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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내가 만난 아베, ‘마지막 사무라이’의 삶과 죽음!

내가 만난 아베, ‘마지막 사무라이’의 삶과 죽음!

두 차례 심층 인터뷰를 통해 들여다본 한 운명적 인간의 심연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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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민당, 암살 직후 선거로 改憲線 확보, 죽음으로 표적을 꿰뚫은 사무라이의 일생이었다!
⊙ 그는 간절하게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말 잘 해보고 싶습니다”
⊙ “朴正熙 대통령은 큰일에 정확한 판단을 내린 분”
⊙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준 점 사과, 한반도 자유통일 지지”
⊙ 북한 인권과 북핵 위협을 노무현·문재인보다 더 챙겼지만 한국인들은 그를 김정은보다 더 미워했다
⊙ 트럼프를 가장 잘 다룬 지도자
2013년 3월 2일 아베 신조 당시 총리와 만난 필자.
  나는 40여 일간의 유럽 여행을 마무리하고 지난 7월 7일 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대한항공기(에어버스 300-200)에 탔다.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약 250명의 승객이 마스크 낀 통조림처럼 앉아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잤다. 나는 늘 창가 자리에 앉는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러시아 영공(領空)이 막혀 비행기는 흑해(黑海)까지 남하한 뒤 좌회전하여 중앙아시아-중국-한국으로 직진하는 항로를 잡았다. 전보다 두 시간 정도 늘어져 도착까지 11시간. 여섯 시간쯤 지나 창을 살짝 밀어 올렸더니 대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항로표시판을 보니 카자흐스탄 1만2000m 상공에서 톈산산맥과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게 아닌가? 6000~7000m 눈 덮인 연봉(連峰)들을 내려다보면서 한 30분간 날았다.
 
  한국 시각으로 8일 오후 4시 인천공항에 도착, 휴대전화를 켜니 “아베 신조(安倍晉三) 전 총리, 피격, 심정지”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두 가지 장면이 스쳐갔다.
 
  총리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2일 도쿄 총리 관저에서 그를 인터뷰했을 때 신임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 잘 해볼 생각이란 포부를 밝히던 그의 간절한 표정.
 
  그리고 1995년 11월 5일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전해 들은 암살 소식! 그해 11월 3일 오후 텔아비브의 국방장관 집무실에서 라빈 총리를 인터뷰한 뒤 다음 날 새벽 5시50분(현지 시각)에 출발하는 루프트한자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 4시간 만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 귀국 비행편을 기다리며 종일 라인강 변을 구경한 나는 현지 시각 4일 저녁 8시30분에 대한항공기에 올랐다. 약 13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착륙, 바깥으로 나와 택시를 탔더니 운전기사가 라빈 총리 피살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때처럼 큰 충격을 받은 것은 10·26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내가 라빈 총리를 인터뷰한 것은 피격 34시간 전이었다. 인터뷰를 마치는 길로 귀국행에 올랐고, 프랑크푸르트를 이륙한 그 순간에도 라빈 총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기자는 라빈 총리 회견 녹음테이프를 리시버로 들으면서 대화를 정리했기 때문에 바리톤 음성의 느릿한 영어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때였다.
 
  이로써 나는 암살된 라빈과 아베 두 대정치인을 생전에 인터뷰한 기자가 되었다. 라빈 총리 회견은 그가 한 언론 마지막 인터뷰였고, 아베 인터뷰는 한국 기자와 한 유일한 단독 회견이었다.
 
 
  지도자의 動線이 노출될 때
 
 
저격범 야마가미 데쓰야는 아베 전 총리의 유세 일정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사진=게티이미지 코리아
  유럽 여행 마지막 밤을 나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보냈다. 꿈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나타났다. 저승의 박정희가 아니라 환생한 박정희였다. 생전의 그와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 꿈에선 친숙한 사람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박정희의 표정이 너무나 편안하여 내가 “그동안 잘 지내셨군요”라고 말한 기억이 꿈에서 깬 뒤에도 생생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에 불길한 꿈을 꾸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권 교체가 되어서 기분이 좋으신가’, 정도로 생각한 것은 나도 정권 교체 후 처음인 이번 유럽 여행에서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날 인천공항에서 라빈, 박정희,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은 윤석열(尹錫悅) 대통령이었다. 윤석열 후보가 지난 3월 8일 마지막 유세를 제주도에서 시작하는 데 대하여 나는 짜증스러워했다. “표도 적은데 왜 굳이 비행기를 타고 가는지”라는 걱정은 일종의 내 직업병이다. 나는 비행기를 많이 타지만 비행기 사고를 여러 번 취재한 경험에서 나온 지나친 상상력으로 늘 불안을 느낀다. 그날도 윤석열 후보가 제주에서 부산으로 ‘무사히’ 귀환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속으로 집사람이 제주도에 갈 때는 그런 걱정도 안 했는데 하면서 웃었다.
 
