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기생의 가곡, 망국가요가 조선인을 망친다”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이광수·김억·김동환·홍사용 등 시인, 유행가 작사에 뛰어들어
1932년말 한 신문이 그해의 ‘엽기적 유행’으로 ‘유행가’를 꼽은 기획기사를 썼다. 당대 스타 이애리수가 부른 ‘쓰러진 젊은 꿈’이 소개됐다.
‘그날이 덧없다/바람 갓하라/젊은 꿈의 날이/피끓던 날이/센 머리 세여보면서/그리운 지난날 더듬고 우네.’(매일신보 1932년 12월13일 ‘시대의 감정담은 애수의 유행가’)
당시 스물둘 이애리수는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荒城의 跡)를 불러 최고 인기를 누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신문은 같은 해 발표된 ‘황성옛터’를 제치고 ‘쓰러진 젊은 꿈’을 주목했다. 작사자가 춘원 이광수(1892~1950)였기 때문이다. 춘원은 ‘무정’ ‘마의태자’를 발표하면서 조선의 문학계를 대표하던 거물이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다. 춘원은 왜 유행가 노랫말을 썼을까.
◇유행가 음반 18%, 시인들이 쓴 작품
1930년대 유행가 작사자중엔 내로라하는 시인, 작가들이 수두룩하다. 이은상, 김동환, 주요한, 김억, 이하윤, 노자영…돈벌이 삼아 한두번 외도한 것도 아니다. 시집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를 낸 김억은 유행가 61편을 써서 유성기 음반을 남겼다. ‘국경의 밤’을 낸 김동환은 7편,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쓴 홍사용은 9편을 남겼다.
시인 이하윤은 1935년부터 아예 콜럼비아레코드 문예부장을 지내면서 유행가 154편을 썼고, 월북한 시인 겸 극작가 조영출(조명암·1913~1993)도 오케 레코드사에 들어가 145편의 음반을 남겼다. 구인모 교수의 ‘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현실문화, 2013)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 발매된 유행가 음반의 약 18% 가 시인들이 쓴 작품이었다. 작품 수로는 698곡(음반 면수로는 725면)이나 된다. 시인들은 근대 유행가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퇴폐적 악종 가요를 배격하자” 조선가요협회 탄생
문인들은 원래 유행가에 적대적이었다. 이광수와 김동환은 잡가와 유행창가를 ‘기생의 가곡’ ‘망국 가요’라 비난했다. 그들이 1929년 ‘조선가요협회’를 결성한 이유다.
1929년2월22일 저녁 7시, 경성 견지동 111번지 조선일보사 건물에는 쟁쟁한 문인과 음악가 16명이 모여들었다. 이광수, 주요한, 김소월, 변영로, 이은상, 김형원, 김억, 양주동, 박팔양, 김동환, 안석주 등 문인 11명과 김영환 김형준 안기영 정순철 윤극영 등 음악가 5 명이었다. 이들은 ‘우리는 건전한 조선가요의 민중화를 기함’을 강령으로 내세웠다. ‘모든 퇴폐적 악종(惡種) 가요를 배격하자’ ‘조선 민중은 진취적 노래를 부르자’는 슬로건도 채택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제목은 ‘퇴폐적가요 배격코저 조선가요협회 창립’ (1929년2월24일자). ‘현재 조선 사회에 흘러다니고 있는 속요(俗謠)의 대부분은 술과 계집을 노래하는 퇴폐적, 세기말 것이 아니면 현실도피를 찬미하는 중국 산림학자식의 사상 감정이 흐른 것이 대부분이 되어 조선 민족의 기상을 우려할 현장을 이끄는 터임으로 이 풍조를 크게 개탄’한 문화예술인들이 가요협회를 창립했다고 소개했다.
가요협회는 직접 유행가를 만들고 음반을 취입했다. 이광수가 쓴 ‘우리 아기 날’과 김형원의 ‘그리운 강남’이 대표적이다. 안기영이 곡을 붙인 ‘그리운 강남’은 네차례나 유성기 음반으로 제작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정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이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삼월도 초하루 당해 오면은/가뜩이나 들썩한 이 내 가슴에/제비 떼 날아와 지저귄다네’ 요즘 유튜브에서도 들을 수 있는 이 노래는 민요풍의 서정적 분위기가 도드라진다. 김형원은 동아일보 사회부장과 중외일보 사회·편집부장, 조선일보·매일신보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자 시인이었다.
◇이광수 ‘기생의 가곡을 증오한다’
이광수는 왜 유행가를 배격했을까. 그는 근대 이후 조선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선 조선인의 도덕적·심미적 태도를 개조해야 하고, 무엇보다 예술 교육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예술에 대한 심미적 취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인에게 예술을 주어라. 예술은 그네에게 쾌락을 주고 활기를 주고 향상을 주고 그 모든 것보다도 창조와 표현의 새 힘을 주리라. 조선이라는 사막을 변하야 예술의 화원을 지어라.’ 이광수는 ‘사람을 신경쇠약과 주색에 침륜함과 또는 불평과 나타로 인도하는 예술은 불건전한 예술이오, 멸망의 예술’이라고 비판했다.
