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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Leasure I

제주 갯깍 주상절리대, 40~50m 기암병풍 하늘 찌를듯

제주 갯깍 주상절리대, 40~50m 기암병풍 하늘 찌를듯
자연과 시간 '大걸작' 빚다

거대한 용암 줄기가 식어 웅장한 주상절리대를 만들었다. 제주 서귀포시 갯깍 주상절리대 밑으로 갯바위를 포개 만든 아름다운 산책길이 만들어졌다.

갯깍의 중간에 있는 다람쥐궤.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된 굴이다.

영등할매의 바람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애초에 제주를 찾은 건 제주가 품은 또 다른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였다. 그 섬에 봄의 초록 청보리가 청청하게 짙어가고 있다고 해서, 숭숭 뚫린 돌담 사이로 번져가는 봄 기운을 담기 위해 달려간 걸음이었다.

아침 일찍 부두로 달려갔지만 배를 타지 못했다. 하늘은 푸르고 맑았지만 바람이 거셌다. 풍랑주의보에 모든 선박이 멈춰 섰다. 음력 2월 초하루부터 보름여 바람과 비를 몰고 내려온다는 영등할매의 심술 때문이었다. 제주의 초록을 담으려던 계획을 급히 수정해야 했다.

고민 끝에 대안으로 찾아간 곳은 영등할매의 꽃샘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선, 바다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절벽 '갯깍'이다. 연필 모양의 시커먼 바위 기둥들이 뭉쳐 이룬 주상절리대. 화산의 흔적이다. 갯깍은 제주컨벤션센터(ICC) 인근 중문대포해변의 것과 쌍벽을 이루는 제주의 대표적인 주상절리대다.

굽이굽이 길을 달려 예례동을 찾았다. 담수와 해수가 만나는 논짓물에서 만난 예쁘게 포장된 해안도로는 색달 하수종말처리장까지 이어졌다. 하수처리장 옆에는 반딧불이 보호지역이란 안내문이 붙어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청정지역에 하수처리장을 설치했을까. 이해 못할 행정이다.

하수처리장 앞 까만 갯바위에선 물질을 하던 해녀들이 잠시 숨을 고르며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부터가 갯깍이다. 바다의 '갯'과 끝머리란 '깍'이 붙었으니 바다의 끄트머리란 뜻이다.

처음에 작은 돌병풍이 시작되더니 곧 하늘을 찌를 듯한 깎아지른 40~50m 높이의 주상절리대가 펼쳐졌다. 절벽과 바다 사이엔 위에서 굴러 떨어진 듯한 까만 갯돌들로 가득하다. 누군지 그 돌들을 가지런히 정비해 벼랑과 바짝 붙여 돌길을 만들어 놨다.

제주의 최근 인기 상품은 '제주 올레'다. 제주의 속살을 찾아 떠나는 '걷기 위한 길'이다. 이 길은 제주 올레의 8코스의 한 구간. 제주 올레를 시작한 서명숙 씨의 책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에 따르면 해병대 장병의 도움으로 평탄화 작업이 이뤄진 '해병대 길'이 바로 이 돌길이다. 노약자나 여자들이 걷기엔 힘든 들쭉날쭉한 갯바위들을 군인의 구슬땀으로 반듯하게 길을 낸 구간이다.

반대편에서 그 길을 따라 줄 지어 걸어오는 일행을 만났다. 올레를 찾은 순례객들이다. 활짝 웃는 입가엔 갯깍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기쁨이 가득해보였다. 해수면과 같은 높이로 바다를 스치고 주상절리의 웅대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이 길에 대한 고마움도 함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갯깍 주상절리는 1km가량 길게 이어진다. 돌 틈엔 지난 가을 피었던 해국이 아직도 지지 않고 보랏빛을 뽐내고 있었다. 갯깍 절벽에는 2개의 굴이 있다. 첫 번째 굴은 입구에선 막힌 굴처럼 보이지만 한 굽이 돌면 바다로 내려오게 뚫려 있다. 이 터널처럼 생긴 굴을 제주 사람들은 '들렁궤'라 부른다. 들려 있는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에 만나는 굴은 다람쥐궤다. 평탄길에서 조금 언덕을 올라 만나는 이 굴 앞에는 글씨가 거의 다 지워진 안내판 하나가 서있다. 선사시대 유적임을 알리는 표식이다. 이 굴에선 선사인들이 쓰던 토기 파편이 출토됐다고 한다. 다람쥐는 산속의 다람쥐가 아니라 제주 말로 박쥐를 뜻한다. 이 동굴에 박쥐가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리라.

물방울 뚝뚝 떨어지는 동굴 천장에는 수정 모양의 돌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동굴의 고운 흙바닥엔 듬성듬성 초록 이끼가 덧칠돼 있다. 아무도 없는 굴 속. 천장서 떨어지는 물 소리에 집중해 본다. 어두컴컴하지만 무섭지 않다. 가만히 마음을 편안케 해주는 동굴이다.

갯깍 절벽길은 중문해수욕장에 딸린 조그마한 해변 '조른모살'에 다다른다. 현지인들은 중문해수욕장을 '진모살'이라 부르고 그에 비해 작다고 해 이곳을 조른모살이라고 부른다.

조른모살을 찍고 다시 되돌아 갯깍 밑으로 해서 예례동으로 나왔다. 되새김질하는 풍경이지만 감흥은 줄어들지 않았다. 파란 하늘 빗살무늬의 흰구름과 어울린 깎아지른 벼랑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하수처리장에서 이어진 해안길 옆으로는 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졌다. 성산 일출봉이나 산방산 일대, 관광용으로 일찌감치 꽃을 피워낸 조생종 유채가 아니다. 자연스레 제때에 맞춰 꽃을 피운 유채밭이다. 다른 곳은 아직 꽃봉오리도 달리지 않았던데 이곳은 봄볕에 달구어진 갯깍의 온기가 번져서인지 일찍도 샛노랗게 꽃을 피웠다.

갯깍 입구 예례동 일대는 고급 휴양단지로 개발된다고 한다. 부드러운 바람길 언덕 한복판에 50층, 30층 짜리 호텔도 세워진다고 한다. 이 노란 유채꽃 단지도, 바닷물과 용천수가 만난 특이한 노천탕인 논짓물도 개발의 광풍에 조만간 훼손될 처지다.

반딧불이 서식지에 하수처리장을 짓는 이들인데 뭔 짓을 못하겠는가. 단단히 굳은 바위절벽 갯깍도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마냥 바다만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닐런지.


서귀포=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