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당시 북한군 600명이 남파한 작전
북한과 한.미.일 정보기관의 기록물 근거
1980년 518당시 광주에 남파한 북한군 폭풍군단 우레3여단 5대대 3중대 문영진(가명) 등의 도움으로 북한군 534군부대, 108군부대, 806군부대 작전과 전사한 북한군의 명단과 북한 자료를 공개한다. 518당시 북한군 남파, 내란, 민주체재하의 정치적 사건 등 복잡한 성격을 뛴 것을 알 수 있고, 북한군이 전면 남침을 하지 못한 이유도 알 수 있다.
○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
김일성은 약 300만 명을 죽인 1950년의 6·25 한국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였다. 김일성은 1965년 북한 주재 중국 대사 하오더칭에게 ‘조선은 조만간 전쟁을 일으킬 것이며, 이는 불가피 한 것’이라며, 전쟁을 하면 중국에서 군대를 파병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중국 외교부 문서. 조선 주재 중화인민공화국 대사 하오더칭의 김일성 담화 현장, 중국 인민 대 선효하 교수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국제학술대회).
모택동의 중국 공산화 전술 인 농촌의 공산화를 먼저 시도하라는 조언에 따라 1968년 이후 조선인민군 최정예 124군 부대원을 한 번에 수십 명에서 120여 명 이상씩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김신조 124군부대 게릴라 등 31명 청와대 습격)과 강원도(울진 삼척 무장공비 124군부대 120명) 산간 지방에 대규모 남파하였으나 한국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뭉쳐 적을 격멸하였다.
○ 김일성 북한군 남파 결정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김일성은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르즈네프를 만나 남침 결심을 최종결정하였고, 중국에도 남침 의사를 통보하였다. 공격 날짜를 1980년 4월 중순 김재규가 처형되면 항의 소요가 생길 것으로 예상하여 이때로 정했다. 그러나 김대중과 재야세력을 지지하는 학생들과 일부 근로자들의 시위가 격화되자 공격 날짜를 5월 15~20일 사이로 결정하였다.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도 북한의 남침 의도를 미국과 일본에 제보하였다(육군 본부 정보참모부 북괴 남침설 분석. 1980. 05. 10)
동 유럽 등으로부터도 북한의 남침 결정을 알아낸 일본은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 반장이 중앙정보부에 이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북한군의 대규모 기갑 부대와 자주포 부대는 공격선으로 이동했다.
당시 남침 징후 첩보가 5건이나 되었다.
당시 동경 특파원인 이도형 기자는 동경에서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으며, 외신도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였다. 남침에 관한 외신 보도에 김일성은 자신의 의도가 노출된 것에 대하여 많이 고민하였다고 한다.
북한의 남침에 대응하여 미국은 제7함대 항공모함을 동해에 파견하였고,
한국군도 유사시 태세를 강화하여 전투기와 폭격기까지도 출격 준비를 하고 대기하였다.
○ 북한군 남파 인원 600명 및 침투 경로
광주에 남파된 북한군 주력인 폭풍군단 우뢰 3여단(북한에서는 우레를 우뢰로 표기) 대원, 중앙당 연락소 2처 1010군부대 등 600명 등이
1980년 4월 하순부터 5월 초에 걸쳐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백바위(백암) 해변 등 서해안을 통하여 침투하였고,
대둔산에서 대기한 북한군은 강원도 철원군 땅굴 및 기타 지역을 통해 남파되었다.
중앙당 연락소 2처 1010군부대 소속 김명국(가명), 문제심 등 50명은 5월 21일 서해안을 통하여 침투하였다.(김명국은 대한민국에 현재 탈북자로 살고 있고, 1980년 518당시 북한군으로 남파한 사실을 채널 A 방송, 법정 증언한 자료, 보랏빛 호수 책 등이 있다)
○ 북한군이 위장전술로 무기고 탈취, 교도소 습격 등 시위 폭동 주도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아침 전남대 교문에서 공수부대 공격과 시위,
5월 21일 오전 8시, 광주 톨게이트에서 20사단 계엄군 부대와 지휘부 차량을 공격, 14대 군용차량탈취 및 운전
오전 9시경 아세아 자동차 공격, 장갑차 6대, 군용 트럭 305대, 버스 100대, 고속버스 5대 탈취 및 운전(416대 북한군이 탈취 및 운전)
전라남도, 전라북도 군부대, 경찰서, 관공소. 무기고 등 51(49) 개 무기고 공격 및 총기류 7,276정(안기부 다른 기록에는 5,403정), 실탄 367,847 발 등 일사분란하게 공격 탈취하였고, 시민들에게 분배 및 사용하게 함
전남도청 공격 및 점령,
광주 교도소 5차례 공격, 장흥 교도소 1회 공격(교도소 6회 공격)
전남도청 지하실에 3,000상자 분량 폭약 설치(8톤 트럭 분량)
잔혹한 방법으로 광주 시민 살해 등을 하였다.
