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여사 피격날의 박대통령
육여사 피격날의 박대통령 | ||
월간조선 90년 12월 연재 - 김두영(전 청와대비서관) 나는 박대통령을 1961년 여름에 처음 보았다.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홍수가 났다.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의장은 수해지역 시찰차 영주에 내려왔다. 첫 인상에 눈빛이 매우 형형했던 박대통령은 현장에서 항구적인 대책을 지시, 영주시내를 관통하고 있던 하천의 흐름을 공병장비로 산 허리를 잘라 시외로 돌려 놓도록 한 것이다. 지금 시내의 그 하천터는 택지로 변해 있고, 그 뒤로는 물난리가 없었다. 그때 대학 휴학생 이던 나는 현장을 누비는 한 지도자의 결단과 안목에서 큰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나는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에 청와대에 들어갔 다. 75년까지는 대통령 직속인 제2부속실 행정관으로 일했다. 제1부속실은 대통령을, 제2부 속실은 대통령부인을 모시는 기구였다. 육영수여사 서거 후에는 공보비서실 행정관, 사정담 당 비서관으로 일했고 5공화국 때는 정무 제2비서관, 국정자문회의 사무처장, 6공화국에 들 어서는 구성이 되지 못한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차장으로 있었다.
올해의 10월26일은 박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두 번째의 10년이 시작된 첫돌이었다. 첫 10년 동안 박대통령은 찬사보다는 비판을 더 많이 받았다. 생존시의 통치방식에 대한 사후의 반 작용으로서 불가피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이 10년 동안 박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분을 변호할 수 없는 분위기도 있었다. 박대통령을 가장 가깝게 관찰했던 분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에 진행된 박대통령 격하 또는 재평가작업은 왜곡된 사실에 근거한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한 가족처럼 박대통령 내외를 모시면서 두 분의 인간적 면모를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었다. 자연히 두 분에게 호의적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지만 그런 나의 박정 희·육영수여사관(觀)도 사실적인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것 같아 두분의 인간적인 면모를 중심으로 단편적이나마 글을 하번 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박대통령의 인간적인 면이 가장 집약적으로 그리고 극명하게 드러난 경우가 육여사 피격사건 때였다는 생각이 든다. 1974년 8월15일의 육여사 피격장면을 나는 관사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보게 되었고 육여사가 피격되었다는 긴급연락을 받고 곧 서울대학 병원으로 달려갔다. 육여사는 국립의 료원을 거쳐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옮겨져 있었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여사는 의식불명상태에서 헉,헉하는 불규칙적인 호흡소리를 내고 있 었다. 한 20분쯤 육여사가 응급처치를 받고 수술실로 옮겨진 직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의과대학장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뒤에서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의 박대통령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핏기가 가시고 검은 얼굴은 샛노랗게 변해있었다. 무서운 인상이었다. 박대통령은 의사들에게 『최선을 다해주시오』라 고 단단히 부탁하고는 대통령전용 입원실로 올라갔다.
김총리는 신부장에게 『이것은 한사람이 한 짓이 아닐 것이다. (박대통령이 시승식에 참석 하게 돼 있었던)청량리와 영등포 전철역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박대통령은 수술 도중에 수술실로 내려와 의사로부터 『어렵겠다』는 보고를 받고는 오후 4시쯤 청와대로 들어갔다. 육여사는 저 ?7시쯤 운명했다. 육여사에 대한 수술이 시작될 무렵에 갑자기 하늘이 노래 지면서 건물벽과 마당의 색깔이 오렌지색으로 변하던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고, 일부 신문 에도 보도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나중에 경호원들로부터 저격당시 국립극장에서 박대통령이 취한 행동에 대하여 소상 히 들을 수 있었다. 총성이 나자 박대통령은 연설대 뒤에서 몸을 낮추었다. 경호원들이 옆에 붙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순간에도 경호원들이 청중석을 향해 사격을 할 때의 유혈극을 걱정하고 있었다. 육여사가 피격당한 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도 박대통령이었다. 경호원에게『저기 우리 식구하테 가봐!』라고 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은 『연설을 계속하겠습니다』라면서 8·15 경 축사를 다시 읽기 시삭하였다. 총성으로 중단되었던 귀절 바로 뒷문장을 정확히 짚어내 읽 어갔다. 퇴장할 때 박대통령은 육여사의 고무신과 핸드백을 자신이 직접 주워 갖고 나오다 가 경호원에게 넘겼다. 박대통령은 독립유공자들을 위로하는 리셉션장에 들러 공식행사를 끝낸 뒤 서울대 병원으로 갔던 것이다. 박대통령은 그 위기의 순간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담하면서도 세심하게 처신하였다. 공인 과 사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박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는 너무나 인상적이었으며 보는 이에 따라 가슴을 아프게 했다. 박대통령을 평하기를 「청탁을 같이 들이마시는 사람」「작게 치 면 작게, 크게치면 크게 울리는 큰북 같은 분」이라고 한 말이 있었다. 박대통령은 담대해야 할 때는 무섭게 담대하였고, 자상해야 할 때는 자상했으며, 슬플 때는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 던 분이었다.
나는 『각하 들어가시지요』라고 하면서 대통령 집무실로 모셨다. 육여사의 유해는 대접견 실로 다시 옮겨져 빈소가 차려졌다. 5일장이었다. 박대통령은 매일 새벽에 2층 침실에서 내 려와 분향을 했다. 그때 프랑스에가 있던 근혜씨는 장례식 3일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박대통령은 직접 공항으로 마중 나가 딸을 태우고 들어오면서 차내에서 전후사정을 설명하 였다. 청와대 본관 앞에서 발인제를 올리는데 박대통령은 앞에서 절하는 지만군의 상복에 실밥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으로 감아 당겨 끊어주었다. 박대통령은 불규칙적인 것이나 비정상적인 것은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분이었다. 박대통령은 청와대 정문의 옆문을 부여잡고 운구 행렬이 경복궁을 돌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 유명한 장면을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직접 카메라에 담았었다. 신직수 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모시고 본관으로 올라왔다. 대통령은 손수건을 꺼내 코를 팽 푸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텔레비젼을 통해서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이튿날 박대통령은 아침에 집무실로 츨근하자마자 인터폰으로 나와 함께 육여사를 모셨던 제2비서실 직원들을 불렀다. 대통령은『내자가 저렇게 되었으니 얼마나 비통하겠는가. 2부속 실 직원들을 제일 먼저 부른 이유는…』하고 지시를 내렸다. 『내자가 하던 일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하겠으니 항목을 정리해 올려라』 나는 그날 육여사가 하던 일-나환자촌 지원, 양지회 운영, 민원처리등의 항목을 표로 만들 었다. 비고란에는 「이것은 각하가 맡으심이 좋겠음」 「이것은 근혜양이 하는 게 좋겠다」 는 식으로 의견을 붙였다. 거의가 박대통령이 직접 맡아 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박대통령은 리스트에다가 매 항목마다 「동의함」이라는 의견을 적어 내려 보냈다. 육여사의 서거 이후 박대통령의 집무방식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2층 내실로의 퇴근이 좀 빨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대통령은 자신이 퇴근하지 않으면 청와대 직원들이 퇴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일단 2층으로 물러갔다가 밤중에 다시 집무실로 내려와 일을 보는 수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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