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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 이스라엘 여군, 그들의 애국심!

골란고원, 이스라엘 여군, 그들의 애국심!

이스라엘은 남자는 3년, 미혼 여성은 2년간의 병역의무

글 | 신종태 전쟁과 평화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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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 이스라엘 여군, 그들의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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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에서 국경순찰 중인 이스라엘 여군

이스라엘 전적지 답사 중 갈릴리 호수 건너편 유대인 정착촌 내의 여행자 숙소에 머문 적이 있다. 마침 동절기인지라 그 숙소에 투숙하는 여행객은 아무도 없었다. 말이 야외 숙소이지 한국의 야외 텐트촌 수준 이다. 그곳은 몽고형 천막 몇 동과 취사시설 그리고 간단한 어린이 놀이터가 구비되어 있을 뿐. 겨우 물어물어 찾아 간 숙소에 도착하니 그 마을에 거주하는 관리인이 와서 간단한 인적사항만 확인한 후 텐트 열쇠를 건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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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 내의 야외 여행자 숙소 전경

이곳은 여행하기 좋은 계절에 가족단위 야외소풍을 올 경우 활용되는 시설인 모양이다. 그러나 필자는 골란고원 답사 목적으로 어렵게 숙소를 수소문하여 머물게 되었다. 숙소용 텐트는 최대한 보온시설을 갖추느라 애를 썼지만, 흡사 군용천막 내부와 같은 분위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군데군데 쥐똥이 쌓여있다. 간단히 내부를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니 갑자기 으시시한 느낌이 든다. 출입문의 잠금장치를 재확인 하였으나, 강한 바람이 몽고형 텐트를 뒤흔들었다. 흡사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 올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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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형 텐트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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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형 숙소 내부

다음 날 아침 관리인 나아만(Naaman.女.55세)이 방문하여 지난 밤 불편한 점은 없었느냐고 묻는다. 사실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당장 깜깜한 밤에 화장실을 찾아 가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넘어진 것부터 숙소가 너무 추웠던 것 까지. 그러나 이미 끝난 일, 오늘부터 골란 고원을 돌아보려면 이 사람에게 정보를 얻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산 넘어 산이라고 나아만에게 물으니 이 지역에는 대중교통 수단은 없단다. 별도의 안내자를 구하거나 아니면 렌트카를 빌려야 했다. 안내자의 일일경비는 대략 400세겔(미화 110달러 정도) 수준. 염치불구하고 나의 여행목적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이 여자에게 안내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겸손하게도 자신도 골란고원을 직접 돌아 본 경험은 없다며 나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는 원래 러시아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자국민 이주정책에 따라 오래 전 가족 모두가 러시아에서 이스라엘로 건너왔다. 영어뿐 아니라 러시어도 능통하다. 50대 나이가 되도록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남자친구는 예루살렘에 있단다. 결국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자신의 승용차로 골란 고원을 같이 다녀 보기로 했다.
 
갈릴리 호수 건너편의 골란고원은 원래 시리아 영토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 많은 국경충돌이 있었다. 특히 시리아의 갈릴리 호수로 유입되는 수로 차단은 이스라엘 식수원을 끊으려는 의도로 유대인 생존권과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던 중 1967년 '6일 전쟁'으로 결국 이 고원의 상당부분을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곳곳에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었다. 아울러 군사적 요충지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 지역의 전반적 지형은 대부분 평탄한 초원이나 간간히 야트막한 언덕과 해발 500-600여m 정도의 고지군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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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에서 본 갈릴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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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건너편 티베리우스 도시 전경

 골란고원을 다니다 보면 한국 최전방지역처럼 살벌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많은 병력 기동이나 장비 이동도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단지 시리아군의 전차 이동을 저지하기 위한 대전차 방벽이나 도로장애물 정도가 가끔씩 보였다. 대전차 방벽도 2-3m 높이의 길다란 흙 제방과 물을 채운 해자(도랑정도 수준)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다양한 전차전 경험이 있는 이스라엘군은 실전에서 대전차 방벽이 결정적인 방어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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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고원의 이스라엘군 대전차 장애물

전방 순찰도로 옆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에 폐기된 전차·장갑차 잔해와 고지 정상에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보였다. 나아만의 설명에 의하면 “1973년 10월 전쟁 시의 이스라엘군 GP”였다고 한다. 최대한 정상 가까이 승용차를 갖다 붙였다. 
 
작은 고지군은 조립식 콘크리트로 교통호와 엄체호가 길다랗게 연결되어 있었다. 노출된 산병호에는 녹슬은 Cal-50 중기관총이 거치되어 있었고, 교통호 내부에는 방탄헬멧, 매트리스 등 군용물품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버려진 옛 진지에 크게 신경쓰지 않은 듯 했다. 그러나 이곳은 지난 욤키브르(1973년 10월) 전쟁 시 시리아군 공격을 28명의 이스라엘군이 3일 동안이나 저지한 격전지였다고 한다.
 
