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Gallery

그림 이야기 - 램브란트(1)

 

                             

      렘브란트 Van Rijn Rembrandt(1606~1669)

      영적(靈的) 세계를 표출(表出)

       

      자화상

      SELF FORTRAIT

      K-1.jpg

       

      1628년경 油彩 23.4×17.2Cm
      카셀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63년이라는 길지도 않은 생애에 60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겨 놓고 있다. 방대한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서양 회화 사상 유래를 찾아볼 없으며, 굳이 비길 만한 예를 찾자면, 짧고도 비극적인 생애를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고호이다. 일반적으로 이처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들은 자기 응시의 화가,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파헤치는, 내향적이자 인간의 정신적 갈등에 남달리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화가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렘브란트에게 있어 자화상은, 렘브란트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와 예술적 편력(遍歷) 더듬는 이정표(里程標) 되고 있기도 하다. 작품에는 연대가 기입되어 있지 않으나, 다른 자화상과 비교하여 1628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며, 렘브란트의 가장 젊은 날의 초상화이다.

       

       

      K-2.jpg

        

      예루살렘의 파괴를 한탄하는 예언자 예레미야

      THE PROPHET JEREMIAH LAMENTING THE DESTRUTION OF JERUSAEM
      1630
      油彩
      58×46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1630년을 전후해서 노인의 단독상(單獨尙) 즐겨 그렸다. 작품도 중의 하나이며, 모델은 그의 부친으로 생각되고 있다. 렘브란트의 라이덴 시대는 유채 기술의 훈련기이며, 앞의 작품과 함께 작품 또한 완성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두운 암굴에서 부각되는 인물, 금속 용기의 반짝임, 묵직한 포목(布木) 질감(質感), 모두가 20년대의 생경(生硬) 광택 (光澤)과는 달리, 은근히 가라앉은 색채 속에 오히려 광채를 빛내고 있다. 작품의 주제는 물론 성서에서 취한 것이나 그림과 일치되는 기술(記述) 없다. 렘브란트가 주제를 자유롭게 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예언자로서 예루살렘의 불운(不運) 알고 있던 예레미야는 아직도 예루살렘 사람들의 불행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K-3.jpg

       

       

      토론하는 철학자

      TWO SCHOLARS DISPUTING
      1628
      油彩
      71×58.5Cm
      멜버른 국립 갤러리 빅토리아 소장

      작품의 주제에 대해서 전문가들 사이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주제가 어떠한 것이었든, 그림은 라이덴 시대에 있어서의 명암의 대비가 강조된 카라바지오풍() 농후한 작품의 하나이다. 네덜란드에 있어서의 카라바지오의 영향은 매우 강력한 것이 었으며, 그것이 렘브란트의 작품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은 대조적인 인물을 매우 사실주의적(寫實主義的)으로 그린다는 모티브, 번째로는 인물의 표현이 규범적인 () 표현이라는 고전주의적 전통에서 완전히 이탈되어 여기에서의 노후의 모습 자체가 강조되어 있다는 , 번째로는 명암의 대비로서 대립되는 화면의 인물과 기타의 사물들을 한층 부각시키고 있다는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렘브란트는 주제의 박진감 넘치는 표현으로 다가선다.

       

       

      K-4.jpg

       

       

      유태인의 신부

      THE JEWISH BRIDE
      1655년경 캔버스
      油彩
      121.5×166.5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후기 작품 중에서도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그러나 애초에 이그림의 제목이 <유태인의 신부>였느냐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다. 이 일반화된 제목의 유래는 '유태인의 신부이다. 그녀의 부친이 딸에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다.' 라는 해석에 의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 성서(聖書)의 이야기가 깔려 있을 수는 있으나, 언제나 처럼 그 이야기가 서술적으로 그려지고 있지는 않다. 여러모로 보아 이작품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야 어떻든 화면 전체에 풍기는 엄숙함, 즉 인간 본연의 사랑의 엄숙함이 배어 있으며, 이를테면 성서 속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과 실제의 인물과의 통합이라는 문제를 이 작품은 어떻게 생각하면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결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K-5.jpg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THE ANATOMY LESSON OF DOCTOR JOAN DEYMAN
      1656
      캔버스 油彩
      100×134Cm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출세작이랄 수도 있는 <툴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이후 거의 25년만에 그는 다시 같은 주제의 작품을 다루고 있다. 25년이라면 4반세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작품은 아마도 동안의 렘브란트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가늠할 있는 안성 마춤의 작품이라 있을 것이다.그러나 작품 역시 원화의 3분의 1 밖에 남아 있지 않은 화를 입은 작품이다. 작품을 위한 여러 가지 소묘로 미루어 보건대,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좌우대칭 구도이고 , 특히 해부되는 시체의 대담한 단축법(短縮法) 처리이다. <툴프 박사> 경우, 시체는 대각선으로 다시 말해서 모로 누워 있는데 반해 그림에서는 시체의 머리와 발이 시각(視覺) 속에 단축되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투시법 기법의 의식적 도입이라고 할까.

       

       

       

      K-6.jpg

       

       

      폭풍을 머금은 풍경

      STORMY LANDSCAPE
      1638
      년경 油彩
      52×72Cm
      브리운쉬바이크 안톤 울리히侯()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의 풍경화는 1630년대 후반에서부터 50년대 전반에 걸친 20 사이에 그려지고 있다. 소묘가 250, 에칭 24 그리고 유화 17점에 달하는 풍경화는 그다지 많은 작품 수는 아니나 렘브란트의 예술적 전개 과정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분야였다. 이유는 자연의 묘사가 그로 하여금 회화 표현상 심리 표현상에 있어 새로운 경험을 얻게 하고, 또한 넓이 있는 공간과 아울러 외광의 문제에까지도 눈뜨게 했기 때문이다. <폭풍을 머금은 광경> 일종의 상상풍경화라고 있을 것이며, 순간의 반짝이는 양광(陽光)으로 언덕 위의 마을이 환하게 물들여져 있다. 그러나 양광은 명멸하며 먹구름과 양광 하늘과 대지의 화면에 넘치는 극적인 명암의 대비는 그림에 신비감마저 부여하고 있다.

