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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이승만·김구 귀국前… 박헌영, 여운형과 손잡고 人共 선포(조선인민공화국·1945년 9월 6일) '좌파 천하'


[새로 쓰는 대한민국 70년(1945~2015)] 이승만·김구 귀국前… 박헌영, 여운형과 손잡고 人共 선포(조선인민공화국·1945년 9월 6일) '좌파 천하'

  •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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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5.01.09 03:00

    [2] 광복직후 建準·人共 득세

    -臨政요인 없는 틈타 주도권 장악
    박헌영, 좌파 파벌다툼서 승리… 남북 공산당 지도자로 급부상
    北선 10월 14일 김일성 등장

    美 군정, 人共 인정않는데다 10월 민족지도자 속속 귀국에 국민들 관심 집중되며 몰락

    "일인(日人)이 고스란히 놓고 간 주인 없는 이 나라의 모든 부(富)의 국유화 또는 균등한 재분배를 주장하는 것은 응당 문화인의 양심이고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좌익 노선만이 성취할 수 있고, 그 노선을 좇는 자만이 양심적인 문화인의 자격을 향수한다고 생각했다."

    광복 당시 29세 청년이었던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은 1952년 출간한 책 '하나의 증언'에서 광복 직후를 이렇게 회고했다. 식민지 시기 얻은 부는 친일에 따른 죄악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적 세계관과 정책만이 이지러진 조국을 재건하는 유일한 지표인 듯싶었다"는 것이다. 광복 직후 한반도는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좌파 세력이 장악했다. 1945년 8월로 시곗바늘을 돌리면 불과 3년 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은 거의 기적이다.

    여운형의 건준, 공산 세력이 장악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이는 여운형(呂運亨)이다. 광복 이튿날인 8월 16일 그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여운형은 1년 전인 1944년 8월 일부 공산주의자와 함께 비밀단체 건국동맹을 만들어 광복 이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공산주의자로부터 개량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우파는 그가 공산주의자와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여운형은 "나는 마르크시스트며 사회주의자이지만 전체주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와는 다르다"고 밝혔다.

    
	(왼쪽 사진)휘문中서 열린 집회 참석한 여운형 - 1945년 8월 광복 직후 서울 휘문중 교정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여운형(사진 가운데). (오른쪽 사진)박헌영과 김일성 - 박헌영(왼쪽)이 1946년 9월 월북한 이후 김일성과 함께한 모습.
    (왼쪽 사진)휘문中서 열린 집회 참석한 여운형 - 1945년 8월 광복 직후 서울 휘문중 교정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여운형(사진 가운데). (오른쪽 사진)박헌영과 김일성 - 박헌영(왼쪽)이 1946년 9월 월북한 이후 김일성과 함께한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일보 DB
    공산주의 세력도 활발히 움직였다. 서울 종로 장안빌딩에는 18일 '조선공산당 서울시당부'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건물 이름을 따서 '장안파'로 불리는 이 조직에는 여러 공산주의 파벌이 참여했다. 전남 광주에서 벽돌공으로 은신해 있던 박헌영(朴憲永)은 19일 상경했다. 그는 당 요직을 맡으라는 장안파 제의를 거절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른바 '재건파'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력 재편을 노린 것이다. 좌파 사이에서도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산주의 세력은 건준을 빠르게 장악했다. 9월 2일 발표한 집행부 명단에서 조직·선전·치안·재정·기획부 같은 주요 부서를 공산 세력이 차지했다. 건준 부위원장으로 참여했던 민족주의자 안재홍(安在鴻)은 사임했다. 그의 자리는 허헌(許憲)이 대신했다. 유명 변호사인 허헌은 좌익 사상에 공감했으며 공산주의 지도자들과 친분이 깊었다.

    박헌영, 인공 설립 주도

    박헌영은 장안파를 소수파로 전락시키고 조선공산당 지도자로 올라섰다. 소련 후원을 업은 김일성이 10월 14일 평양에 공식 등장하기 직전까지 서울은 공산당 중앙이었으며, 박헌영은 남북 공산당 최고 지도자로 인정됐다. 조선공산당 북부5도연합은 10월 13일 '박헌영 동지께 보내는 전문'에서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영수 스탈린 동지 만세! 조선 무산계급 영수 박헌영 동지 만세!"라고 적었다.

    건준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정부 수립을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인공)도 박헌영이 주도했다. 건준 중앙집행위 서기인 이동화(李東華)는 "여운형의 동의하에 인공의 마스터플랜을 작성한 사람은 박헌영"이라고 증언했다.

    
	미국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 변화.
    인공은 표면상 우파 지도자를 안배했다. 주석으로 추대된 이는 이승만이었다.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그의 명망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구·김규식·신익희 등 임정 인사들, 김성수·안재홍·조만식 등 국내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인민위원에 포함됐다. 이는 "중국이나 베트남이 했던 통일전선 전술을 채용한 것"(스칼라피노·이정식)이었다. 겉으로는 우파 지도자를 내세우면서 실제 조직은 공산당이 장악하는 전술이다. 중앙인민위원 55명 중 39명, 후보위원 20명 중 16명이 공산당원이었다. 여운형은 훗날 공산 세력이 주도한 인공 설립을 후회했다고 한다.

    "소련의 한반도 영향력 클 것" 전망

    광복 직후 좌파가 득세한 이유는 일본이 쫓겨난 자리에 소련이 들어설 것으로 전망했던 까닭도 크다. 당시 사람들은 최근세사 경험에서 러시아·중국·일본이라는 인접 강대국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은 패전했고, 중국은 전쟁으로 피폐했다. 소련(러시아)이 한반도 정세를 규정하는 영향력을 가질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광복 이튿날인 16일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경성역에는 태극기와 적기(赤旗)를 든 환영 인파 수만명이 모이기도 했다.

    당시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며 향후 미국과 대립할 것으로 전망한 인사는 이승만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미군은 9월 9일 서울에 입성했다. 소련의 북한 진주 후 거의 한 달 뒤였다.

    미군정은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 군정장관 아널드 소장은 "38도 이남에는 오직 하나의 미군 정부만이 있다"(10월 10일)는 성명을 냈다. 공산주의 세력은 이후 유혈 시위 등으로 미군정과 충돌하며 축소·몰락의 길을 걸었다.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민족 지도자들이 잇달아 귀국해 국민 여망이 이들에게 쏠리게 된 것도 좌파 몰락의 큰 원인이다. 이승만은 10월 16일, 김구 등 임정 요인은 11월 23일 귀국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