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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시인 김지하에게 장모인 박경리 평가에 열중하는 이유를 묻자…

입력 : 2016.01.04 18:41

[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7):박경리와 동양의 나폴리 통영(下)]
 

中편에서 계속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태양열에 대한 버블(Bubble•거품) 현상이 가져온 게 뭡니까, 금융위기잖아요. 경제뿐 아닙니다. 신종플루나 동남아를 강타한 쓰나미도 우주의 변동과 관련 있습니다.”

―‘황상’이 박근혜(朴槿惠) 한나라당 의원을 연상시키는데요.
“허허, 그렇게 보여?(여기서 시인의 표정이 싹 바뀌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날 죽이려 했지만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두 가지 면에서 인정해. 일본 극우재벌의 돈을 안 썼고 청와대 캐비닛에 달러가 그득했지만 다 남 주고 정작 본인은 막걸리에 북어포만 먹었잖아.”

사단(事端)이 결국 일어났다. ‘시인이 이토록 박경리 문학에 매달리는 게 평생 돈벌이 못하고 장모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라는데’라는 말을 꺼낸 직후였다. 이후의 상황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었다.

“나, 몇살이야?”(시인) “우리 나이로 예순아홉이시죠.”(기자) “당신은?” “(큰일 날 태세여서 잽싸게 두살 얹어) 오십입니다.(실제로는 당시 마흔여덟)” “그런데 그리 싸가지 없는 질문을 해? 뭐? 황상에서 박근혜가 연상돼? 천박한 질문 같으니!”

기자는 부글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위층의 김영주 토지문학관장이 황급히 달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20분쯤 뒤 파투의 위기가 지나갔다.

서포루에서 바라본 통영시의 전경이다. 가히 동양의 나폴리라 할 만하다.

당시의 이야기를 이제야 밝혀봅니다. 제 질문의 요지는 ‘김지하 시인께서 평생 장모에게 얹혀살았기 때문에 사후에 이렇게 열심히 장모를 평가하는 것 아니었느냐’는 것인데 예상대로 그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질퍽한 전라도 사투리가 난무했었지요. 이변은 그 직후 일어났습니다. 위에서 남편과 저의 대화를 지켜보던 김영주 관장이 김지하씨를 향해 일갈한 거지요. “내가 기자와 싸우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지? 그런데 또 싸워?” 저는 김지하씨가 기자들과 평소 많이 다퉜음을 직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김지하씨의 태도였습니다. “왜 마누라가 끼어들어?”라고 호통칠줄 알았는데 그야말로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빛이 바뀐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놀랐습니다. “와, 이 집안의 최고 강자는 시인이 아니라 시인의 아내였구나”하고 말이지요. 이 인터뷰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박경리선생 집의 문패다. 주인은 떠났지만 문패는 아직 반짝거렸다.

“() 북한 서열 22위인 ‘간첩 대장’ 이선실이 “민족의 제단에 김지하를 바치겠다”며 그의 주변에 거액을 뿌렸다. 시인에게 반(反)정부 성명 발표를 종용해 옥사(獄死)를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이 고백에는 함축이 많다. 장모는 사위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그런 박경리를 운동권은 핍박했다.

시인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시스와 고르곤의 틈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장모에게서 ‘어머니’를 본 것이 아닐까.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긴 사연을 듣고 나서야 시인이 말한 ‘흰그늘’ ‘검은 암소’ ‘화엄개벽’이 명료해졌다. 그가 박경리라는 큰 품을 만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기자에게 시인은 여러 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게 인터뷰가 잘되려고 그랬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격정(激情)마저 없었다면 시인은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가슴의 한(恨)을 잠시라도 풀고 후련해질 수 있다면 욕 천 마디가 대수랴.

얼마전 6년만에 ‘문갑식의 기인이사’ 편에 박경리 선생을 쓰기 위해 원주 토지문화관을 다시 들렀을 때 저는 오랜 시간 문화관 앞 벤치에서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습니다. 시인은 문화관에 없었고 김영주 관장은 제 얼굴을 보고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통영 박경리 문학관에 서있는 선생의 동상이다.

여하간 남편과 첫 아들을 잃고 사위마저 고초를 겪었으며 그로 인해 딸마저 평탄치못한 삶을 사는 가운데 박경리 선생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1994년 8월15일 새벽 2시,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탈고했습니다. 집필을 시작한지 26년만의 일입니다. 1996년 선생은 토지문화재단을 만들었으며, 1999년 토지문화관을 개관해 후배 문인들이 창작할 공간을 제공하고 손수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밥상을 차렸다지요. 지금의 토지문화관 바로 옆, 선생이 살던 집은 비었지만 텃밭과 장독들만은 그대로였습니다.

선생의 자취를 더듬고 싶으신 분들은 원주 토지문화관과 바로 옆, 생을 마친 집, 그리고 지금은 박경리 문학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원주의 옛집(1980~1996년까지 살던 집)과 박경리 문학의 집을 둘러보실 것을 권합니다. 더 여유가 있다면 통영으로 가야겠지요.

박경리 선생 생가 담에 붙어있는 표지판이다.

앞서 말한 서포루 부근 생가를 보고 서포루에 올라 동양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절경을 감상한 뒤 산양리에 위치한 박경리 기념관을 둘러보며 그곳 정원에 설치된 황동상을 매만져보는 것입니다. 참고로 박경리 기념관 역시 조망이 훌륭합니다. 박경리 기념관 뒷편으로 5분쯤 걸어올라가면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지만 이런 코스를 되짚어본다면 현대사에 얽힌 한 여성의 삶과 우리 역사의 거인들과 문학의 향취를 더없이 풍요롭게 느낄 수 있는 여정(旅程)이 아닐까요.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