  이번 아베 전 총리 암살도 결국은 동선(動線) 노출이 주된 원인이었다. 범인은 고인(故人)이 나라(奈良)에서 지원 유세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선 노출 자체가 가장 큰 암살 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암살자에게 요인의 동선이 노출되면 쇠파이프로 만든 허술한 사제총에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꼭 알아야 할 사람은 김건희 여사일 것이다. 5년간 남편이 하루에 두 번 같은 동선을 따라 출퇴근하도록 격려한 책임을 지게 되는 사태는 나라의 불행이다. 안보, 안보 하지만 최고의 안보는 국군통수권자와 국가원수직을 겸하고 있는 대통령의 안전이다.
 
 
  레이건 암살 기도와 닮은꼴
 
  아베 암살은 1981년의 레이건 대통령 암살 기도와 닮은 점들이 있다. 그해 3월 28일 미국 청년 존 힝클리는 워싱턴에 들렀다가 이틀 뒤에 레이건 대통령이 힐튼호텔에 가서 미국 노동계 인사들에게 연설을 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되었다. 성적(性的) 망상장애를 앓던 그는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소녀 창녀로 나온 여배우 조디 포스터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며 편지를 써 보내고 있었는데, 대통령을 쏘면 냉담한 포스터가 자신에게 관심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3월 30일 오후 그는 호텔 앞에서 레이건을 기다렸다. 연설을 마치고 나온 레이건이 대기 중인 리무진으로 다가가는데 힝클리의 5m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를 향해 탄환 여섯 발을 쏘았는데 측근들이 피격당하고 레이건은 맞지 않았다. 하지만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자동차 안으로 밀어 넣는 순간 차를 향해 쏜 총탄이 차체(車體)를 맞고 튕겨서 레이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해 레이건은 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동선 노출이 힝클리의 암살 욕망을 유발(誘發)한 것이다.
 
  나는 아베 전 총리를 두 차례 인터뷰했고 북한 인권 관련 행사장에서 몇 차례 더 만났다. 그가 일본 역사상 최장기 재임 총리가 되어 역사적 인물이 된 데는 보수(保守) 본류(本流) 집안 출신이란 배경 다음으론 북한 인권 문제가 큰 역할을 했다. 2002년 관방 부(副)장관 시절부터 북한 정권이 자행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자신의 브랜드로 삼은 것이 그를 총리로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하여 냉담한 김대중(金大中)·노무현(盧武鉉) 정권에 비판적이었고 한국의 보수 인사들, 특히 북한 인권운동가들이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 아베 덕분에 자민당 정부가 일본인 납치자 문제뿐 아니라 한국인 납북자 문제도 같이 제기하여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한일연대가 이뤄진 시기가 있었다.
 
 
  부드러운 ‘강철의 심’
 
  그런 때이던 2005년 3월 24일 오전 나는 일본 도쿄 시내 자민당 당사로 가서 아베 신조 간사장 대리를 인터뷰했다. 후리후리한 키에 부드럽고 순박한 인상은 그때 벌써 한국에서 굳어지던 극우(極右) 이미지와는 너무 멀었다. 말은 빨랐으나 문법적으로 정확했고 중복이 거의 없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신조의 등뼈에는 헌법개정이라는 강철의 심이 박혀 있다’라고 평하면서 차기 총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는 관방 부장관이던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할 때 동행했다. 김정일은 일북(日北) 수교 회담을 진척시키기 위해 놀라운 고백을 했다. “우리 대남(對南) 공작 기관이 열세 명의 일본인을 납치하였는데, 여덟 명은 죽었고 다섯 명이 살아 있다”고 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면 고이즈미의 결단으로 수교가 이뤄지고 배상금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계산했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언론을 이해하지 못한 오판(誤判)이었다. 김정일의 자백에 분노한 여론에 일본 정부도 강경책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노선 전환의 중심에 아베 신조가 있었다.
 
