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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탈환은 한국군이 앞에 서겠다" 미 1군단장을 설득해 작전명령서를 수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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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탈환은 한국군이 앞에 서겠다" 미 1군단장을 설득해 작전명령서를 수정하다

  •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E-mail : q5423q@hanmail.net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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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1.0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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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우야 잘 자거라

실망스런 작전명령서

마이켈리스 대령이 우리 1사단을 방문하고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당시 미 1군단 사령부는 대전에 있었다. 우리 1사단의 사령부가 있던 청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그곳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10월 5일 쯤이었다. “군단 사령부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나는 당시 미 포병 여단에 있던 경비행기 한 대에 올라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지프로도 이동할 수 있는 거리였으나, 시간과 안전 등을 생각해 비행기로 날아갔다. 미 1군단 사령부는 대전에 있던 충남도청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간이 비행장에 내려 미군 장교에게 내 신분을 밝힌 뒤 지프를 한 대 빌려 타고 대전의 충남도청에 도착했다. 사령관 집무실은 2층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곧장 직행했다. 그러나 프랭크 밀번 군단장은 자리에 없었고, 대신 참모장인 밴 브런트 대령이 나를 맞았다.

그가 내게 불쑥 건넨 것은 작전 명령서였다. 매우 두툼했다. 얼른 봐도 200쪽이 넘는 분량의 두터운 문서였다. 브런트 참모장은 “미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과 24사단장 존 처치 소장, 영국군 27연대장 바실 코드 준장은 벌써 이곳에 들러 작전 명령서를 수령해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거의 마지막으로 받아드는 작전 명령서였다.

나는 다급한 심정으로 그가 건넨 작전 명령서의 봉투를 열어 문서를 꺼내 읽었다. 우선은 평양 진공 계획이 작전 명령서의 핵심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아, 이제 평양으로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만감이 교차했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벌어진 전쟁, 전세를 뒤엎은 우리가 이제 통일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맹렬한 공세를 물리친 국군이 북진 길에 나섰다.
낙동강 전선에서 적의 맹렬한 공세를 물리친 국군이 북진 길에 나섰다.
명령서 앞부분 몇 장을 넘기자 우선 작전 지도가 눈에 띄었다. 점점 내 마음이 헝클어지고 있었다. 작전 지도는 경의선 축을 따라 평양으로 가는 부대로 미 1기병사단, 그 우익의 구화리와 시변리, 신계와 수안 등을 거쳐 평양으로 진격하는 부대를 미 24사단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1사단은?’이라는 생각으로 내 눈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에 들어온 국군 1사단 공격로는 평양을 향하지 않았다. 미 1기병사단의 좌익으로 나서서 황해도 내륙지방을 거쳐 진남포를 향해 진격하도록 짜여 있었다.
나는 서울을 향하는 진공로에서 미 1기병사단이 우리를 앞서 나가는 것은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다음의 공격 목표인 평양을 지향하면서 우리가 빠진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대한민국 군대에 몸을 담고 있는 군인으로서, 다부동과 가산~팔공산 전투에서 온몸을 바쳐 싸운 국군 1사단의 사단장으로서 그런 명령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었다.

분명히 작전 지휘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고 전선이 마구 무너지던 무렵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에서의 작전 지휘권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위임했고, 미 8군은 그에 따라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도(敵都)인 평양을 공격하는 데 우리 국군이 전혀 끼어들지 못하도록 한 명령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명령서를 바꿔 달라”

명령서를 한동안 훑어본 나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브런트 참모장을 주시했다. “군단장을 면담하고 싶다. 지금 어디 계시느냐?”고 물었다. 브런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알았을지 모르겠다. 그는 “감기가 걸려 지금 쉬고 있다. 만나기 어렵다”고만 말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반드시 전할 말이 있다. 어느 곳에 계신지만 말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브런트 참모장의 태도는 냉랭했다. 우물쭈물하면서 군단장이 있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미 1군단에 배속해 있는 한국군 1사단장이 군단장을 만나는 것도 어렵냐”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제서야 브런트 참모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밀번 군단장과 직접 통화를 하는 눈치였다. 그는 “군단장이 도청 건물 앞 밴 차량에서 쉬고 있다. 지금 그곳으로 가보라”고 말해줬다. 나는 작전 명령서를 들고 집무실을 나와 계단을 뛰듯이 내려갔다.
조그만 밴 차량이 눈에 띄었다. 지휘관이 이동할 때 사용하도록 간이침대 등이 있는 차량이었다. 나는 차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에서 밀번 군단장이 일어나면서 반갑게 맞았다. 그는 우선 내 안부를 물으면서 “낙동강 전선 돌파를 지금에나마 축하한다”면서 침대 옆에 있던 위스키 병을 들어 한 잔 따라 내게 건넸다.

