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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경성]영친왕의 유럽 호화여행,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모던 경성]영친왕의 유럽 호화여행,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7년 5월부터 11개월간 유럽 13개국 방문...탐험가 아문센 만나고, 레종 도뇌르 훈장 받기도

입력 2022.07.09 06:00
 
 
 
 
 
1927년5월 유럽 여행을 떠난 영친왕 부부와 수행원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세 번째가 영친왕 부부, 첫 번째는 이왕직 차관 시노다 지사쿠. 훗날 경성제대 총장을 지냈다./篠田治策, 歐洲御遊隨行日記

20세기 전반 한국인 중 가장 호화로운 세계여행을 한 인물은 영친왕일 것이다.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순종 동생인 이은(1897~1970)이다. 영친왕은 1926년5월23일 요코하마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기선에 올랐다. 영친왕 부부와 시종무관 김응선 대좌를 제외한 수행원 6명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이왕직 차관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훗날 경성제대 총장)와 무관 사토(佐藤)중좌, 전담 의사와 시녀까지 거느렸다.

◇군사 시찰 명목 비공식 방문

명목은 군사시찰이었다. 영친왕은 만 열 살에 이토 히로부미 손에 이끌려 일본에 유학했다.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1923년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사실상 일본에 붙잡힌 볼모 신세인데다 고종과 순종이 잇달아 세상을 뜨면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참이었다. 한창 나이의 그로서는 해외 여행으로나마 숨통을 틔우고 싶었을 것이다.

‘창덕궁 전하께서 양행(洋行)을 하신다 함은 여러 번 보도하였거니와 전하께서는 오는 4월5일에 환궁하시어 24일에 거행되시는 고 순종 전하의 소상(小祥)에 참여하시고 대비 전하께 하직하신 후 21일 경에 다시 동경으로 가시었다가 만반의 준비를 정돈하신 후 5월10일 전후에는 어(御) 발정(發程·출발)하실 예정인데, 약 1개년 동안의 예정으로 먼저 불란서를 순유하시고 구주 각지를 만유하시리라는 바, 왕 전하께서는 육군제도 연구와 비(妃) 전하께서는 부인문제 연구차로 이번 양행을 하시는 것이라고 승문(承文)되더라.’(‘昌德宮兩殿下 四月五日還御’, 조선일보 1927년3월12일)

1927년 6월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이집트에 상륙한 영친왕 일행은 카이로 근처 기자 피라미드를 구경했다. 사진 뒷열 오른쪽에서 6번째와 7번째가 영친왕 부부다. 낙타를 타고 기념촬영했다.

◇기자 피라미드에서 낙타 타고 기념촬영

영친왕의 유럽 순방은 1년 가까운 장기 여행이었다. 기선(氣船)으로 오가는 데만 3달 정도 걸렸고, 유럽엔 8개월 머물렀다. 유럽까지 여정을 구체적으로 보면, 상해->싱가포르->페낭->콜롬보->수에즈 운하를 지나 카이로->나폴리를 거쳐 7월4일 마르세유에 상륙했다. 요코하마 출항이래 선상(船上) 생활만 43일이 걸렸다. 유럽에선 프랑스, 스위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 등 13개국을 여행했다.

일정을 좀 더 세밀하게 소개하면, 먼저 마르세유를 거쳐 리옹, 파리에 입성했고 이어 루체른, 융프라우, 제네바를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8월 초엔 도버해협을 건넜다. 런던, 뉴캐슬, 에든버러, 글래스고, 맨체스터, 리버풀을 돌았다. 영국에만 두 달가까이 할애했다. 10월1일 파리로 귀환한 뒤 브뤼셀, 헤이그,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베를린,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 베를린, 칼리닌그라드, 바르샤바, 베를린,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빈, 프라하, 빈, 베니스를 거쳐 로마에서 새해를 맞았다. 나폴리, 폼페이, 피렌체, 밀라노, 니스, 몬테카를로, 칸을 거쳤다. 유럽의 볼 만한 도시는 빠뜨리지 않고 거의 다 들른 셈이다.

1928년 3월3일 마르세유에서 기선에 오른 일행은 나폴리, 수에즈 운하, 콜롬보, 싱가포르, 상해 등 올 때와의 역순으로 귀국 길에 나서 4월9일 고베에 도착했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간간이 신문에 보도됐다. ‘아라비아만 아덴에 도착했다’, ‘제네바에 도착했다’, ‘영국에서 훈장을 받았다’(‘창덕궁전하께, 대영제국훈장’,조선일보 1927년10월3일) ‘마르세유에서 귀국배에 올랐다’(‘歐洲御巡遊中 王殿下歸程’, 조선일보 1928년3월5일). 대부분 간략한 단신이었다.

영친왕은 1927년 6월부터 이듬해 3월초까지 유럽 13개국을 돌아다녔다. 시노다가 1928년 출간한 '歐洲御遊隨行日記'(大阪屋號書店) 에 수록된 지도.

◇유럽 군주 환대받은 영친왕, 일본 위세(?) 덕분

영친왕의 유럽 시찰은 비공식 방문이었다. 역사 유적지는 물론 박물관, 미술관, 콘서트홀과 대학, 병원 등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공식 방문 못잖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일본 대사를 비롯한 외교관이 나와 영접하고 안내했다. 제네바를 방문했을 때는 군축회의 대표로 파견된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조선 총독이 영친왕을 맞았다.

