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은 왜 親日人名사전에서 빠졌나? | |||||||||||||
우익의 친일을 부각시키고, 좌익의 친일을 숨기는.. | |||||||||||||
친일파의 명단에서 악성 친일파 여운형은 제외되었다. 친일파 진상규명한다면서 인민재판용 명단을 수집하더니 어떤 이유로 여운형만 명단에서 제외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여운형의 이름이 실린 것은 명의 도용이다? 이는 억지다. 우파인사의 이름이 있으면 친일행적이고, 좌파인사의 이름이 들어있으면 명의도용이라니... 여운형은《반도학도출진보(半島學徒出陣譜)》에 기고된 징병권유문을 올렸고 그경성일보에 3회, 친일기관지에 1회의 학도병에 자발적으로 나가라는 글을 올렸다. 그런가 하면 조선언론보국회 명예회원으로도 가입했다. 더욱이 대다수 국내 인사들이 변절의혹을 받기 전이었던 1930년대 초반에 이미 '조선대아세아협회' 상담역에 재직, 일선융화와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탄생한 친일단체인 '조선교화단체협의회'에 내빈으로 참석하여 찬조연설을 하기까지 했다. 여운형씨가 오랜만에 내방했다. 그의 시국담을 요약하면 "일본이 연전연승하는 것은 참으로 경하할 일이지만, 동아의 앞길에는 조금도 광명을 찾아 볼 수가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염려는 더욱 높아가고만 있다. 모든 것을 제쳐놓고 일본은 중국문제를 빨리 처리하는것이 급한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중략) 그런데 지금 대영미전(對英美戰)에서의 일본의 연승은 중일외교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좋은 객관적인 정세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장개석과의 악수를 더욱 가능케하는 정세에 있다. 나 여운형은 재작년 말씀하신 장개석과 악수하여야 한다는 오늘 더욱 절망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후략)" - 조선총독부 우가키 총독의 비망록 (1945년 5월 20일자) 1941년 중엽에 오카와 선생의 편지를 가지고 서울시 계동에 있는 여운형 댁을 찾아간 것이 두 사람의 첫번째 접촉이었다. 내가 여운형을 찾은 것은 오카와 선생이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배달하고 대답을 들으려고 한 것인데, 그 편지의 내용은 여운형더러 대중공작(對中工作)에 나서라는 종용이었다. 여운형은 흥분하는 기색을 보이며 편지를 읽고 한참 생각을 하더니 승락했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동경에 가겠습니다. 오카와 선생은 내가 일본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말이 있습니다만 오카와 선생 같은 분으로부터 이처럼 인정을 받은 나는 영광입니다. 다행히 선생의 기미(驥尾:준마의 꼬리)에 따라 아세아와 민족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미력을 바칠 수 있다면 나의 죽음에 꽃도 피겠지요." - 카노 츠토미 著 『여운형과 오카와(大川) 선생』 오카와가 주재하는 동아문제연구단체인 동아회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검사 심문에 여(운형)가 인정했다고 기술됨. -1942년 서대문형무소 여운형 공판기 1941년 가을에 일본에 가서 오카와와 수차례 회담을 했고, 외무차관 오하시를 만나 1941년 9월 월남 방문, 중경과 연안을 거쳐 일본과 중국정부의 화평조약 체결에 교섭창구가 되어줄 것을 당부받았다고 기술됨. - 마츠모토 겐이치 著 『백년의 일본과 아시아』 192~193페이지 1942년 여운형 유언비어 혐의(독립운동이 아님)로 구속 후 일본 고이소 총독과 우익 언론인들, 일본인 지인들의 탄원을 받아 1943년 7월에 가석방됐다. 그뒤 여운형은 1943년 가석방 직후 전향서를 일제에 제출하고 황국신민서사를 했다. 여운형의 학병권유문 원본: 반도 이천오백만 동포에게 호소함(여운형씨 수기) 친애하는 반도의 젊은 학도가 오늘도 크게 울려 퍼지는 가슴에 미·영 궤멸의 등불을 비추며, 지금 일어나서 전열로 전열로의 출격을 계속한다. 출진결의의 용감한 함성, 이에 있어 자식을 격려하는 아버지와 은사, 전체 반도의 산하(山河)는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영광에 끓어올라, 이천오백만의 가슴은 무서울 정도로 격동한다. 대동아전투발발이래, 야마노토원수의 전사, 아쓰쓰섬의 황군장병의 옥쇄의 소식과 함께 그 감격은 가슴에 와닿아 비장한 각오를 새기는 것이다. (중략) 지금 세계 질서의 역사창립의 성업은 구축국의 철의 유대에 의해 진전되어져, 대동아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건립되고 있다. 그리고 제국이 존망을 가지고 싸우는 이 일전의 여하에 따라서 좌우되며,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이기지 않으면 안되며, 물론 완성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 승리는 10억의 생과 사를 좌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자국을 수호하기 보다도 유구한 삼천년의 역사와 영예를 위해, 또한 동아 전체를 해방하기 위해서이다. 진정으로 이 일대 결전은 동아 10억의 생존권 획득전이다. 세계는 바다와 땅을 세우고 있는데 청년은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어...(중략) 세계인류, 피가 난무하는 중에 반도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금이야말로 자기를 알고, 조국을 구명해 황동세계관에 기초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을이 온 것이다.(후략) 저 중 유언비어 날조는 독립운동과는 전여 무관하며, 그것도 일본의 도움으로 풀려난 것이다. 여운형은 저런 행적들 때문에 해방직후 같은 좌익인 박헌영 등으로부터 친일파로 비난받기도 했다. 이런 여운형은 교묘하게 뺀 것이 친일인명사전의 실체다. 김성수는 친일파이고 여운형은 친일파가 아니라는 민문연의 잣대는 이중잣대이자 편견이다. 김성수의 이름이 올랐으면 무조건 친일이고, 여운형이 명단에 오르면 명의도용이라니. 민문연은 이렇게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가정적으로나 경력상에 하자와 흠결많은 인사들이 주도한 것도 문제였다. 친일파 진상규명 한다면서 이런 이중적인 잣대가 어디에 있던가. [독립군 네티즌 논객: http://allinkorea.net/bbs.html?Table=ins_bbs2&mode=view&uid=6392&page=1§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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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9/11/12 [21:55] 최종편집: ⓒ 올인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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