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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동양 여왕의 역사


일 '아이코 여왕'시대 예약

 현행 왕실전범은 왕위 계승시 '직계'남성을 우선했다. 그래서 일왕의 장남이 계승 순위 1위인 왕세자가 됐다. 그 다음은 일왕의 남성 손자, 왕세자의 형제와 조카 순이었다. 그러나 개정안은 일왕의 직계를 우선하되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가장 먼저 태어난 장자에게 최우선 순위를 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왕세자 부부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도 아이코 공주의 왕위 계승 순위가 앞서게 된다.

동양에선 여왕이 드물다.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여자가 왕위에 오른 것은 모두 세번. 모두 신라시대였다.

632년 선덕여왕

647년 진덕여왕

887년 진성여왕

중국 역사상 공식적으로 여자가 왕위에 오른 것은 단 한번. 당나라 때 왕위를 차지한 측천무후(624년-705년)다. (중국엔 수많은 "여제"가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측천무후를 제외하곤 모두 어린 왕을 대리청정한 "섭정"이었다.)

일본도 여왕이 결코 흔하지 않았으나 중국이나 한국에 비하면 많았다.

201년 신궁왕후(神宮王后)

582년 추고여왕(推古王)

642년 황극여왕(皇極女王)

655년 제명여왕(濟明女王)

699년 지통여왕(持統女王)

위는 왕위 계승이 합법적으로 이뤄졌을 때의 기록이고, 고대 일본은 아예 여왕천하였다. 야마타이(邪馬臺)국의 여왕 히메코(卑彌呼)가 가장 유명했는데, 남편을 갖지 않고 100명의 여성 시녀를 거느리고 정사를 돌보았다고 한다. 여왕의 보좌하는 사람 중에 밥상을 나르는 사람이 유일한 남자이라 할 정도로 야마타이는 "여왕국"으로 알려져 왔다.

이처럼 여왕의 전통이 어느 정도 정착된 국가이지만, 최근까지도 일본은 부탄과 더불어 유일하게 여왕을 인정하지 않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이런 전통이 2006년에 와서야 깨어졌고, 일본은 이제 여자 군주시대를 맞으려 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에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 군주의 이야기를 짤막히 추려 보았다.


한반도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재위기간 632-647. 당시 유일한 성골 출신 왕위 계승권자로 진골 출신 남성들과 경쟁을 통해 왕위에 오른 한반도 최초의 여왕. 당시 백제, 고구려의 팽창 정책으로 위기에 빠진 신라를 공격적인 외교술로 구해 냈으며, 김춘수와 김유신 등 우수한 인재의 등용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 특히 친 문화적 정책으로 황룡사9층탑,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첨성대 등 신라 시대의 대표적 유물들을 남겼다.  
 
신라 26대 진평왕의 맏딸로 출생. 본명은 덕만. 당시 신라는 부모 양쪽이 모두 성골이어야 왕위를 허락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 덕에 왕위 계승 자격을 가진 성골은 진평왕의 두 딸 밖에 남지 않게 됨. 당시 또 다른 유력한 왕위 후보자 중엔 진골의 김용춘이 있었으나, 화백회의는 김용춘 대신 진평왕의 맏딸 덕만을 왕위 계승자로 추대한다. 남성 지배 중심의 고대 국가에서 여성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 남성만으로 이뤄진 화백회의가 만장일치로 여성 왕을 추대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이변이었음.  
 
총명한 머리에 관한 에피소드가 몇몇 전해짐. 대표적으로 당태종이 보낸 모란 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모란이 향기 없는 꽃이라는 사실을 밝혀냄. 개구리 떼가 울어대는 것을 듣고 백제군이 숨어있는 위치를 정확히 간파하기도 했으며, 훗날 자신의 죽을 날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했음.  
 



'음탕했던 여군주'? 진성여왕
 재위 기간 887-897. 몰락해가던 통일 신라의 51대 여왕. 당시 수많은 남자 왕위 계승자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 왕이 된 왕으로, 신라 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가진 성군이었음. 왕위에 오르자마자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으로 농민층을 안정시키려 했으며, 위홍을 시켜 신라의 유물을 보수하고 향가를 집대성하는 등 중요한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6두품 출신의 최치원을 등용해 신라의 정치와 문화를 개혁하려 했으나 기득권인 진골 귀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됨. 이후 신라를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시도를 했으나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번번이 무산. 재위기간 동안 단 한번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왕좌에서 물러남.