  2002년 10월 15일, 납북되었던 일본인 다섯 명이 10일 뒤에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조건하에 귀국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던 아베 신조는 귀환 일본인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외무 관료들의 주장을 꺾고 ‘정부 방침으로써 송환 불가(不可)’를 결단했다. 결국 이 강경책은 북한을 굴복시켰다. 일본은 2년 뒤 귀환 납치자의 재북(在北) 가족도 귀국시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베 신조의 인기는 올라갔다.
 
  2003년 총선을 앞두고 고이즈미 총리는 당시 49세이던 아베 신조 의원을 자민당의 간사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보수적 이념을 신념화한 정치가였다. 일본 좌파(左派)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해온 《아사히(朝日)신문》에 대해서도 직설적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아사히신문》은) 납치 문제에 대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납치자 구출을 위해 일해온)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 같다.”(2004년 2월 1일 TV 대담)
 
 
 
 
남북한 좌익의 公敵이 된 이유
 
 
아베 전 총리가 존경했던 요시다 쇼인.
  아베 전 총리는 문재인(文在寅) 정권 시절의 여론조사에선 김정은보다 비호감으로 나올 정도였는데 그 출발점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그의 강경노선이 한반도의 공산당 세력을 자극한 것과 관계가 있다. 남북한 좌익이 그를 공격하고 순진한 일부 보수도 덩달아 반일(反日)종족주의 선동에 넘어가 아베를 공격한 결과일 것이다.
 
  17년 전 그날 아베 간사장 대리는 당시 노무현 정부가 새삼 제기한 독도 문제는 가볍게 보고 있었다. 내가 “시마네현 의회가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하여 분쟁거리를 만들기 전까지는 한일(韓日) 양국 관계가 매우 좋았다”고 했더니 “양국 사이에 분쟁이 있더라도 이를 확대시키지 않도록 언론과 정치가 사전에 조정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번 문제도 일본의 한 지방의회의 결의를 한국 언론이 너무 크게 취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북(對北) 유화 정책엔 비판적이었다.
 
  “북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한국의 입장은 이해하지만 유화 정책이 북한에 이용되고 있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은 한국의 성의 있는 지원에 대해서 선의(善意)로서 보답하지 않고, 가져갈 것은 다 가져가면서 줄 것은 주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은 그런 식으로 해도 먹혀든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유화 정책은 북한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아버지 아베 신타로 전 외무장관 모두 박정희 대통령과 친밀했었는데 고인(故人)도 비슷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안전을 확보한 다음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발전을 성공시킴으로써 한국의 번영에 큰 공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한일 국교정상화라는 매우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한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치인이란 존재는 중대 사안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느냐 못 내리느냐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큰일에 있어 정확한 판단을 내린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정치인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계시는 말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저의 고향은 야마구치현, 도쿠가와 시절엔 조슈번(長州藩)입니다만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사(志士)들을 많이 길러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란 선생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인용한 맹자(孟子)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성의(誠意)를 다하면 움직이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至誠而不動者未之有也)’는 말씀입니다.”
 
  내가 짓궂게 물었다.
 
  “아베 간사장 대리께서 출생하신 야마구치현 유야초라는 곳은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혹시 선조(先祖)가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이 아닙니까.”
 
  “야마구치 지역은 옛날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은 피가 서로 많이 섞였을 것입니다.”
 
 
  “左翼 입장에선 右傾化”
 
  아베 필생의 목표는 일본의 국가 정상화였고 그 핵심은 개헌을 통하여 자위대를 군대로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차분하게 답하던 그는 이 대목에선 열을 냈다.
 
