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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광복은 내게… 지긋지긋한 솔뿌리캐기 안해도 됐던 것"

입력 : 2015.01.01 03:00

[1[ 1945년 8월 15일 그날

-유종호 예술원 회장의 그날
극소수 빼고 누구도 짐작못해 "올줄 알았다"는 말은 다 거짓


	유종호 예술원 회장은“광복 직후 미군정청에서 만든 30쪽짜리 책자로 한글을 처음부터 익혔지만, 정작 학생들은 출석을 부르면‘네’대신에‘하이’를 연발하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고 했다.
유종호 예술원 회장은“광복 직후 미군정청에서 만든 30쪽짜리 책자로 한글을 처음부터 익혔지만, 정작 학생들은 출석을 부르면‘네’대신에‘하이’를 연발하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문학

 

 

 

 

 

 

 

 

 

 

 

 

 

 

 

 

 

 

 

평론가 유종호(80) 예술원 회장의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70여년 된 흉터가 있다. 증평초등학교 입학 이듬해인 1942년, 일제는 여름철 등교 때마다 풀을 베어오게 했다. 비료가 부족하던 시절, '퇴비 증산(增産)'을 내걸고 학급마다 경쟁을 시킨 것이었다. 당시 소년은 서툰 낫질에 새끼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소년이 짊어져야 하는 부담도 늘었다. 가장 괴로운 건 관솔과 솔뿌리 채취였다. 고질적인 자원 부족에 시달리던 일제는 소나무 뿌리를 가열해서 짜낸 송근유(松根油)를 얻기 위해 전국의 학교를 닦달했다. 나무가 없어 붉은 산 일색이던 증평에서 소년은 여름방학 내내 가마니를 들고 땀 흘렸지만, 한 바구니가 고작이었다. 1945년 당시 열 살 소년 유종호에게 광복이란 무엇보다 "지긋지긋한 솔뿌리 캐기나 방공호 파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충북 충주에서 태어난 그에게 광복의 소식을 처음 전해준 건 이종 사촌 누이였다. 8월 15일 오후 시내에서 돌아온 누이는 "일본이 항복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다음 날 학교 조회에서 교장 선생님은 "전쟁이 끝나고 방공호를 파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엊그제까지 일제의 승전을 목청 돋우며 이야기하던 교장 선생님은 갑자기 독립과 해방 같은 생소한 단어를 썼다. 그날 하굣길엔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저씨들이 "좋다! 좋아!"라며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17일이 되어서야 학생들은 사괘(四卦)가 빠진 채 붉고 푸른 원형만 그린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하는 애국가도 난생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곡조(曲調)는 안익태 작곡이 아니라 "오랫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로 시작하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이었다. 그는 "극소수 지식인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짐작하거나 대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광복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후대의 말은 대부분 거짓"이라고 했다.

광복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그는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보여줬다. 1944년 경성제대 의학부(지금의 서울대 의대) 일본인 교수가 썼던 '조선의 자연과 생활'이었다. 누런 표지를 펼치니 '조선 반도의 실명(失明) 양상(樣相)'이라는 장에는 당시 시각장애인이 2만명에 이르렀던 반면, 안과 의사는 20명에 불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 회장은 "가난이란 단지 배를 곯는 것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까지도 온몸으로 감내해야 하는 것"이라며 "우리 세대에게 광복이란 절대적 가난과 궁핍으로부터의 탈출을 뜻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