나도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청주에 있던 우리 1사단 사령부를 떠나면서 챙겨온 소련제 권총이었다. 북한군 장교들이 휴대했던 것으로 전선의 사병들이 적으로부터 노획한 권총이었다. 밀번은 웃으면서 권총을 받았다. 용건을 꺼내기 전에 벌인 일종의 ‘의례(儀禮)’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이 서울 외곽에 들어선 뒤 조심스레 공격을 펼치고 있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군이 서울 외곽에 들어선 뒤 조심스레 공격을 펼치고 있다.
그 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방금 브런트 참모장으로부터 작전 명령서를 건네받아 읽었다. 적군의 수도인 평양을 공격하는 작전 지도에 우리 1사단이 빠져 있다. 평양을 공격하는 마당에 한국의 군대가 빠진다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 내가 지휘하는 1사단이 평양을 직접 공격하도록 해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밀번은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잠시 생각에 빠지는 듯했다. 이어 그는 “제너럴 백, 귀관의 사단에 있는 트럭이 전부 몇 대냐?”고 물었다. 나는 “모두를 합치면 100대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밀번은 “그 정도의 기동력으로 주공(主攻)에 나설 수는 없다. 미 1기병사단이나 24사단은 트럭이 1000대는 넘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평양을 공격하는 작전은 시간이 중요하다. 기동력이 좋은 미군 사단이 앞장서서 길을 열어야 한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시간을 다퉈 공격에 나서야 할 입장이다. 상황이 그러니 국군 1사단을 선두에 세울 수 없다. 그런 점을 이해하고 명령서대로 작전을 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경청할 줄 알았던 군단장

그럼에도 내게 할 말은 남아 있었다. 며칠 전 우리 1사단 본대를 놔두고 청주를 오가면서 내가 생각했던 게 있었다. 평양만큼은 우리 국군이 선봉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었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명분을 내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바가 있었다. 나는 밀번 군단장을 보면서 설득을 벌였다.

“나는 평양 출신이다. 어렸을 적 대동강 물에서 헤엄을 치며 자랐던 터라 어느 곳의 수심이 얕고 깊은지 다 안다. 이 땅에서 60년 전 벌어진 청일(淸日) 전쟁 때 일본군이 평양성을 지키던 청나라 군대를 어떻게 공격했는지도 훤히 알고 있다. 이 전쟁을 벌인 북한의 수도를 점령하는데 우리 국군이 앞장서지 못한다면 우리 국민에게도 면목이 서지 않는 법이다…”는 내용을 설명했다. 그러나 말은 다 맺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어느새 앞을 가리고 말았다. ‘고향 평양’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감정이 복받쳐 올랐던 듯했다.

밀번은 내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는 앞에서 ‘내 군사 스승’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의 여러 면모를 따라 배우고자 했으면서도 내가 그로부터 받은 가장 큰 인상은 부하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한다는 점이었다. 그 때도 그랬다. 그는 잠자코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인천으로 상륙한 미 해병대가 서울 진격 도중 김포 인근에서 붙잡은 북한군 포로.
인천으로 상륙한 미 해병대가 서울 진격 도중 김포 인근에서 붙잡은 북한군 포로.
나는 내친 김에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택한 공격로와 평양성 공격의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했다. 그러자 밀번은 지도를 꺼냈다. 잠자코 지도를 들여다보던 밀번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어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제너럴 백, 좋다. 당신에게 기회를 주겠다.”

밀번 군단장은 이어 전화기를 들었다. 브런트 참모장을 호출하는 전화였다. 밀번은 전화기에 대고 “브런트 참모장, 24사단의 처치 장군 공격로와 한국군 1사단의 공격로를 서로 맞바꿔라”고 단호하게 지시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밀번은 나를 보면서 “작전 명령서를 수정할 것이다. 브런트 참모장과 다시 의논하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군단장이 있던 밴 차량을 빠져나와 나는 다시 도청의 2층으로 올라갔다. 군단장의 명령을 다시 받은 브런트 참모장의 표정은 떨떠름해 보였다. 작전이 다급하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작성해 배포한 작전 명령서를 수정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단장의 명령은 이미 내려진 상황이었다. 브런트 참모장은 “사단으로 돌아가 있으면 새로 수정한 작전 명령서를 보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입장이 달랐다. “아니다, 수정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직접 받아서 가겠다”고 했다. 브런트는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해라”면서 곧 작전 명령서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