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오늘도 운두령을 넘는데!
written by. 이현오
원수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 고개 새무덤 오솔길을 산새가 운다.
12월9일 아침 9시가 가까워진 시각, 서울 송파구 올림픽 공원역 앞으로는 중절모에 두툼한 잠바차
림의 신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로 만나자마자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묻기에 바쁘다. 현역시절 영관급 장교로 조국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봉사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한 때 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온몸으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운 6·25 및 베트남 참전
용사와 60,70년대 북한 무장간첩의 출몰로 국민이 불안해 할 때 공비들과 목숨을 건 소탕작전에 참
전했던 역전의 용사들인 이들이 아침 일직 이곳에 모인 것은 이 날 제41주기 이승복 군 추모제에 참
석하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육·해·공군·해병대 영관장교 연합회 회원 100여 명은 두 대의 차량에 분승(分乘)해 강원도
평창으로 향했다. 한동안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못다한 얘기꽃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 모임의 권오강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안부 인사와 더불어 이 날 행사 전반에 대한 계획
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 "오늘 추모행사에는 의미 있는 한 사람이 참석한다"고 운을 뗀 뒤 41년 전
울진-삼척지구로 침투한 120명의 무장공비 중 생존한 2명 중 한 명이 행사에 참석한다는 것이었다.
잠시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오갔다. 권 회장의 발언이 계속되었다. 1968년 10월30일 울진-삼척으
로 침투한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부대 소속이었던 생존 공비(생포 후 전향)인 김익풍씨가 처
음으로 추모제에 참석한다는 것과 그가 사기와 사업 실패 등으로 매우 어렵게 생활한다는 소식을 전
했다. 그러면서 모금을 제의했다. 단 한명 반대의 목소리도 없었다. 노병들의 마음은 하나로 통일됐
다. 십시일반의 성금이 모여져 1백 만원을 채웠다.
1968년 그날로부터 만 41년이 지난 2009년 12월9일 정오,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중
턱 기슭에서는 41년 전 무장공비들의 잔악무도(殘惡無道)한 칼날 앞에 속절없이 스러져간 이승복(9
세), 승수(7세), 승자(4세) 3남매와 어머니 주씨가 모셔진 묘역 앞에서 군악대의 주악과 스님의 독경
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엄숙하게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공산당은 싫어요
- 부제 : 반공소년 이승복의 노래
1.원수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고개 새무덤 오솔길을 산새가 운다
2.어린 넋 잠든 곳에 겨레가 운다. 엎드려 절한 마음 눈~물이 솟네
바람도 길 멈추고 어루만지니 하늘이 성이 났다 오랑캐들아
그리고 당시 침투하다 생포됐던 김익풍씨가 묘소에 올라 참회의 술잔을 올렸다. 가족들 앞에 깊숙
이 허리를 구부렸다. 비록 자신이 자행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와 함께 남파됐던 동료 공비들에 의해
학살된 이승복 유족 앞에서 잠시 몸을 추스린 뒤 "미안합니다"란 말을 되뇌었다. 그 순간 어린 승복군
도 지켜보고 있었을까!
이 사건 후 우리사회는 북한 공산주의의 만행 앞에 다시 한번 치를 떨며 '반공'을 중심으로한 확고한
안보의식이 국민의식 속에 깊게 투영되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내용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
록되어 반공교육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학교에는 어린 이승복 동상이 세워졌다. 1975년에는 그의
기념관이 대관령 정상에 건립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승복 어린이를 기리는 장학기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복 사건은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1992년 이 사건을 최초로 보도했던 언론사 보도 내용
이 현장에 기자가 없었고, 추측과 조작에 의한 작문으로 쓰여졌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
고 언론개혁시민연대는 1998년 서울과 부산에서 '오보전시회'를 여는 등 이 사건 자체를 반공이데올
로기화 하려는 것인양 매도하며 우리사회를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부쳤다.
이 사건으로 부인과 세 자식을 잃고 가정이 풍비박산된 이승복군의 아버지 이학구씨는 1998년 11월
일가족 살해사건으로 심신이 미약해진 가운데도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난 맏아들 학관씨와
파동의 당사들을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그리고 서울지검은 1999년 7월 이승복 군 사건이 현장에 없이 작성한 소설이라며 이승복의 외침을
부정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김주언 언론개혁시민연대 김주언 사무총장과 '미디어 오늘' 김
종배 차장을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법과 정의는 살아 있었다. 대법원은 2006년 11월24일 이승복 사건이 진실임을 최종 확정하
기에 이르렀다. 허위보도한 당사자에게는 형사처벌과 함께 민사상 배상책임도 물었다. 하지만 오랜
시일이 흐르면서 반공·안보교육의 상징이었던 이승복 사건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락되고 말
았다.
이 날 김익풍씨는 "유가족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고 몸을 낮추면서도 '오보 조작'설에 대해서
는 "말도 되지 않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북한 공비들이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 '공산주의가
좋으냐, 싫으냐'의 물음에 "북한이 좋다고 했거나 공산당이 좋다고 했으면 결코 죽이지 않았을 것"이
라고 했다.
당시 공비들은 우선 정보를 탐지하고 남한 사람들을 포섭하거나 대동월북(납치)하는 것이었기에
'신고'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되는 대상은 죽이지 않았을 것이란 것이다. 그러나 비록 어린이였을지
라도 '공산당에 반대'발언을 했기 때문에 일가족을 잔인하게 죽였다고 보면 된다고 부언했다. 가슴
처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사회, 어떤 조직이든 진실이 있으면 거짓이 있기 마련이고 참이 있으면 부정이 있기 마련이다.
진실게임은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을
그들만의 잣대로 재단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스스로가 조작하면서 마치 그들이 정의인양 하는 파렴
치한들이 이 시대에 얼마든지 존재하며 득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번 이승복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다소의 부침(浮沈)은 있다할지라도 정의(正義)는 언제나 살아 숨쉬고 승리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으
면 싶다. 영관장교 연합회 회원들이 모금한 성금을 김익풍 씨에게 전하는 9일 오후 계방산 자락을 뒤
덮은 눈 쌓인 이승복 기념관 경내에는 이승복군을 추모하는 '이승복의 노래'가 잔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원수의 총칼 앞에 피를 흘리며 마지막 주고 간 말 공산당은 싫어요. 구름도 망설이는 운두령 고
개 새무덤 오솔길을 산새가 운다.♪♬
(konas)
코나스 이현오 기자(holeekv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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