당시 사회적으로 혼란한 대한민국 정부와 군과 경찰 일반 시민들을 속이면서 북한군은 위장전술로 공격작전, 시위 폭동 주동자로 활동하였다.
북한의 작전 종결일은 1980년 6월 19일이다.
당시 북한군의 작전 사진을 보면 광주사태 중 YMCA 앞에서 대낮인 오전 12시경에 찍은 북한군 폭풍군단 우레 3여단 5대대 사진으로 추정되며,
북한군은 계엄 상황에서 위장전술 모습으로 철모도 쓰지 않고, 군복을 각각 다르게 공수부대 옷이나 보병 군복을 입고, 장발 머리에 비표 띠를 머리에 두르고, 허리에는 탄띠도 없고, 신발도 각자 다른 종류를 신고, 바지의 링도 없고, 총기인 소총을 들고 있는 사진이 있다. 폭풍 군단 우뢰3여단 5대대 대원 등이 당시 대학생 장발 머리에 한국군이나 공수부대 옷 혹은 대학생 차림의 옷을 입고, M1 혹은 카빈 소총을 휴대하고 사용했다.
북한군들이 머리에 흰띠, 붉은색띠나 목에 붉은색 계통의 수건, 손목에 띠를 두르거나 수건을 둘러 북한군들끼리 알 수 있는 비표를 사용했다.
당시 사진 속의 청년들 중 장발 머리를 하고, 장발 머리 군복을 입은 자들과 같은 것으로 보아 같은 북한군 신분의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사진 참조). 폭풍군단 대원 중 한국군 복장을 한 자는 광주 시민을 죽이고, 흥분시킨 뒤, 광주 도청(전남 도청의 북한식 표현)을 공격할 때에는 대학생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북한군은 비표를 한 폭풍군단 전사자들의 시체는 옮겨 인근에 매장하였고 북한군 남파한 사실의 흔적을 없앴고, 교전 과정에서 북한군이 심한 부상자가 발생되었는데 포로(생포)가 되면 북한군 남파 등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사전 방지하기 위해 북한군 끼리 현장에서 죽이는 잔인함도 있었다.
고도로 훈련된 북한군은 신분과 정체성을 숨기고 비겁한 위장전술(북한군 자신들의 신분을 대한민국 현역군인, 시민, 대학생 등으로 시민들을 속여 넘김)을 수행하면서 잔혹한 방법으로 광주 시민 살해 등 수 많은 피해를 준 만행을 자행하였다.
○ 북한군 주도로 전남도청 등 점령(자칭 해방구) 및 북한군 남파사실 못 밝혀 518역사 왜곡 초래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김일성은 적화 통일의 호기로 삼았고, 제2차 6·25 한국전쟁을 준비하였다. 베트남전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선·후방 교란, 후 공격’ 교훈에 따라,
적(남한) 내부에서 호응하는 남한의 좌익세력 및 일부 반정부 세력이 자신을 돕는다고 판단하여 선발대로 폭풍군단과 정찰총국 등 특수부대를 파견(북한군 남파 침투)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전라남도 광주 등에서 시위가 일어날 경우 그 시위를 폭동으로 전환시켜 남조선(대한민국)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의 5.18문서에는 미국무부-CIA 문건과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 미국방부 정보국) 문건에 의하면 광주폭동 첫 날 평양 주석궁에서 도청한 김일성 발언, "광주폭동이 전국적인 민중반란으로 확산되면 즉각 남침하기로“ 결정한다고 518당시 5월 19일 아침에 군수뇌부가 긴급 소집되어 평양 주석궁에서 비밀회담이 개최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북한군이 주도한 점령지역(자칭 해방구)이 전라남도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고, 북한군이 주도한 작전과정에서 계엄군과의 전투 등 많은 수의 사상자 발생과, 시민들의 비협조로 더 이상 작전을 수행할 수 없어 철수를 결정하였다.
