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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신라27대 선덕여왕

신라27대 선덕여왕
신라 제27대 왕(재위기간632∼647) -여왕의 등극과 신라의 위기 


진평왕은 신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인 53년동안이나 왕위에 있었지만 적장자가 없었고, 그에따라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녀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성조황고는 그녀가 성골계의 유일한 후손임을 강조하여, 왕위등극에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성골이란 부모가 모두 왕손일 경우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녀가 왕위에 오른것은 김춘추나 김유신의 강력한 지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평왕의 재위가 53년이었으므로, 그녀가 왕위에 등극할 당시 나이역시 50~55세 정도로 추정하여, 등극당시 이미 노인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왕권이 신권에 앞도당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진평왕의 형제들이라던가, 형제가 없었다면 왕실의 주요인물중 한명이 왕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이 급성장하였고,  이들 신진세력과 구 세력간의 견제가 팽팽이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성립된 기이현상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예상밖의 왕위등극이어서인지, 즉위하던 해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는등 정치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일년간 면제해주는 등 민생문제에도 심여를 기울였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당나라의 간섭이 심해지자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등, 자주성과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여왕의 등극은 조금씩 자리 잡아가고 있아 갔지만, 재위 5년만에 백제가 독산성을 습격함으로써 전란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이 독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알천장군은 백제의 기습병 500명을 전멸시키는 공을 세우긴 하였지만, 백제로 봤을 때는 신라 후방 깊은 곳까지 군사들을 침입시켰다는 것 자체만으로 결코 실패라고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신라의 국경수비가 허술하고, 군사동원 체제가 원할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해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하여 북변에서도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현재 강릉지방인 하슬라를 북소경으로 삼는등 북방의 경계태세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작전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북방지역을 공격하여 신라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는 동안, 백제는 남쪽방면으로 공격하여 들어오려는 계획으로 보인다.

 백제의 의자왕의  이 계획을 실현사기 위해, 선덕여왕 11년  서쪽 변경에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40여성을 점령하여 버렸다. 이렇게 옆구리쪽이 크게 강타당하자 진흥왕대에 어렵사리 확보한 한강유역도 위태롭게 되었다.
 더구나 백제의 집중공격을 받고 있던 신라로서는, 한강유역까지 군사를 증파할만한 여력이 없었다.
 결국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에 밀려,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남양)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백제는 윤충(允忠)장군을 앞세워 낙동강방면의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였다. 당시 대야성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일이 지키고 있을만큼, 매우 견고하였으며 충분한 군사가 있었다. 그러나 김품일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부하장수들이 배신함으로 인해, 백제는 어렵지도 않게 대야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대야성의 함락은 신라로써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대야성에서 경주까지는 기병대로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따라서 경주는 백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하루만에 전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시집보낸 딸과 사위를 잃은 김춘추였지만, 이런 위기상황에서 결코 개인의 자존심과 국가의 위신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선덕여왕 재위 13년 (643년) 김춘추는 고구려에 구원요청을 하였고, 이것이 실패로 끝나자  당나라에 구원요청을 하는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에 당나라도 고구려에 휴전요구를 하였지만, 당시 고구려는 강경파인 연개소문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결국 신라는 혼자의 힘으로 이 위기를 넘겨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상황에 나타난 인물이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비록 의자왕이 탈취한 40여성을 회복하지는 못하였지만, 비교적 군사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7개의 성을 점령하여 반전의 계기를 삼았다.
 일단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사기가 오르자, 다음 전투도 할만 하였다. 특히 그가 거느린 군대는 압량주 군주시절부터 훈련을 시켜 온 최정예였으며, 부하장수들 역시 대부분 화랑출신으로 단순한 상하복종관계를 넘어서는 전우들이었다.

 김유신 장군은 다음해 644년 벌어진 전투에서, 점점 더 거세어져 가는 백제의 침공을 막기위해 동분서주해야만 되었다. 심지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백제의 침공소식을 듣자마자,  물 한모금으로 갈증이나 달랜 뒤 곧장 전쟁터로 향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렇게 김유신 장군의 활약으로 어렵사리 백제의 침공을 막고 있었지만, 그해 5월 어의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바로 당태종 이세민의 지원군 파병 요구였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던 신라로서는, 당나라와의 우호관계가 절박하였기 때문에 3만병이나 되는 대군을 파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대병력이 빠져 나가자, 백제와의 전투에서 전력공백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록에는 백제가 신라서쪽 7개 성을 빼앗았다고 나왔는데, 아마도 김유신 장군이 점령하였던 성이였을 것이다.

 이제 김유신장군이 어렵사리 반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던 모든 과정이 無로 돌아가고 말았다. 선덕여왕 16년 647년 정월에는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신라의 위기는 정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물론 선덕여왕의 사후 1년안에 그들의 반란은 진압되지만, 선덕여왕은 끝내 신라의 밝은 날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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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
무덤의 지름 23.6m, 높이 6.8m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은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여자가 왕위에 오른 자체를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백제 고구려의 침공조차 마치 여왕의 등극한 탓인듯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시절 신라가 두나라를 먼저 침공한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선덕여왕의 탓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또한 선덕여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맹공격 속에서도 끝까지 신라를 지켜내었다. 삼국유사등을 보아도 선덕여왕의 예지력은 예사롭지 않은데, 이것은 그만큼 백성들의 지지와 신하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선덕여왕대의 전란은 삼국통일의 과정이라는 큰 틀에서 보아야 하지, 남존여비의 구시대적인 역사관으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