유럽 군주들도 영친왕을 깍듯이 예우했다. 1차 대전 전승국인 일본이 서구 열강과 맞먹는 대접을 받을 때였다. 영국 왕, 벨기에 황제, 네덜란드 여왕, 덴마크 황제, 노르웨이 황제와 만나 그 나라 최고훈장을 받기도 했다.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영친왕은 메이지 일왕 조카인 나시모토(梨本宮)의 장녀와 결혼한 일본 왕족이기도 했다.

1927년 11월 오슬로를 방문한 영친왕은 아문센을 초대해 극지 탐험 모험담을 들었다. 아문센은 이로부터 7개월 뒤 북극에서 실종됐다.

◇남극 정복한 아문센과 면담

그해 11월 오슬로에선 남극을 정복한 탐험가 로알 아문센을 만났다. 1911년 최초로 남극점을 다녀온 아문센은 노르웨이의 국민 영웅이었다. 아문센은 영친왕을 만나기 직전인 1926년 5월 비행선으로 북극을 횡단했다. 아문센을 초대한 영친왕은 그가 북극탐험 때 가지고 온 에스키모의 가구와 어구, 의복을 구경했다. 아문센은 영친왕을 만난 이듬해 6월 북극점을 탐험하러 간 이탈리아 원정대를 구하러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헤이그서 네덜란드 여왕 훈장 받아

영친왕은 1927년 10월 25일 헤이그를 방문해 1주일간 머물렀다.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아간 을사보호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기 위해 이준 열사 일행이 방문한 지 꼭 20년 만이었다. 밀사 일행과 달리, 영친왕 부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빌헬미나 여왕이 궁중 만찬에 초대해 최고 훈장을 주면서 환영했다. 시노다는 ‘수행일기’에 이렇게 썼다. ‘화란 황실이 우리 황실에 대한 친밀한 감정도 엿볼 수 있어 대단히 감사하다.’

영친왕 일행은 ‘진주귀걸이 소녀’로 유명한 마우리츠호이스 미술관를 둘러보고 스헤베닝엔 해변을 산책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평화궁(Peace Palace)도 참관했다. 이준 열사가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영친왕의 감회는 어땠을까.

영친왕은 1927년 10월25일부터 1주일간 머물면서 헤이그 평화궁을 찾았다. 20년 전 고종의 지시를 받은 밀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다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영친왕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건백서 들고 헤이그 찾아온 조선인

헤이그 체류 마지막 날 영친왕이 묵은 호텔에 어떤 조선인이 찾아와 면회를 요청했다고 한다. 이방자 여사가 훗날 ‘세월이여 왕조여’(정음사, 1985)에 남긴 회고다. 시노다 차관은 이 사람과 옥신각신 하다가 돌려보냈다. 영친왕이 불러서 경위를 물었더니 폴란드에서 한약방을 하는 황씨라는 조선인이 인삼이 든 약상자를 드리러왔다고 해 상자만 받았다는 것이다. 시노다는 한약이 든 약상자만 보여줬는데, 실은 한약 말고도 흰 종이에 쓴 건백서가 있었다고 했다.

‘전하여! 전하께서 구라파를 순유하시면서 각국 원수들과 친교를 맺으심은 경하할 일이오나, 한국 왕실이나 한국의 실재를 표시하지 않는 것은 심히 유감된 바입니다. 전하가 만일 고종 황제께서 한일보호조약을 무효로 만들고자 밀사를 일부러 헤이그에 보내셨던 사실을 잊지 않으셨다면.’

따끔한 쓴소리로 시작한 이 건백서는 영친왕에게 ‘나는 일본 황족이 아니고 한국의 황태자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하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일본 황족이 아니라 한국의 황태자라고 선언하라’

영친왕 부부는 시노다가 건백서를 감춰버려 그런 사실을 몰랐다. 이방자는 시노다 일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고 했는데, 시노다가 1928년 출간한 ‘구주어유수행일기(歐洲御遊隨行日記)’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시노다는 동경제대를 나온 변호사 출신으로 통감부 시절부터 조선에 건너와 활약했던 전문가였다. 이왕직 차관에 이어 이왕직 장관과 경성제대 총장까지 지냈다. 그런 그가 일제 시대 이런 민감한 내용을 공개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개인 메모에 이런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있다. 이방자 여사 회고를 보면, 자료 없이 기억으로만 만들어내기 어려울 만큼 구체적이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그보다 한 달 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떠난 나혜석 부부의 여행과도 여러모로 비교된다. 나혜석, 김우영 부부는 그해 8월 군축회담이 진행중이던 제네바에서 영친왕이 참석한 만찬에 연 이틀 초대 받아 자리를 함께 했다. 나혜석 부부도 귀국 길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을 건너는 기선 1등실을 탔다. 하지만 영친왕의 유럽 여행은 이것과는 격이 다른, 호화여행이었다.

영친왕의 유럽 여행을 주목한 연구는 거의 없다. 일본 외교관들의 극진한 안내와 유럽 군주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여행을 즐긴 영친왕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일본은 왜 외교 자원을 낭비해가며 영친왕의 유럽 여행을 지원했을까.

여행 직후인 1928년 이왕직과 시노다는 약속이나 한 듯 공적, 사적 ‘순유’기록을 출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PDF로 열람할 수 있는 이 기록물을 찬찬히 뜯어보면 해답의 실마리가 나올 지도 모른다. 영친왕은 1년 가까운 유럽 여행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었을까.

 

◇참고자료

송우혜, 평민이 된 이은의 천하, 푸른역사, 2012

김을한, 인간 영친왕, 탐구당, 1981

이방자, 세월이여 왕조여,정음사,1985

篠田治策, 歐洲御遊隨行日記, 大阪屋號書店, 1928

이왕직, 李王同妃兩殿下 御渡歐日誌,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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