이광수는 조선기생이 대표하는 민중예술이라 할 만한 모든 가곡을 증오한다면서 ‘캇쥬샤’ ‘표박가’ ‘심순애가’같은 노래를 거론했다. ‘신흥의 기상을 가져야할 우리에게는 군악적, 종교악적인 정서를 일으키는 예술을 가지고 싶습니다. 델리케트한 것보다도 순박한 것, 우미한 것보다도 장엄한 것, 비조를 띤 것보다도 상쾌한 것이 원입니다.’(‘예술과 인생’, ‘개벽’19호, 1920년2월) ‘캇쥬샤’ ‘심순애가’ ‘표박가’는 원래 일본 신파극 주제가로 조선에서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파인 김동환도 ‘조선지광’ 1927년8월호에 ‘망국적가요소멸책’을 발표했다. 파인은 아리랑이나 수심가와 같은 잡가는 조선 왕조 내내 학대받은 백성들의 신음과 애탄, 곡성이었고, 유행가요 또한 그런 잡가를 답습한 ‘악(惡)가요’이자 ‘망국가요’라고 주장했다.
◇잇단 문예지 폐간으로 시인들의 발표지면 사라져
시인들이 유행가 작사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는 또 있다. 1919년부터 속속 창간된 ‘창조’ ‘폐허’ ‘백조’ ‘장미촌’ ‘문예공론’같은 문예지들은 단명했다. 소설에 비해 시는 독자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시를 싣곤 하던 종합지 ‘개벽’도 1926년 일제에 의해 폐간됐다. 근대시를 선보일 만한 장(場)이 사라지면서 시인들은 자구책을 찾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시(詩)의 음악화를 통한 유행가 작사를 통해 음반으로 독자들을 찾아나선 것이다.
◇신문사 신춘문예에 ‘유행가’ 공모
신문사도 신춘문예현상공모에서 유행가 노랫말을 소설, 시, 희곡과 같은 정식 분야로 채택했다. 조선일보는 1933년11월 신춘문예 사고를 내면서 ‘유행가’를 단편소설, 희곡과 같은 크기의 활자로 게재했다. 같은 해 동아일보도 문예평론, 단편소설, 희곡과 같은 크기 활자로 ‘가요’를 공모했다. 유행가 노랫말을 문학의 한 장르로 대접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조선일보는 유행가를 공모하면서 당선작의 음반 취입까지 주선, 유행가를 만들고 보급하는 일까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새해에 첫 노래 부를 청조 같은 가희(歌姬)’(1934년 1월2일) ‘본사 현상에 당선된 유행가와 민요 레코ㅡ드화’(1934년2월17일) ‘본사현상유행가 ‘방아찧는 색시’ 세론반으로 10일에 발매’(1934년 3월6일)같은 기사를 연속으로 내보냈다.
이 때문에 기성 작가들까지 앞다퉈 신춘문예 유행가부문에 응모할 만큼 관심을 모았다. 1934년 유행가 부문 당선자였던 남궁랑은 1928년부터 1930년까지 동요 등의 아동문학 작품을 거의 매달 발표했다. 지금 남아있는 작품만 40여편을 웃돌만큼 왕성하게 집필했다. 이런 작가까지 유행가 부문에 응모할 만큼 대중을 확보하려는 문학 청년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유행가 공모 마감 사흘전, 2153편 몰릴만큼 폭발적 관심
조선일보는1938년 유행가만 특별 공모했다. 마감 사흘을 앞두고 응모작이 2153편이나 될 만큼 폭발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조선일보 1938년2월24일 ‘白熱의 인기를 끄는 본사주최현상유행가’) 조선일보는 ‘어린이날 노래’(1928년)나 ‘문자보급운동가’(1931년)를 현상공모한 적이 있을 만큼, 대중가요에 적극적이었다.
신문이 유행가를 공모한 것은 ‘조선가요협회’와 비슷한 취지였다. ‘현대의 문화 영역에 있어서 그 광범한 대중성으로 보아 유행가는 거의 시대의 총아인 느낌이 있으나 불행이도 이때까지의 유행가는 그 가사와 곡조가 퇴폐저속한 것이었으므로 일반 식자의 개탄한 바이었는데 본사에서는 이러한 풍조를 일소하고 새로운 유행가의 출현을 촉진하기 위해….’(조선일보 1938년2월15일 社告)
◇현상공모 당선자 김종한의 다짐
1938년 3월 발표된 유행가 현상공모 당선자는 을파소 김종한이었다. 그는 1934년 신춘문예 ‘유행가’ 분야에서 ‘베짜는 각시’로 당선됐고, 1937년 신춘문예엔 시 ‘낡은 우물이 있는 풍경’가 뽑힐 만큼 조선일보 현상공모를 휩쓸었다. 1939년엔 ‘문장’지 추천을 받아 작품을 발표했는데, 정지용이 ‘비애를 기지로 포장’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만큼, 재기 넘쳤다. 함북 명천 출신인 김종한은 조선일보 봉화지국에서 일한 적있고 1934년 이후엔 광산생활을 한 좌충우돌 청년이었다. 1938년 유행가 현상공모 때는 니혼대 예술과에 재학중이었다.
김종한은 유행가 현상공모 직전, 결전에 뛰어드는 다짐 같은 글을 신문(1938년2월13일 ‘신민요의 정신과 형태’3)에 썼다. ‘시대인의 생활감정을 표현한 새로운 민요, 그것은 반드시 오고야 말게다.’ 세계가 주목하는 K팝 열풍을,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김종한은 1944년 만 서른에 세상을 떴다.
◇참고자료
구인모, 유성기의 시대, 유행시인의 탄생, 현실문화, 2013
이광수, ‘예술과 인생’, ‘개벽’19호, 1922년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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