  “한국 기자들이 ‘아베 신조가 일본의 우경화(右傾化), 그 선두에 서 있다’고 해서, ‘그냥 우경화라고 말하면 곤란하니까 구체적인 정책을 들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지적해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 60년간의 안보 정책 분야에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논의가 나오면 우익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집니다. 자위대(自衛隊)에 대해서는 법률적으로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의 지배 원칙에 비추어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헌법의 자위대에 대한 규정에 모순이 있다고 한다면 이를 바로잡자는 것입니다.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만약 교전(交戰) 상태가 벌어져 자위대원이 포로가 되었을 경우에는 군대가 아니기 때문에 살해될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서 (헌법 개정으로) 법률적으로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미지 조작으로써 (저를) 우경화라고 몰아붙인 점이 많습니다. 무엇이 우경화인지 실체가 없어요. 좌익의 입장에서 본다면야 모든 것이 우경화겠지요.”
 
  2006년 10월 11일 오전 일본 국회 예산위원회에선 아베 총리를 상대로 한 질의응답이 있었다. 50대의 아베 총리가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적시(摘示)하면서 속사포식으로, 그러나 낮은 목소리로 답변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는 그 며칠 전 만난 중국 총리에게 “미리 가져간 중국어로 된 납치 문제 팸플릿을 건네주면서 이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니 꼭 읽어봐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서도 “일본인 납치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니 한국 정부와 공동으로 대처하면서 정보를 교환하자”는 요청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가 진짜 인권(人權)운동가처럼 보였다.
 
 
 
 
“천년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
 
 
아베 전 총리와의 두 번째 인터뷰는 총리 관저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직후이던 2013년 3월 1일 기념사에 비수(匕首)와 같은 내용을 담았다.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우리와 동반자가 되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를 함께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올바르게 직시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양국 간에 굳건한 신뢰가 쌓일 수 있고, 진정한 화해와 협력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이 연설의 요지를 보고받은 아베 총리는, 아마도 당시의 한일갈등은 일본이 원인을 만든 게 아니고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의 임기 말 독도 방문과 천황 모독 발언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분이 있는 박정희의 딸이 새 대통령이 되었으니 다른 메시지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하고 아쉬워했을 것이다. 내가 아베 총리를 만난 것은 다음 날이었다.
 
  나는 원래 그가 자민당 총재로 복귀했던 2012년 가을에 그를 인터뷰하기로 날짜를 잡고 준비하였으나 중의원 선거로 미뤄졌었다. 2013년 3월 2일 오전, 총리가 된 그를 도쿄 시내 총리 관저에서 만나게 되었다. 총리 취임 이후 한국 언론과 하는 최초의 인터뷰였다. 질문의 통역은 일본인 납치자 구출 운동의 지도자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교수(당시 도쿄기독교대학)가 했고, 총리의 답변은 녹음하여 와서 번역하였다. 인터뷰는 한 시간 진행되었는데, 아베 총리의 발언은 늘 그렇듯이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정확하였다.
 
 
  “韓日은 자유·민주주의라는 價値 共有”
 
  구면(舊面)이 된 아베 총리는 “지난번 인터뷰 신청 때는 자민당 총재였는데, 이번에는 일본 총리대신 자격으로 인터뷰하게 됐습니다”라고 인사를 한 뒤, “이곳은 서재 겸 총리 집무실입니다. 총리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아마도 총리대신으로서는 저를 포함해 다른 총리 때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런 배려는 박정희 전기를 쓴 나를 통하여 막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악화(惡化)된 한일 관계의 복원을 원한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며칠 전 아베 총리는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서도 덕담(德談)을 했었다.
 
  “한국과 일본은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와 이익을 공유한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을 축하한다. 21세기에 걸맞은 미래지향적이고 중요한 동반자 관계 구축을 위해 협조하고 싶다.”
 
  이날도 그 점을 강조했다.
 
  “일본과 한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라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 나라로 일한(日韓) 관계는 지극히 중요한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일본은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도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습니다. 즉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는 데 있어 일본과 한국, 그리고 미국 등 3개국이 연계해나가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인적 교류도 연간 550만 명에 달합니다. 경제 관계에 있어서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됐습니다. 양국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늘 염두에 두면서 장래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두 나라의 번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양국뿐만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번영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한 것을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번 국회에서는 보정예산(補正豫算)을 심의 중이었고 클라이맥스에 다다랐다고 보고 있었습니다만, 심의를 중단하면서까지 아소 부총리 겸 재무대신을 취임 축하를 위해 파견했습니다.”
 
