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우리가 물이 되어, 1986년)
강은교.
독립운동가 강인택(姜仁澤)의 딸.
함부로 가 닿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언제든지 어느 외진 길거리를 생각하기만 해도
저만치 앞서 걷고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러다 누군가 부르면 외면하지 않고
그때마다 긴 머리를 출렁이며 뒤돌아보아줄 것 같은 사람.
서점에 가면 언제나 서가 근처에서
책 한두 권을 빼보며 그렇게 서 있을 것만 같은 사람.
강江은, 교橋.
리버 이즈 브리지. 말장난. 강은 다리라는 뜻이래,
하고 불현듯 농담을 건네고 싶은 사람.
강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싶지 않아서
제 몸 위에 다리를 얹고 있지만,
사실은 강이란 이 고장에서 저 고장으로
사람과 물산(物産)을 길게 연결하는 기다란 다리 역할을 한다.
시(詩)도 그와 같아서 강 위에 얹힌 다리처럼
우리로 하여금 제 모습 비추며 물위를 걷게 하기도 하고,
진실로 시도 그와 같아서 우리로 하여금
강과 더불어 가는 물이 되게도 하는 것이다.
강은교. 강이 곧 다리래. 시도 그와 같대.
'사는 게 그런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는 몇 살부터인가?'
라고 물어보고 싶은 시인.
그의 부친 강인택 선생은 피난 시절에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했고,
일제 때는 민립대학 건립을 추진하고, 춘산(春山)이라는 필명으로
《개벽》지에 천도교에 대해 논문을 연재하기도 했으며,
잠시 《조선일보》 기자도 했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부산 바다의 빛깔, 바람, 햇빛, 파도가
나의 시를 다시 살렸다'는 강은교 시인.
어깨 너머로 넘어가는 파도소리와 바람 앞에서
'머리가 다 시원해진다'고 말하는 시인.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발레리의 바람은
강은교 식으로 '생이 다 시원해진다'는 바람이었다.
바닷바람은 해변 쪽으로 쏴-하는 파도 소리를
한 치도 흐트러짐없이 계속 실어나르고 있고
강은교는 '부산의 바다 덕에 내 시가 살아났다'고 했다.
'모래구멍 속에서 게들의 날개 휘날리기 시작!/
들썩거리는/
아,/
세계의 게들//
누가 바람의 무릎에 올라앉는다/
버려라,버려라//
우리는 짐을 버리기 시작한다'
('일몰' 중에서).
그는 92~98년 송도 바다를 바라보면서,
98년부터는 다대포 바다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 기간 그의 시들은 짐을 버리기 시작했고 밝아졌다.
그의 시 '천개의 혀를 위하여'에서 보이는
'그는 평생동안 5296개의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라는
어법을 빌리면 바다는 그 꿈의 숫자보다 많은 해의 빛깔,
파도의 색깔, 바람의 냄새, 물빛 이야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는 그 바다 앞에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박수와 종소리는 그 스파크의 한 종류이다.
매일 이른 아침 열번째 무덤에서 끝나는 코스를 잡아
몰운대에 이른다는 그는 '해가 떠오르면 박수를 친다'고 했다.
몰운대에 가지 못할 땐 23층의 아파트에서 그는 종을 친다.
손바닥이 치는 종소리가 박수이고 종소리는 종이 울려내는 박수인 듯.
그 종소리의 울림 속에서 그는 햇빛 한 올을 집어든다.
'햇빛 한 올을 집어들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거기에 네가 있다'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ㄷ―너' 전문)
이어 그는 다대포의 한 일몰을 떠올렸다
'언젠가의 일몰은 기억에도 선연해요.
커다랗게 둥그런 시뻘건 해가
'살(肉)'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떨어지고 있었어요.'
바다가 돌려준 그런 감수성으로 그는
'수천년 시간의 때가 끼어있는 언어의 얼굴을 깨끗이 씻기'를
시의 갈 길로 삼게 되었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빗방울 하나가. 5'중에서).
또 어떤 빗방울은 23층의 아파트를 휘청거리게 한다.
'빗방울 하나가/
창틀에 터억/
걸터앉는다//
잠시//
나의 집이/
휘청―한다'
('빗방울 하나가.1' 전문).
몰운대는 다대포 바다의 끄트머리에
육지의 여운처럼 띄워져 있다.
몰운대가 구름 속에 빠지는,
그러니까 '몰운(沒雲)'하는 것은 안개 때문이다.
그 안개는 길게 길게 흘러온 낙동강이 바다 앞에서
육지의 여운처럼 피어올린 것이다.
인근 낙동강 하구의 모래섬들,
섬이었던 몰운도가 몰운대가 된 사연 또한
육지의 여운같은 강의 모래로 인해서이다.
그 여운의 바닷가에 서서 강은교는
생이 다 시원해지는 여운의 바람 앞에 서 있다.
발레리의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구절은
'바람이 분다, 써야겠다'는 여운을 남긴다.
시인 강은교는
1945년 함남 홍원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등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으며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그대는 깊디깊은 강>, <벽 속의 편지>,
<어느 별에서의 하루>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이 있고,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다.
2011년 부산 동아대 한국어문학부 문예창작학과 교수직을 퇴임했다.
*
꾸역꾸역 살아온 삶.
인생과 문학에서 끊임없이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
문학은 문학이고 삶은 삶인 줄 알고 근사한 시를 쓴다고 여겼지만
결국 돌아보면 후회도 되고 삶을 제대로 못산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꾸역꾸역 삶을 살아왔다.
*
돌아보면 삶은 커다란 사진 한장이었다.
인생에서 (인상깊은) 사진 몇장 남기기 위해
답을 찾는 과정이 됐으면 좋겠다.
*
문학이 가십, 소문, 스팸메일, 패션이 되는 세상이 됐다.
내 문학이 보잘 것 없지만 진한 뼛국물이 우러나는 그런
시, 문학이 됐으면 좋겠다. 패션이 아닌 문학을 하기 위해선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끼고, 더 잘 감동해야 한다.
*
마중물이 필요하다.
마중물은 펌프질할 때 맨 처음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말한다.
내가 던지고 싶은 물 한 바가지.
그 한 바가지 물에 의해 보다 깊이 숨어 있던
지하의 물은 쏟아져 나온다.
-강은교의 고별 강연에서...-
편 지
편지 하나 날아왔습니다.
[유니세프]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긴급지원 요청-레소토 어린이를 위한 담요수송작전
나는 그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5만명의 어린이가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매달 수백명 의 어린이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덮고 잘 변변한 담요 한장이 아쉽다는 것은
상상하시기 어렵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고통을 받고 있다.
매달 수백명이 죽고 있는 상황, 덮을 이불이 없음
나는 그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죽고 있다? 그런데 덮을 이불이 없다?
이불들이 구름에 실려 도시의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내 살이 이불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기도했습니다.
이불을 위해서 고통을 위해서 이불에 서리는 식은 땀을 위해서...
긴급지원 요청-이불이 없음, 뼈가 없음, 덮을 구름이 없음, 뿌릴 눈물의
씨앗이 없음, 황폐한, 황폐가 우리의 이름임, 우리가 보낼 수 있는 것임,
황폐에 뿌릴 소금이 없음, 소금인 사람 하나가 없음...
편지 하나 날아왔습니다.
철수가 영이에게 보낸 편지같은, 노오란 편지 하나...
편지 하나 날아왔습니다.
편지에는 구름이 그려있었습니다.
내가 구름이라고 생각한 것이, 구름은 없고, 구름 속의 해도 없는.
나는 그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였습니다.
부산 다대포, 몰운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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