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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문물

죽음의 장진호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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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長津湖 戰鬪 Battle of Chosin Reservoir)

 

개마고원 장진호에서 미군 1개 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과 맞서 싸워 흥남부두 피난을 도왔던 장진호 전투를 아십니까?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 1사단이 1950년 11월 27일부터 2주간 개마고원 근처 장진호에서 7개사단 규모의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 위해 벌인 전투입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10배를 훨씬 넘는 중공군 대 병력의 남하南下를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을 2주간이나 지연 遲延시켰으며,

 

중공군의 포위망包圍網을 뚫고 마지막 관문인 황초령(黃草嶺 장진호 입구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과 함주군 하기천면 사이에 있는 고개 1,210m)을 차단 포위한 중공군도 격멸, 와해시키고 죽음의 함정陷穽을 탈출하였고, 흥남에 도착, 흥남 부두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12월 9일에는 사령부로 부터 10군단 전 병력은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12월 10일 6시 선두부대가 함흥에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12월 11일 저녁까지 후위 부대 전부가 함흥으로 철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남 부두에서 14일 부터 24일까지 전설적인 해상 퇴각이 벌어지는데 무려 민간인 10만과 UN군 12만이 겨우 백수십척의 배로 탈출하는 전설의 흥남 철수 작전이 이루어지지요.

이 전투의 결과로 전사 3637명, 비전투 사상 3657명을 기록했고 중공군 또한 부상 12500명, 전사 25000명으로 부대 자체가 무력화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덕분에 초기 중공군 계획대로 흥남까지 밀고 내려간다는 것은 좌절될 수 밖에 없었지요. 또한 이런 심각한 타격으로 인해 미8군까지 기사회생 할 수 있었고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침낭 속에서 잠을 자는 것도 연속된 공격으로 쉽지 않았고 혹여 쉬더라도 침낭 자크를 잠그는 일은 금지되었었습니다.

또한 이 전투의 치열함은 최고 등급의 명예 훈장 (Medal of Honer) 수상자가 131명인데 그 중에 해병대 수상자가 46명이고 그 중에서 장진호 전투로 수상한 자가 13명이 되니 이 며칠의 싸움이 얼마나 무시무시 했는지를 알려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장진호 전투로 미군 7200여명이 희생되고 중공군은 미군의 10배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당시 흥남에서 1만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항해한 빅토리아호는 전세계인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출처-시스템 클럽

글쓴이-: 東素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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