 
  “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주었다”
 
  전날 박근혜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사 중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천년의 역사가 흘러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는 부분이 한국과 일본 언론에 중점적으로 보도된 후여서 아베 총리의 말은 더욱 간절하게 다가왔다.
 
  암살 후 《월간조선》 2013년 4월호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 중 이 대목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베 피살 직후 세계 유수 언론의 보도는 아베를 전후(戰後)의 가장 중요한 일본 지도자로 극찬하는 내용이 주류였는데, 특히 미국과 협조, 중국을 견제함으로써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틀(쿼드 등)을 만든 점을 높게 평가하였다.
 
  내가 전날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을 언급하자 그는 진지하게 설명했다.
 
  “저는 한국인들에게 필설(筆舌)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안게 만든 것 등, 그분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대단히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 인식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면, 정치 문제화, 외교 문제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역사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정치가들은 미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 그리고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매우 고통스러운 과거를 안게 된 분들에 대해 지금까지의 총리들이 그랬던 것과 같은 생각입니다. 대단히 마음이 아픕니다만, 이 문제에 대해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역시 이것도 역사의 문제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2년 앞으로 다가온 종전(終戰) 70주년 담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담화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숙고해서 작성하려 합니다.”
 
 
  終戰 70주년 담화
 
  2015년 8월 15일 아베 총리의 담화문은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 역사를 정리한 명문(名文)인데 태평양전쟁으로 주변 국가에 가해(加害)한 데 대한 반성을 이렇게 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가늠할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우리나라가 안겨준 사실. 역사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것입니다. 한 분 한 분에게 저마다의 인생이 있고, 꿈이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깊이 되새길 때, 지금도 여전히 말을 잃고 그저 애끓는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토록 고귀한 희생 위에 지금의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전후(戰後) 일본의 원점입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사변(事變),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武力)의 위협과 행사도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두 번 다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식민지 지배로부터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 자결의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는 2009년부터 자위적(自衛的) 핵(核)무장론의 일환으로 나토식 핵공유를 주장해왔다. 이날 아베 총리에게 “한국의 정당방위적 핵무장론에 대하여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일본은 자체 핵무장 없이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방어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일본은 NPT 체제하에서 핵무기를 보유하는 일은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미·한(日美韓)이 확실히 제휴를 해서 북한의 핵무장 시도를 포기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자유민주통일 지지
 
  흥미로운 점은 고인(故人)이 총리 퇴임 후 공개적으로 미국과 일본의 나토식 핵공유 논의를 제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한국처럼) 일본이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고 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한 절차는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핵공유는 독일 등 나토의 다섯 개 나라에 두고 있는 미국의 전술핵에 대하여 유사시 공동사용권을 가진다는 개념이다. 윤석열 정부는 핵공유엔 반대하고 핵우산(확장억제)의 실제 적용 절차에 대한 합의를 시도하는 방향을 잡고 있다.
 
  나는 아베 총리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던졌다.
 
  “한국 주도의 한반도 자유통일에 대한 총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북한에선 정말로 인권이 탄압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어 민주적이며 자유롭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법의 지배를 존중하는 통일국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을 극우로 모는 한국 언론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저의 정책 자체가 극우적이라고 종종 한국의 매스컴으로부터 비판받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정권에서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킨 것, 그리고 지금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관련된 해석의 검토를 시작한 것, 또한 자민당이 헌법을 개정한 후 자위대의 명칭을 국방군(國防軍)으로 바꾸기로 결정을 한 것들에 대해 지적을 받았습니다. 과거 서울대학교에서 소수(少數)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도 제가 방위청을 성(省)으로 승격시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함으로써 일본을 극우적인 군국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까? 한국의 방위를 담당한 정부기관은 다른 부처보다 격이 낮은 기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주장이 극우적이라면 세계 국가들 모두 극우국가가 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말 잘 하고 싶다’
 
  아베 총리는 이날 한국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유대감을 강조했다.
 
