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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Aria,Chorus 1

구노 / 로미오와 줄리엣 中 아! 꿈속에 살고 싶어라




Ah! Je veux vivre from 'Romeo & Juliet'


구노 / 로미오와 줄리엣 中 아! 꿈속에 살고 싶어라


Gounod, Charles Francois (1818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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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 Je veux vivre' from 'Romeo & Juliet'

Maria Callas

로미오와 쥴리엣 Roméo et Juliette 제1막.

Ah!
Je veux vivre
Dans ce rêve qui m'enivre;
Ce jour encor,
Douce flamme,
Je te garde dans mon âme
Comme un trésor!

Cette ivresse
De jeunesse
Ne dure, hélas! qu'un jour!
Puis vient l'heure
Où l'on pleure,
Le cœur cède à l'amour,
Et le bonheur fuit sans retour.

je veux vivre, etc.
Loin de l'hiver morose
Laisse-moi sommeiller
Et respirer la rose
Avant de l'effeuiller.

Ah!
Douce flamme,
Reste dans mon âme
Comme un doux trésor
Longtemps encore!

아! 나는 살고파라
나를 취하게 만든 이 꿈속에서
오늘도 또한,
달콤한 불길이여,
나는 당신을 나의 영혼안에 간직하네
마치 하나의 보석처럼!

이 취기
젊음은
단지, 아, 하루만 지속되네!
그리고 때가 오리
우리가 눈물을 흘리는 때가,
마음이 사랑에 양보하네,
그리고 행복은 달아나네 돌아오지 않고.

나는 살고파라,
우울한 겨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놔두오 내가 잠자도록
그리고 냄새를 맡네 한송이 장미를
꽃잎 따기 전에

아!
달콤한 불길이여,
머물러라 나의 영혼안에
마치 한 달콤한 보석처럼
오래 오래!

마리아 칼라스 (Maria Callas 1923 - 1977)

마리아 칼라스는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1937년 부모의 이혼으로 인하여 어머니와 함께 그리스로 되돌아왔으며 이듬해부터 아테네의 국립 콘서바토리에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1945년까지 그리스에서 착실한 경력을 쌓아가다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스가 소란스러워지자 다시 미국으로 아버지를 찾아 돌아온다. 이해 겨울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오디션을 받았지만 탈락하게 된다. 그후 힘들게 얻어낸 계약도 기획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또다시 좌절에 빠지지만 그 기획사의 멤버이기도 했던 베이스 가수 레메니의 소개로 1947년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La Gioconda"를 부를 기회를 잡게 되어 6월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온다. 이때 부유한 이탈리아 사업가 지오반니 파티스타 메네기니를 알게된다. 8월 2일 이탈리아 데뷰 공연을 세라핀의 지휘로 갖게 된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음에도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해서 추가 계약은 맺어지지 않았지만 그해 12월에 이탈리아어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을 부르게되고 푸치니의 "투란도트"중 타이틀롤로 재계약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

1949년에는 이탈리아 벨칸토 레파토리를 부르는 소프라노로서의 중대한 전환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지휘자 세라핀의 강력한 고집으로 마카레타 카로시오가 맡았던 "I Puritani"에서 엘비라역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그해 4월 21일에는 메네기니와 결혼하게되고 남편으로서 그리고 매니저로서 메네기니의 도움을 받아 2년간 이탈리아와 유럽등지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결국 칼라스는 1951년 라 스칼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시즌 개막공연을 시작으로 1958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맡게된다. 그녀는 곧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같은 벨칸토 레파토리로 옮기기 시작함으로써 수년동안 무시당했던 많은 오페라의 레파토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드디어 1952년 6월엔 EMI사와 전속 계약을 맺게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죠반니"중의 돈나 안나의 아리아 "Non mi dir"를 테스트로 녹음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칼라스는 뚱뚱하고 덩치 크고 껑충해서 외모는 그리 매력이 없었는데 1954년 극히 짧은 기간만에 30kg을 감량하는 데 성공해서 그녀의 외모는 타인이 알아보기 힘들만큼 급격히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발목만은 여전히 굵은 편이어서 칼라스는 발목이 드러나는 차림은 피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1956년엔 과거 그녀를 오디션에 탈락시켰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 "노르마"를 부름으로 해서 최초로 서게되고 "토스카"와 "루치아"도 공연하게 된다.

