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여왕이다.
그러나 이집트인의 피는 섞이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죽은 후 그의 네 장군들이
점령지를 나눠 통치하게 된다. 그 결과 이집트를 나눠받은 마케도니아의 장군이 클레오파트라의 조상이다.
말하자면 정복자인 그리스계 지배계급인 것이다. 이들은 왕족의 혈통을 보존하기 위하여 근친결혼을 한다.
클레오파트라도 동생과 결혼하여 이집트 통치권을 양분하여 갖는다. 자 그럼 아래 글을 보시압.......
클레오파트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부였으며 뒤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부왕이 죽은 뒤(BC 51) 왕위에 올라 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BC 51~47 재위), 프톨레마이오스
14세(BC 47~44 재위) 및 자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BC 44~30 재위)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옥타비아누스(뒤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배한 뒤에 안토니우스와 함께 자살했고
이집트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매력적이며 야심 만만했던 그녀는 로마의 중대한 시기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미인의 대명사로 불려 고대의 다른 어떤 여성도 얻지 못한 명성을 누렸다.
이집트 왕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둘째 딸로 태어난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BC 323) 이후
로마 병합(BC 31)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다.
그녀의 조상은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인의 후손으로 이집트인의
피는 전혀 섞이지 않은 여성이었고 그녀를 제외한 왕가 사람들은 모두 이집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정치적 이유로 그녀는 태양신 레의 딸로 불렸다.
주화에 새겨진 그녀의 모습은 미인이라기보다 생기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녀는 육감적인 입과 단호한 턱, 부드러운 눈매, 넓은 이마, 높은 코를 가졌으며 목소리는 그리스의 전기작가
플루타르코스(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줄이 많이 달린 현악기'가 울리는 음색이었다고 한다.
BC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왕위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15세 된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곧 갈라섰고 이집트는 내란에 휩쓸렸다.
이전에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는 BC 58년 이집트에서 추방당했을 때 로마 군대의 힘을 빌려 3년 뒤 복위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로 로마는 막강한 부를 소유한 독립 왕국 이집트의 문제에 관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BC 168년 이후 이집트는 거의 로마의 보호령이라 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세력을 인식하고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로마 및 그 통치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재빨리 간파했다.
BC 48년 10월 로마 내전의 승리자인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테살리아에서 벌어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지고
이집트로 도망왔으나 카이사르가 도착하기 4일 전에 살해당했음)를 뒤쫓아 이집트로 왔을 때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유혹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용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를 복위시킨 대가로 돈을 요구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권력을 필요로 했다.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초기의 영광을 되찾고 싶어했고 한때 이집트 땅이었던 남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포함해 가능한 한 많은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시키려 했다.
그녀는 로마의 딕타토르(독재관)인 카이사르의 세력에 의지해 자신의 꿈을 이루려 했다.
이집트에서는 뒤이어 내란이 일어났으며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끄는
반클레오파트라 세력 때문에 몹시 곤란을 겪었지만 결국 그들을 물리치고 남동생과 누이의 공동통치체제를
이집트에 회복시켰다.
BC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파를 완전히 진압하는 데 2년을 소비했고 BC 46년 로마로 돌아와 4일 동안 개선식을 벌였는데
언니 클레오파트라에게 적대적이었던 아르시노에는 이 개선식에서 포로로서 굴욕적인 행진을 해야만 했다.
마침내 BC 45년의 문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카이사르는 반대세력을 일소했다.
이제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에 살게 되었으며 황금으로 만든 그녀의 조상이 카이사르의 명령에 따라 카이사르가 속한
율리우스 가문의 조상신(祖上神) 베누스 게네트릭스 여신의 신전에 세워지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서 티베리스 강 너머 별장을 받아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함께 카이사르가
암살당할(BC 44) 때까지 로마에서 지냈다.
그녀는 신중하게 행동했으므로 별 문제없이 지낸 듯하며 공식적으로는 동맹 조약을 협상했다.
후대의 기록에 따르면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키케로는 다른 로마인들처럼 그녀를 굉장히 미워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당시에 쓴 서신들에는 전혀 그녀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권력을 잡으려던 클레오파트라의 계획은 카이사르가 암살당함으로써 좌절되었고 그녀는 이집트로 돌아가 다시금
로마 정계의 다툼에 끼어들 때를 계속 노렸다.
BC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이 격파당하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뒤를 이을 장군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카이사르의 누이의 외손자이자 그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병약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로마의 통치자가 되겠다는 망상을 갖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페르시아 공격중 사람을 보내 클레오파트라를 불렀다.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장교로서 이집트에 왔던 안토니우스를 14세 때 만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부름을 자신에게 온 2번째 기회로 여겨 기뻐했다.
그녀는 출발을 늦추어 안토니우스를 애타게 한 다음 선물을 가지고 소아시아의 타르수스로 출항했다.
그녀는 키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도시에 도착했으며 이 유명한 광경은 셰익스피어의 희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Antony and Cleopatra〉에 묘사되어 길이 남았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완전히 매혹당했고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바람기 많고 경박한 성품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안토니우스는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하던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해, 당시 이탈리아에서 남편의 이익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던 아내 풀비아를 잊고는 페르시아 원정을 연기한 채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빠졌고 그녀를 '보호령'의 통치자가 아니라 독립왕국의 군주로 대우했다.
한 역사가는 "그녀는 로마인을 이용해 로마를 공격하려는 과감한 방법을 택했는데 과연 이것 말고는 다른 수단이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라고 지적했다.