  “나의 지역구는 조선통신사가 처음 상륙한 시모노세키로서, 조선통신사의 비(碑)를 세울 때 이곳 출신 정치인으로서 참석했습니다. 한국에선 김종필(金鍾泌)씨가 참석, 훌륭한 휘호를 남겼습니다. 시모노세키는 부산과 자매도시로서 매년 ‘부산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나는 지역구 출신 정치인이므로 늘 맨 처음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일본에서 한글 표기가 가장 많은 도시인데, 모든 표지판에 한글이 병기(倂記)되어 있습니다. 그런 곳이 저의 지역구입니다. 지금부터 더욱 일한 관계를 발전시키려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나는 정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대단한 고난을 극복해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고 신뢰 관계를 구축해나가고 싶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모가 암살되고 본인도 습격을 받아 얼굴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런 어려움을 겪고도 고난을 극복한 분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관방장관 시절엔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습니다. 박 대통령과 신뢰 관계를 구축하여 일한(日韓)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나는 아베 총리에게 “끝으로 역사적 연설을 하나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때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 연설 덕분에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고 고마워합니다”면서 안재홍(安在鴻)의 해방일 방송 연설 일부를 읽어주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자주·호양(自主·互讓)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 동포가 일본에서 똑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아베 총리는 경청하더니 “아주 훌륭한 연설입니다”고 말하면서 인터뷰를 끝냈다.
 
 
  “야키니쿠 먹으러 갑니다”
 
 
2015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아베 회담 분위기는 썰렁했다고 한다. 사진=뉴시스
  장면이 바뀌고 2015년 11월 2일, 청와대에서 열린 박근혜-아베 첫 정상회담은 오찬도 없이 끝났다. 100분간의 회담이 마무리된 것이 정오 무렵이었는데 박 대통령은 “향후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고 아베 총리는 “지금부터 야키니쿠 먹으러 갑니다”는 썰렁한 대화가 오갔다고 한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데 대한 박 대통령의 야박한 대접이었다고 보도되었다.
 
  그 두 달 전 중국군의 전승절(戰勝節)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은 자유 진영 국가 지도자로선 거의 유일하게 참석, 푸틴 옆에서 한국전의 침략군을 향하여 박수를 쳤다. 일찍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경사(傾斜)를 걱정한 오바마 대통령은 2013년 12월 바이든 부통령을 보내 한국은 베팅을 잘해야 한다는 취지의 경고를 하기도 했었다.
 
  친중반일(親中反日)로까지 비쳤던 박근혜 외교는 중국의 사드 보복과 한일 간의 종군위안부 문제 최종 타결로 정상화되는 듯했으나 탄핵 사태라는 블랙홀에 빠지고 말았다. 박정희의 딸이 왜 아베의 손을 뿌리치고 이명박의 막판 실수를 계승, 반일노선을 달려갔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에 드리워진 좌경적(左傾的) 역사관과 반일종족주의의 무거운 그림자에 답이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한 5·16 군사혁명과 유신에 대하여 대신 사과를 했을 정도이니.
 
 
  “단 것은 못 먹습니다”
 
  다시 장면이 바뀐다. 2018년 4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북한이 모든 핵실험을 중단하고 중요한 (핵) 시험장을 폐기하는 데 동의했다며 이는 북한과 세계에 매우 좋은 소식이라고 밝혔다. 아베 총리는 그러나 ‘비핵화 사기극’에 말려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검증 가능한, 돌이킬 수 없는 핵 및 미사일 포기이다. 우리는 면밀하게 지켜보겠다.”
 
  이쓰노리 오노데라 방위청 장관은 워싱턴에서 보다 직설적으로 논평하였다.
 
  “김정은의 선언으론 부족하다. 일본을 위협하는 중단거리 미사일 및 핵 폐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일본은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할 때까지 최대한의 압력을 가하는 정책을 지속할 것이다.”
 