1957년엔 베니스의 한 파티에서 메네기니와 칼라스 부부는 후에 칼라스의 연인이 되게 되는 그리스의 선박 재벌 오나시스를 처음 만나게된다. 1958년은 칼라스에게 많은 사건이 터지는 해라고 기억된다. 1월엔 이탈리아 대통령이 참석했던 "노르마"의 로마에서의 갈라 콘서트에서 1막이후 갑자기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퇴장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때문에 언론에 호된 지탄을 받게된다. 또한 그해 5월엔 라 스칼라의 감독 기링겔리와 말다툼후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다시는 라 스칼라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된다. 11월엔 메트르폴리탄에서도 해고된다. 하지만 12월 19일에 파리에서 갖은 데뷰 갈라 콘서트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킬만큼의 대성공을 거두게된다. 이때 청중속에 있던 오나시스는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한다. 결국 이듬해 6월 메네기니 부부는 오나시스의 요트에 초대받게되고 항해가 끝나갈 즈음엔 칼라스는 오나시스의 연인이 되어있었으며 메네기니와의 결혼생활은 끝나버리게 된다.

1960년부터 61년까지 그녀는 무대에 서는 것은 포기하고 오나시스와 함께 화려한 상류생활을 즐기는데만 집착한다. 제피렐리의 설득으로 1964년부터 코벤트 가든에서의 "Tosca"를 시작으로 다시 무대에 서게된다. 이당시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전성기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공연들은 대성공을 거둔다. 점점 목소리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한 칼라스는 의사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5일 코벤트 가든에서 로얄 갈라 콘서트를 열게되는데 이것이 오페라 가수로서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된다.

은퇴한 칼라스는 1966년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다시 그리스 국적을 가짐으로 해서 메네기니와의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한다. 오나시스가 그녀와 결혼해 줄것을 기대했으나 관계가 멀어져가던 오나시스는 1968년 J.F.케네디 미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결혼해버린다. 칼라스로서는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게된 것이다.

1971년과 72년, 칼라스는 뉴욕의 줄리어드 스쿨에서 일련의 마스터 클래스를 연다. 또한 그녀의 옛동료이자 만년의 연인이자 친구가 된 주세페 디 스페파노와 재회한다. 1973년 스테파노는 그의 딸의 치료비를 위해서 마리아를 설득해 전세계 투어를 그와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이 공연은 74년까지 계속된다. 1974년 11월 일본 사포로 공연을 끝으로 스테파노와의 공연은 끝이나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공연이 된다. 이로써 스테파노와의 관계도 끝이 나게된다. 1975년엔 오나시스가 죽게되고 칼라스는 1977년 9월 16일 54세의 나이로 그녀의 아파트에서 홀로 죽을때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은둔하게된다.

Gounod, Charles Francois(1818. 6. 17. - 1983. 10. 18.)

파리 태생인 프랑스의 작곡가. 부친은 훌륭한 미술가(석판화가)였는데, 구노가 5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다행이 교양이 높은 모친에게 문학, 미술, 피아노를 배우고, 1836년 18세 때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여 대위법과 작곡법을 배웠다. 21세 때 칸타타 <페르낭>에 의해 로마 대상을 획득하여 3년간 로마에 유학했다. 로마 체재 중에는 신학에 관심을 나타냈고, 교회음악을 연구했다.

1851년에 <장엄미사>를 발표했고, 그해에 가극 <사포>를 작곡해서 가극 작곡가로서의 첫걸음을 내디뎠고, 1858년에 <벼락치기 의사>, 1859년에는 대작 <파우스트>가 리리크 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고, 당대일류의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어 1867년에는 베를리오즈의 영향을 받고 작곡한 대작 <로미오와 줄리엣>을 발표했고, 이 무렵부터 구노의 창작은 종교적인 작품에 기울어져, 오라토리오 <속죄>, <삶과 죽음> 등의 명작을 낳았다.

한편 1870년 52세 때 보불전쟁이 일어나 파리를 떠나고, 1875년까지 런던에 머물면서 지휘자로서도 활약했다. 이곳에서 구노 합창단을 조직하여 앨버트 협회 합창단(왕립 합창 협회) 의 기초를 세웠다. 가극작품 이외에도 <세레나데>나,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 제 1번에 가락을 붙인 <아베마리아> 등의 소품도 유명하며, 또 후의 프랑스 가곡에 기여한 가곡분야에서의 업적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구노의 작품은 서정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장엄함을 가지며, 높은 품위와 아름다운 시정이 사람들로부터 애호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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