결국 대부분의 장병들은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고 유일하게 단 1명의 생존자만이 시리아군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GP 정상에서 보니 주변 4-5Km 내외는 평탄한 구릉지대로 시리아군 역시 이곳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갈릴리 호수를 향한 진격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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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군 과거 GP초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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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 엄체호 모습

나아만과 GP답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갑자기 군용 험비 짚차가 1대 올라왔다. 시리아 접경지역을 순찰 중인 이스라엘 군인들이었다. 간단한 전투군장 차림에 기관단총을 멘 여군 1명과 남군 1명이다. 안내인이 가서 전적지 답사 중인 여행객이라고 하니 선임자가 반갑게 손을 건넨다.
 
체구가 자그마한 예쁜 여군 분대장 나마(Nama) 하사라고 한다. 30발용 탄창 2개를 묶은 실탄이 장전된 묵직한 기관단총과 전투 군장을 하고 있어 어깨가 아파보일 정도였다. 짚차 안에서는 또 다른 1명의 병사가 쉴새없이 본부와 무전교신 중이다. 아마 국경 근처에서 이상한 동양인 1명을 만났다고 보고를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신분이 확실한 나아만과 군인들 간의 재미있는 대화로 이내 의심은 풀려졌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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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순찰 중인 이스라엘군 험비 차량

나아만을 통해 이스라엘군 병사생활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여군 전투분대장으로 남자 병사들을 지휘하는데 어려움은 없는지? 병영내의 구타·가혹행위는? 최전방 근무 중 여군으로서의 애로사항은?
 
“많은 여군들이 분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며, 병사지휘 간 어려움은 없다. 병영 내 불법행위는 엄격한 군법 적용으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여자로서 병역의무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다소 위험성은 있지만 직접 무장을 하고 근무하는 전투부대나 전투경찰(주로 시내에서 활동)에 근무하는 것을 많은 이스라엘 처녀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 있게 말하는 여군 하사의 태도에는 전혀 가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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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선 근무병사들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같이 사진촬영을 하자고 하니 환한 웃음을 지어며 흔쾌히 포즈를 취해 준다. 그들의 밝은 표정과 발랄한 행동을 보니 “군대생활이 썩는 3년이다!”라는 생각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참고적으로 이스라엘은 남자는 3년, 미혼 여성은 2년간의 병역의무가 있다.
 
정말일까? GP 전적지를 떠나면서 나아만에게 이스라엘군에 대해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느낌상 그녀는 군 생활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병역 의무기간이 경과한 이후 이스라엘로 이주했을지도 모른다. 이 나라가 병사들에게 배려해 주는 다양한 정책이 군인들의 사기를 높여주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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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키브르전쟁 시 이스라엘군 GP전투 기념비
 
예들 들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모든 대중교통 이용 시 무조건 무료 탑승이다. 휴가, 외출, 외박 시 전투부대 근무자들은 전원 개인화기와 실탄을 소지한다. 또한 출타 중 테러행위를 목격하거나 자신이 위해를 받을 경우 즉각적인 총기 사용이 가능하다. 사실 이스라엘 버스·기차 이용 시 승객 절반이 무장 혹은 비무장 정규군·예비군·출퇴근 상근예비역들이다. 이런 여건 속에서 이스라엘인에게 테러를 가한다는 것은 곧바로 자신의 목숨을 내 놓는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필자는 이스라엘인들의 광적인 애국심에 대해 찬성하지는 않는다.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비인도적 처사, 국제여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생존권에만 최우선 가치를 두는 그들의 지나친 민족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70여 년 전,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할 때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유대 민족의 뼈아픈 슬픔도 한편으로는 이해해 줄 필요도 있다.
 
'국제사회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는 냉혹한 외교가의 격언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100만 대군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 더구나 북한은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로 수시로 ‘서울 불바다 운운’하며 위협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저 우리는 미국이나 국제사회 여론에만 호소해야 하는 현실적인 한계를 국민들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북한보다 30배나 잘 살고 총 수출입액이 수십 배에 달하는데...” “ 북한의 전쟁 도발은 곧 자멸을 의미하는 것인데...” 물론 상당히 근거있는 논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과 일전을 치른다고 했을 경우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전 국토가 만신창이가 된 후의 전쟁 승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가 선이냐, 악이냐를 떠나 자기 조국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국가를 위해 바치는 이스라엘 청년들의 기상을 우리 국민들은 한번 쯤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칼럼은 칼럼니스트 개인의 견해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