그녀가 최초로 꾀한 시도는 카이사르가 죽음으로써 좌절되었으나 이후에는 권력이 있으며 카이사르보다 더 융통성
있는 안토니우스를 이용해 모든 것을 얻으려 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약한 면을 충분히 활용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권을 얻기 위한 10년간의 투쟁 끝에 결국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초래한 화를 입어 안토니우스와
함께 파국을 맞았다.
BC 40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와 한시적인 협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풀비아가 죽은 뒤에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재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완전히 사이가 나빠져 다시 클레오파트라에게 돌아갔으며
클레오파트라에게서 자금을 얻어 그때까지 미루어왔던 파르티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옥타비아와 옥타비아누스를 모욕했으며 이제 로마 전체는
그의 적이 되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 이 결혼은 로마 법에 따르면 무효였다.
한편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가 있는 동안 클레오파트라는 어리석게도 당시 로마의 보호령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능력
있고 부유하며 강력한 유대의 헤로데를 적으로 만들고 말았다.
헤로데의 오랜 친구였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를 떠난 뒤인 BC 40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지나가던 헤로데를
유혹했으나 실패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거절당한 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으며 더욱 큰 음모를 꾸몄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로 돌아오자 클레오파트라는 그를 설득해 시리아와 레바논뿐 아니라 헤로데의 왕국에 있던 땅
여리고의 발삼 농원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헤로데를 완전히 희생시키면서 클레오파트라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은 거절했다.
이때문에 클레오파트라는 더욱더 헤로데를 미워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헤로데의 궁전에 있는 여자를 포섭해 그의
복잡한 가정 문제에까지 관여하려 했다.
그녀는 새로 얻은 영지를 둘러보는 여행을 떠났고 헤로데는 반가운 척하면서 그녀를 영접했다.
그러나 그녀는 계속 질투심을 내보이면서도 적대적으로 행동했으며 자신만큼 안토니우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은
없다고 뽐냈다. 그녀의 이러한 어리석은 행동은 얼마 가지 않아 대가를 받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잠자코 승인했으며 이외에도 계속 돈을 낭비하는 정책을 폈다.
파르티아 원정은 돈만 들이고 실패했으며 성과라고는 일시적으로 아르메니아를 정복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BC 34년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라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다.
식장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아들로 인정한 카이사리온을 비롯한 4명의
자녀들과 함께 황금 왕좌에 앉아 있었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아들로 인정한 것은 예전에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던 옥타비아누스를
법적으로 서출로 강등시키는 행위였다.
클레오파트라는 개선식에서 '왕 중의 여왕', 카이사리온은 '왕 중의 왕'이라고 칭송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인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유프라테스 강 너머 영토의 아르메니아를, 그 동생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르메니아의 서쪽 땅을 얻었으며, 이들의 누이 셀레네는 키레네의 통치자가 되었다.
이제 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베스타 여신전의 처녀사제들이 내놓은 신탁이라면서, 안토니우스가
이국 여인에게 로마의 영지들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의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겨 그곳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소식은 곧 로마인들에게 퍼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 32~31년의 겨울 그리스에서 연회와 사치에 빠져 있었다.
로마 원로원은 이듬해 콘술(집정관)직을 확보해놓았던 안토니우스의 피선출권을 박탈했고 마침내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항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때까지도 그녀는 헤로데에 반대하는 정책을 꾸미고 있었는데 당시는 헤로데가 안토니우스에게 자금과 병력을
가장 많이 대주고 있었던 때였음에도 클레오파트라는 헤로데를 페트라의 왕과의 싸움에 말려들도록 했다.
BC 31년 9월 2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돌연 전투장소에서 빠져나와 이집트로 향했으며 안토니우스 쪽의 패배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깃발을 단 배를 탔으며 3일 동안 그녀를 만나기를 거절했다.
둘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기 전에 화해했으나 이때는 희망을 버린 뒤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매력과 정치적 안목을 모두 발휘했음에도 지원할 상대를 2번이나 잘못 고른 셈이었다.
게다가 안토니우스의 몰락은 그녀에게도 책임이 컸다. 이제 실권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돌아갔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안토니우스를 죽이거나 추방할 수는 없다고 깨달았고 엉뚱하게도 그를 자기에 대한 사랑
때문에 죽도록 만든다면 그들 2명의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웅장한 무덤 안에 들어간 뒤 사람을 시켜 안토니우스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거짓 전갈을 보냈다.
스스로 칼 위에 엎어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있는 곳으로 옮겨져 그녀에게 옥타비아누스와 평화조약을
맺을 것을 지시한 뒤 죽었다. 옥타비아누스가 방문했을 때 그녀는 다시금 매력을 발휘해 그를 사로잡으려 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자기의 개선식 때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굴욕적인
행진에 참여시키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여왕으로 태어난 몸이 로마 시내를 질질 끌려다니면서 모욕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
그녀는 이집트 왕가의 상징인 코브라에 물려 죽은 듯하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안토니우스 곁에 묻어달라고 부탁한 클레오파트라의 편지를 받은 즉시 사람을 보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전속력으로 달려간 그들은 경호원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문을 열었으나
이미 클레오파트라는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장신구들을 모두 걸친 채 황금침대에 누워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22년간 여왕으로 군림한 끝에 39세에 죽었다.
소원대로 그녀는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혔으며 이들과 함께 로마의 공화정도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