       

       

       

      K-7.jpg

       

       十戒 석판을 깨는 모세

      MOSES WITH THE TABLE OF THE LAW

      1659년 캔버스 油彩 168.5×136.5Cm

      西베를린 국립미술관

       

       

       

       

       

      K-8.jpg

       

       

      성가족(聖家族)

      THE HOLY FAMILY(WITH ANGELS)
      1645
      캔버스 油彩
      117×91Cm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쥬 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는 <聖家族> 주제를 소묘, 에칭, 유화에서 줄곧 되풀이해 그렸다. 1630 초기에는 다분히 루벤스풍의 성화(聖畵) 연상시키는 것이었으나, 40년대 후반기의 작품은 종교화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밀한 일상적 가족의 정경을 그린 것처럼 느끼게 한다. 1642 , 사스키아의 사후(死後) 헨드리키에가 렘브란트가() 들어와 자리잡는 40년대 말까지, 렘브란트는 가정적으로 매우 불우했다. 까닭에 그는 한층 가정적인 행복이라는 테마에 이끌렸던 것이다. 책을 읽다 말고 잠시 모친은 자애로운 눈길을 갓난아기에게 돌리고, 뒤켠에서는 요셉이 목수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왼쪽 위로부터 천사가 날아 내려오고 있음으로 해서 일가가 성가족(聖家 )임을 나타내고 있다. 어린 그리스도의 오른팔, 성모의 책과 얼굴, 내려오는 천사들에게 비쳐진 광선 효과의 연결은 괄목할 만하다.

       

       

      Rembrandt 2.jpg

       돌아온 탕자 - 램브란트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외지에 나가 방탕하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인데요..

      아버지의 두 손을 자세히 보세요..

      왼 손과 오른 손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지요.

      아버지의 자상한 손과..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모든 것을 용서하는 듯한

      아주 감동적인 사랑을 느끼게  하는 그런 작품입니다.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은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이다. 일반적으로 그는 유럽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이기도 하다.[1] 예술 분야에서, 그의 기여는 역사가들이 소위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게 하였다. 생애

      렘브란트는 1606 7 15 암스테르담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레이덴에서 방아간 주인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학교를 나온 후, 렘브란트는 14세에 레이덴 대학교에 입학 하였다. 렘브란트가 학교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야콥 판 스바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h)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하였다.

      1625년 개인 화실을 연 직후,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지도를 받으면서 미술에 관한 시야를 넓혔으며, 이를 계기로 1632 거처를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게 되었다.

      1642 <야경>을 제작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극히 나쁜 평을 받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아내마저 죽자, 실망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작품에 정열을 기울였다. 1656년 파산 선고로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끼니마저 굶는 만년의 비참한 생활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그림을 제작하였다.

       

      [편집] 작품의 특징

      유화, 동판화 (에칭), 드로잉 작품들이 남겨져 있고, 자화상을 특히 많이 그렸다.

      그는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로 그의 굳은 신념은 두터운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특히 종교화에 있어서 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작품 수는 2천여 점이나 된다. 성서·신화·역사·풍경·풍속·위인 등 각 방면에서 광범위하게 소재를 구하였다. 그의 작품은 그 대상에 대하여는 사실적 수법을 쓴 다른 네덜란드 파의 화가와 다름이 없으나, 빛의 효과에 있어서는 색채 명암의 대조를 강조함으로써 의도하는 회화적 효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결과로 그는 '근대적 명암의 시조'란 이름을 듣게 되었다. 또 그는 북부 유럽 동판화의 대가로서 약 300점의 걸작을 남겼으며, 이 동판화만으로도 그는 세계 미술 사상 최대의 화가로 인정된다. 에스파냐의 벨라스케스와 벨기에의 루벤스와 함께 17세기 최대의 화가로 손꼽히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작품으로 <자화상> <마리아의 죽음> <성 가족>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렘브란트의 그림의 특징은 시대의 관행을 뛰어넘어, 개성을 발휘했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야경의 경우 얼굴이 모두 나온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는데, 이는 모두 얼굴이 나오게 하는 단체 인물화가들의 관행을 뛰어넘은 것이다. 성서를 주제로 한 성화들도 성화(이콘)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하고 거룩한 느낌 대신, 인물들의 심리를 담아내는 심리묘사가 특징이다. 이를테면 구약성서족장설화중 하나인 아브라함이 첩 하갈과의 사이에서 낳은 큰 아들 이스마엘과 그의 어머니를 버리는 장면을 그림으로 묘사하면서, 아브라함의 고뇌와 정실부인인 사라의 뿌듯함을 아브라함은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사라는 숨어서 웃는 모습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작품 해설 출처: <위키백과>에서

       

       

      Splendor in The Grass

                                       William Words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ArtGalle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하 명산 금강산과 묘향산 풍경화  (0) 2010.03.26
Mary Sorrows Hughes   (0) 2010.03.25
Daniel Sannier 의 그림  (0) 2010.03.24
[화가들이 그린 키스]   (0) 2010.03.24
아름다운 봄/Jim Mitchell의 풍경화 감상  (0) 201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