진 머리는 솔방울만큼 적어지고 2,3년내 더욱 작년부터는 부쩍 ‘파ㅡ마넨트’가 유행하고 있습니다.’(조선일보 1939년 5월14일자 ‘문제의 파ㅡ마넨트’) 단발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참고자료

김미지,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살림, 2005

김주리,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 살림, 2005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소명, 2009

#김기철의 모던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