한반도의 마지막 여왕이 된 진성여왕은 이후 보수적인 유교 사가들에 의해 조롱거리로 전락함.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진성여왕을 근친상간과 난교를 일삼은 음탕한 여군주이자 나라를 망하게 한 요녀로 묘사함. (그러나 이는 신라 왕족 사이에 행해지던 근친 결혼에서 비롯된 이야기.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와 공식적인 남편 관계였고 이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음.)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본명은 무조(武照). 아버지의 사망으로 몰락의 길을 걷다 운 좋게 천거를 통해 황궁의 시녀로 들어감. 미모도 연줄도 없이 지략 하나로 황태자 치노와 연인 사이가 된다. 피비린내 나는 궁정 암투 속에 마침내 치노는 황제(고종)에 오르고 무조는 고종의 두 번째 황후의 자리에 오른다. 황후에 오르기 위해 무조는 자신의 아들을 목 졸라 죽이고 이를 고종의 황후에 뒤집어 씌웠으며, 이후 폐위된 황후의 재기 움직임을 포착하자 그녀의 손발을 잘라 술독에 빠뜨려 죽이는 등 무시무시한 행각을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무조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나약한 고종 황제를 대신해 제국의 실권을 잡는다. 그녀와 고종 사이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무조는 첫째아들과 둘째 아들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 야심이 강해 아버지의 자리까지 넘본 둘째 아들은 자신의 손으로 처형하는 "용단"을 내리기도 한다. 결국 셋째 아들 현이 황제에 올랐으나 그마저도 성에 차지 않았던 무조는 그를 폐한다.

690년 국호를 주(周)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여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한다. 이 동안 왕권을 지키기 위해 치밀한 밀고제도 및 고문 처형 방법이 동원됐는데, 귀에 진흙을 넣고, 두개골을 조이고 꺾고, 눈동자를 가르는 등 특히 고문 방법이 말도 못하게 잔혹했다고 한다.

측천무후에 관한 이야기는 그녀에게 눌려 지냈던 수많은 남성들의 증언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 논란의 여지가 많다. 측천무후의 시기에 당은 국력의 절정기에 달했다. 귀족들의 권력을 크게 축소하고 농민들의 세금을 경감했으며, 농업 생산성을 극대화 했다. 그리고 학자들을 적극 등용해 평등한 과거제를 정착시켰으며, 학문과 종교를 정극 융성해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생산성을 보였다. 무후의 공포정치는 여성이 왕권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황후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는 등의 이야기도 날조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왕은 아니었으나, 왕과 다름없는 권력을 휘둘렀던 여성 권력가들의 이야기.



한나라의 태조, 유방의 황후 여태후(呂太后)
 BC 241~BC 180.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의 황후. 뛰어난 지략으로 유방의 천하통일을 보좌했으며, 한나라가 세워진 뒤엔 유방이 제후들과 공신들을 제거해 왕권을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그 어떤 잔혹 행위도 서슴지 않았는데, 개국 공신인 한신과 팽월을 숙청한 것도 여태후의 독자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낳은 아들이 즉위하자 실권을 장악, 권력의 화신이 된다. 그녀는 맨 먼저 아들의 왕권을 위협했던 후궁 척희의 아들을 독살하고 그녀를 감옥에 가둔 뒤 끔찍하게 살해한다. (척희는 감옥에서 혀와 귀가 황산에 녹고, 눈과 팔 다리까지 뽑힌 채 돼지의 오물 밭에 던져졌다.) 이후 여태후는 아들의 권력을 무력화 시킨 후 정권의 요직을 여씨 친인척들의 자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황제의 자리를 대신한 8년 동안 여태후는 자신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셀 수 없이 많은 정적을 무참하게 죽여 나갔다.

여태후는 여씨 정권을 지키기 위해선 그 어떤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았지만, 한나라 사회를 안정시킨 군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재임기간 동안 강력한 민생안정 정책을 세우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켜 사회 질서 안정을 도모하고 피폐했던 경제를 회복시켰다.


 

청나라의 최후를 지배한 여군주, 서태후(西太后)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 출신으로 왕을 대신해 청나라의 몰락기를 지배했던 여성. 함풍제의 사후 아들 재순이 동치제가 돼 즉위하자, 왕이 어리다는 이유로(당시 동치제는 6살) 섭정을 시작함. 외국어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했으며 근대적인 세관을 설치했으며, 정부의 부패를 종식시키고 자질이 뛰어난 사람을 채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청나라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임.

1875년 아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군대의 힘을 빌려 제위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누이동생의 3세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와 옹립, 광서제(光緖帝)로 즉위시켜 또 다시 정권을 쥔다. 1898년 장성한 광서제가 서태후를 몰아내고 입헌군주제로 전환을 꾀한다. 이때 서태후는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을 일으킨다. 당시 이미 서태후는 골수 깊은 반동 보수주의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투쟁마저 정치적으로 활용, 서양에 선전포고 했으나 서양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서안으로 피신하고, 이후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 신축조약을 맺는다.

결국 서양에 굴욕을 당한 뒤에, 서태후는 광서제가 시도했던 입헌군주제를 뒤늦게 실시하고 개혁에 나섰으나 청왕조는 이미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중국은 서양의 식민지화 돼 가고 있었다. 서태후는 끝내 아무런 개혁도 완수시키지 못한 채 광서제가 죽은 하루 뒤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