전남도청 방어 과정에서 용감하게 싸운 계엄군(최초 발포명령자 신동국 중위) 부대에 의해 수많은 북한군이 전사, 교도소 방어 등 계엄군의 활약, 시민들의 비협조 등으로 전국으로 확대 계획이 실패됨에 따라 제2차 광주사태를 저지한 것이다. <옮김>
함경북도 청진에도
5.18유공자 추모비와
무덤이있습니다
5.18 전사자 인민군 추모비
◎ 묘지 추모탑 위치 :
청진역 북방 800m,
낙타산 중턱 70m에 위치
◈ 5-18 광주 침투
북한 특수군 534군부대 전사자
154명 명단
◈ (여군 포함) -
비석에 새긴 첫 문장 :
"여기에 청춘의 고귀한 심명을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님일세"-
- 비명(沸名) :
"사람들이여!
걸음을 멈추고
용사들의 불멸의
애국정신을 추억하라.
피로써 조국을 지킨
인민군 영웅 렬사들의
혁명정신과 찬란한 위훈은
후손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
(전부 다 사망일은 1980년 6월 19일)
홍성표, 김석준, 한창준, 오부진, 김운선, 김응수, 김국식, 김한수, 서대석, 우준선, 조영규, 리진혁, 염종식, 유해유, 김종돈, 천수만, 유리국, 김귀옥, 서진남, 김창록, 김영석, 김수전, 김용성, 전순돌, 리계찬, 림한석, 김진우, 박원용, 황송열, 김동철, 리진섭, 강원철, 최귀한, 리창용, 손원백, 현택룡, 박경화, 김수근, 김인준, 방동환, 전성규, 남창섭, 강일권, 리봉섭, 주창동, 김인현, 윤장우, 리정부, 김은태, 최은신, 김태환, 김명규, 리동근, 김승미, 리동철, 리양수, 허명신, 염철남, 영홍식, 리정환, 최철순, 염근원, 김학준, 조기림, 리승봉,림용현, 주장실, 최진숙, 백창덕, 김두표, 허죽순, 최윤일, 김길만, 김일춘, 리신전, 김귀삼, 리손직, 박려원, 리창근, 리광주, 박경준, 김한옥, 김영학, 리인걸, 림대식, 박재준, 리학권, 염인순, 홍인준, 최리순, 염운신, 리광춘, 라하권, 리종문, 박공봉, 림종문, 노훈문, 황명환, 김두관, 임원표, 배원호, 최영도, 서용규, 김귀성, 최재복, 김원형, 김종환, 최봉준, 최규학, 김상혁, 김기남, 현원식, 김옥현, 유풍준, 김영식, 김황로, 김화룡, 리순희, 김종순, 백기준, 김길선, 김우철, 박일진, 리은지, 김종린, 김장복, 최갑진, 박두길, 리도화, 김현룡, 안경찬, 최도진, 천지춘, 김영호, 리일화, 전기천, 마진선, 홍종묵, 신안석, 김허준, 김월빈, 백순옥, 리춘식, 류길산, 김인도, 김옥린, 김동준, 김영화, 윤성화, 림영훈, 최중선, 한승택, 차준욱, 김병천, 김영옥, 김두천, 박은학, 조영학
전사자들 158명의 명단과
332명의 인민군 영웅 열사들이
잠들고 있다고 기록되어
490명 북한군이
5.18당시 전사한 것을
증명하고 있다
많은 측면에서
국민들이 쉽게 믿고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5.18광주사태에
북한군특수부대들이
대거 침투해서
배후교란작전을 했다는 것은
탈북자들의 말이 아니라
분명하고 정확한 사실입니다.
북한에는
광주사태에 참가했다가
돌아가서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생존해 있고
제가 살던 곳에는
광주에서 죽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영웅묘지가 있습니다.
현재 북한 함경북도
소재 청진시 천마산 마루에는
대남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전투영웅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공작 임무를 받고
남조선침투를 위해서
파견되었다가
공해상에서
국군의 공격을 받아서 숨진
특수부대사람들의 묘도
여러 개가 같이 있습니다.
말이 무덤이지
사실은 북한인민들의
사상교양을 위해서
시신도 없이 유품만 넣어서
만들어놓은 빈 무덤입니다.
이글은
인터넷을 검색하면
나오는 내용이다
사실 무근이면
존재 할수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이 내용이 세상에
공론화 되지않을까
나는 종북 언론
종북노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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