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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신라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신라 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생존기간 : (?~654)
재위기간 : (647~654)


신라 28대 왕으로서  선덕여왕과는 4촌지간이다.  선덕여왕(재위632-647년)은 결혼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왕위계승권자를 지명할 만큼의 왕권도 없었기 때문에, 김유신 김춘추 등의 진골세력에 의해 왕위에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진덕여왕이 등극할 당시 그녀의 아버지는 살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성골 계열의 왕실이 굳건하였다면, 당연히 갈문왕으로 봉해졌던 그녀의 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왕위계승은 왕권교체의 과도기에서 발생한 특이현상으로 해석된다.

 진덕여왕의 등극과 더불어 약 1년간 끌어오던 비담의 반란은 647년 정월 17일에 평정되었다. 그 결과 상대등 비담(毗曇)은 참살되고, 그 일당  30명역시 사형당하였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에 이어 당나라에 대한 우호관계를 다지는 한편 연호를 태화(太和)로 바꾸는등 주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도 함께 하였다. 그러나 재위 1년이 지나기도 전인 그해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의 세 성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백제의 신라공격은 선덕여왕때부터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무려 50여 개의 크고 작은 성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번에도 밀린다면, 당나라의 군사적 개입이 있기 전에 신라가 국가 패망의 위기에 몰릴 수도 있었다. 

 진덕여왕은 지난날 백제침공을 막아낸 대장군 김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백제역시 충분한 준비를 하고 신라군과 맞섰기 때문에, 지난날 처럼 그리 어렵지 않게 백제군을 격파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백제군의 공격이 워낙 지독하여 신라군은 괴멸될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여기서 김유신장군의 고뇌에 찬 결정이 내려진다. 그는 항상 지휘장교의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을 통하여 부하들과의 인화단결을 이끌어 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전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려야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그가 아끼는 부장  비령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으로 하여금 돌파작전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돌아 올 방법이 없는 희생작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진에서 작렬하게 전사하는 모습을 본 신라군사들은 크게 분격하여, 어느 누구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백제군을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투가 신라의 분명한 승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백제군 역시 3천여 명이나 되는 전사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무산등의 3성공략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김유신 장군은 선덕여왕에 이어 진덕여왕 대에도 신라를 지켜 낸 것이다.

 그런데 다음해 3월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키는 등 백제의 침공은 오히려 더욱 거세어 지기만 하였다. 의직이 이처럼 서쪽방면의 공격을 강화한 것은, 역시 김유신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유신 장군역시 지난날의 전쟁에서, 백제군의 강력함과 신라군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압독주 도독으로 임명당시, 부하병졸들을 집중 훈련시켜 최강의 정예병으로 거듭나도록 만들었다.

 김유신장군으로부터 단련을 받은 신라군의 작전능력과 전투능력은 놀랍도록 향상되었고. 백제 의직장군이 김유신장군의 길을 막고 섰을 때에도 세 방향으로 나누어 협격(夾擊)하여 괴멸시켜 버렸다.
 이처럼 김유신 장군은 연이어 백제군을 격파시켰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어적인 승리였을 뿐이지 전체적으로 불리만 전황을 근본적으로 바꿀만한 승리는 아니었다. 따라서 신라는 김춘추를 당나라로보내 우호관계를 강화하는 한편 군사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외교관계는 신라고유의 연호제도 포기및 당나라와의 봉건관계체결을 전제로 한 불평등조약이었이며, 당나라의 제도및 정치간섭을 허용하는 굴욕외교였다.

 이런 굴욕외교의 결과로 649년 정월, 진덕여왕은 당나라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그런데 신라는 이처럼 굴욕외교를 감수하면서까지 당나라의 군사원조를 요청하였지만, 즉각적으로 이루어 지지는 않았다.
   8월에는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당하는 등 세번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도 대장군은 김유신(金庾信)이었고, 화랑출신의 용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이 뒤를 따랐다. 

 김유신 장군은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며 10여일 동안 싸웠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아 도살성(道薩城) 아래 나아가 주둔하였다. 그러나 백제의 첩자침입을 감지한 김유신장군은, 내일 곧 구원병이 올 것이라는 거짓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렸다. 그 소식을 접한 은상은 전황이 유리함에도 불리하고 방어적인 전술로 전환하려 하였다. 그리고 미처 방어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뒤숭숭한 틈을 타 김유신 장군은 총공격을 시도하였다.
 결국 김유신 장군의 작전에 휘말린 백제는100명의 장군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병사 8,980명이 전사하였다. 또한 신라는 전마(戰馬) 1만 필을 획득하였고 그밖의 각종 수많은 병장기를 노획하였다.

 649년의 대승으로 인해, 신라는 한동안이나마 여유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650년 6월에는 김춘추(金春秋; 뒤에 태종무열왕)의 아들 법민(法敏;후에 문무왕)을 보내 친당정책을 강화하는등 국내외 정세를 추수릴 수 있었다. 
 그후 진덕여와이 사망하는 654년 3월까지 더이상 백제의 침공은 없었다. 
 그만큼 석토성의 승리는, 신라가 국가위기상황을 추수릴 수 있었던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진덕여왕의 사망 후 진지왕의 아들 이찬(;2등급)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인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여 태종무열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