  트럼프-김정은의 싱가포르 회담을 앞둔 2018년 5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은 도쿄의 아베 총리 공관에서 정상회담 및 오찬을 가졌다. 아베 총리가 이날 취임 1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문 대통령에게 케이크를 내어놓았는데 달아서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중앙일보》는 일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 “아베 총리가 ‘케이크를 드십시다’라고 권했는데, 문 대통령은 (임플란트 시술을 많이 하는 등) ‘이가 안 좋아 단 것을 잘 못 먹는다’고 사양했다”고 보도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측 배석자들은 문 대통령이 케이크를 먹지 않자 다소 당황했다”고도 전했다. 케이크에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주년 축하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앙일보》는 “당시 아베 총리는 등산이 취미인 문 대통령을 위해 쌍안경도 선물했지만 한국 언론에선 별로 부각하지 않았다”며 “소식통은 ‘아베 총리의 장기인 스킨십이 문 대통령에겐 잘 먹히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고 전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한일 관계는 더 악화되었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徵用工) 배상 판결과 일본의 대응은 지금까지도 출구를 찾지 못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문재인은 5년간 김정은의 부하처럼 행동했는데 두 사람의 야합(野合)을 견제한 아베와는 상종하기 힘든 관계가 된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문재인의 무관심과 아베의 경계심은 한국의 안보를 아베가 더 신경 써주는 형국을 만들었지만 한국인들은 김정은보다 아베를 더 미워했다. 2019년, 징용공 배상 판결을 둘러싼 양국 갈등은 무역 보복 및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직전까지 갔다.
 
  아베 총리는 2019년 8월 6일 “한국이 일방적으로 한일 청구권 협정 위반 행위를 하고 국교정상화의 기반이 된 국제조약을 깼다”고 했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에서 배제, 한일 관계가 악화되고 나서 나흘 만에 입을 연 것이다.
 
  그는 이날 히로시마에서 열린 ‘원폭(原爆)의 날’ 평화기념식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청구권 협정을 비롯해 국가 간 관계의 근본이 되는 약속을 먼저 지키길 바란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현재 일본과 한국 관계에서 최대의 문제는 국가 간 약속 준수에 대한 신뢰 문제”라면서 “국제법에 기초해 우리(일본) 입장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적절한 대응을 한국에 강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를 가장 잘 다룬 지도자
 
 
아베 전 총리는 2019년 4월 27일 오사카 G20정상회의 당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골프 회담에 대한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사진=아베 전 총리 트위터
  2020년 8월 아베 총리는 2007년 때처럼 신병(身病)을 이유로 사임을 발표했다. 그 직후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아베를 극찬하는 글을 썼다. 그가 트럼프 대통령의 변칙적인 행동을 관리하는 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였을 것이며, 일본의 안보는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과 좋은 관계를 맺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베는, 일본과 미국에 이익이 되는 합리적인 정책을 위해 절묘하게 트럼프를 구슬렸다고도 했다. 아베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가장 먼저 뉴욕의 트럼프 타워로 달려가 그를 만난 지도자였는데, 미북(美北)정상회담 후 트럼프를 노벨상 수상자로 추천하는 등 ‘아부 전략’으로 트럼프의 마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는 트럼프가 수시로 일본의 대미(對美) 무역흑자를 비판하고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압박했지만, 결국엔 아베가 요청하는 대로 다 해줬다고 했다.
 
  아베는 일본 주둔 미군기지 없이 태평양을 방어하는 것이 얼마나 더 비싸게 먹힐지 트럼프에게 상기시키면서도 “미국 젊은이들이 일본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고 달랬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도 만류할 수 있었다”고 했다.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도 《워싱턴포스트》에 기고문을 싣고 “아베는 북한의 핵, 생물·화학 무기 프로그램과 탄도미사일 능력의 제거를 끈질기게 추구했다”며 “그는 트럼프·김정은의 황홀경 속에 길을 잃기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을 현실과 가까운 곳에 묶어놓는 무거운 금속 체인과도 같았다”고 했다. “아베는 역내(域內)와 그 너머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는 중국에 맞서는 워싱턴의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이란 구호를 실제로 창시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미국의 중국 포위 전략을 뜻하는 ‘인도·태평양’이란 용어는 일본이 고안했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보인다.
 
 
  볼턴이 본 아베와 문재인
 
  2020년에 나온 존 볼턴 회고록엔 아베 신조 일본 수상과 문재인 한국 대통령을 비교하는 묘사가 많다.
 
  1.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국가 지도자가 아베라고 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의 등장 이후에는 공동 1위가 되었으며, 곁에서 지켜본 트럼프의 문재인에 대한 태도나 평가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2. 트럼프는 아베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가미카제 특공대 조종사였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아베 신타로는 해군비행학교에서 가미카제 훈련을 받았지만 전투에 투입되기 전에 패전(敗戰)을 맞았다.
 
  3. 볼턴은 문재인과 아베의 대북관(對北觀)이 정반대였다고 썼다. 문재인은 김정은에게 끌려다니면서 미국을 오도(誤導)하려고 했지만 아베는 북한 정권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에 서서 늘 정확한 정보와 시각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4. 트럼프는 아베를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고, 문재인을 만나면 짜증을 내거나 졸기도 했다고 한다.
 
  5. 아베는 트럼프를 이용할 줄 아는 지도자로 그려져 있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만나면 반드시 일본인 납치자 문제를 제기해달라는 아베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일본을 방문하면 납치자 가족을 만나주었다. 아베는 트럼프에게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을 위협하는 중거리·단거리 미사일과 화학·생물학 무기도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입장을 심었으며, 제재로 북한을 압박해야 굽히고 나올 것이란 주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했다.
 
 
  ‘트럼프의 존중을 받은 사람’
 
  6. 북한이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였을 때 아베는 한국과 일본을 위협하는 것으로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임을 분명히 하였다. 트럼프는 안보리 결의 위반이긴 하지만 미국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므로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공동 기자회견에서 아베는 트럼프를 옆에 세워두고 ‘안보리 위반’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반면 문재인 정권은 김정은의 비위를 맞추려는 트럼프와 보조를 같이하면서 안보리 결의 위반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탄도미사일이 분명함에도 ‘발사체’니 ‘방사포’라고 표현했다.
 
  7. 아베와 트럼프 사이가 좋으니 그 아래 실무자들끼리도 협조가 잘 되었다. 볼턴은 상대역인 일본의 국가안보국장 야지와 긴밀히 협력하였다.
 
  8. 볼턴은 한일 간의 갈등을 설명하면서 역사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쪽은 일본이 아니라 문재인이라고 썼다.
 
  9. 문재인은 김정은을 위하여 한미 동맹 정신과 국민의 안전을 희생시키는 사람, 그래서 트럼프와 볼턴으로부터 경멸을 받는 사람, 아베는 일본의 이익과 인류 보편적 가치를 견지하면서도 트럼프의 존중을 받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볼턴 회고록을 읽으면 한국인의 입장에선 문재인보다 아베가 더 위해주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는다.
 
 
  사무라이의 일생
 
  아베가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은 일본의 근대화 혁명인 메이지유신의 주체 세력을 길러낸 스승으로 불린다. 정계(政界) 거물 이토 히로부미, 육군의 실력자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주역들이 그의 제자였다. 아베는 야마구치(조슈번) 출신으로선 여덟 번째 총리였다.
 
  요시다 쇼인은 그러나 만 30세에 처형된 사람이다. 1859년 막부에 의해 역모죄로 몰려 참수된 것이다.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지금의 가고시마(규슈), 고치(시코쿠) 무사들과 손잡고 막부를 타도, 천황 중심의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것은 그가 죽은 9년 뒤였다.
 
  그가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가르친 43명의 제자들은 난세(亂世)에 어떤 운명을 맞았는가? 할복자살 6명, 전사(戰死) 1명,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어 사망(討死) 4명, 참수형 1명, 옥사 1명. 13명이 요사이 말로 하면 비명횡사(非命橫死)했다. 요시다의 제자 중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출세한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 등 5명 정도이다.
 
  7월 8일 아베 암살은 그가 일본의 대정치가로 확인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추모와 유명 언론의 높은 평가는 그를 이토 히로부미, 요시다, 사토, 나카소네급의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아베는 퇴임 후 자신의 정치철학을 계승한 후임자를 선택하는 데도 성공했고 자민당의 실력자로도 건재했었다. 일본의 드골 같은 존재라고 할까?
 
  반면 그가 상대한 박근혜, 문재인은 적대 세력에 정권을 넘겨주었다는 점에서 실패한 지도자가 되었다. 아베 암살에 대한 일본인의 애도는 이틀 뒤의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집권 세력이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모두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 아베가 염원했으나 이루지 못한 개헌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의 치열한 삶은 자신의 죽음으로 표적을 꿰뚫은 사무라이의 일생이었다. 일본 정계의 ‘마지막 사무라이’, 아베 총리의 명복(冥福)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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