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ravel,Leasure I

[부처님 오신 날 특집ㅣ한국의 오대 적멸보궁 <2> 영월 사자산 법흥사] 옛 문헌도 인정한 명산·명당의 터

[부처님 오신 날 특집ㅣ한국의 오대 적멸보궁 <2> 영월 사자산 법흥사] 옛 문헌도 인정한 명산·명당의 터

              

  •  

    
입력 2019.05.07 16:28

적멸보궁 기록은 미미… 2018년 절 옆서 국보급 신라 금동좌상불 출토

이미지 크게보기
법흥사 적멸보궁 터는 사자산이 길게 능선을 뻗다가 중간 능선쯤 갑자기 절벽으로 뚝 떨어지는 곳(점선으로 된 원)에 자리잡았다.
법흥사 적멸보궁이 있는 영월 사자산獅子山(1,167m)을 찾아 한참 골짜기로 돌아간다. 골짜기도 이런 골짜기가 없다. 옛날 기준으로 정말 심산유곡이었을 것 같다. 도로가 개설된 지금도 영월읍내까지 승용차로 1시간 30분가량 걸릴 정도다. 
그런데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즉시 옛 문헌을 뒤졌다. <택리지>복거론 산수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사자산은 치악산 동북쪽에 있고, 수석水石이 30리에 걸쳐 뻗어 있다. 주천강이 여기에서 발원한다. 남쪽에 있는 도화동과 두릉동은 계곡의 경치가 아주 빼어나며, 복지라 불리니, 참으로 속세를 피해서 살 만한 땅이다.’ 
역시 명당이라는 설명이다. 숨어 살기에도 좋고, 수행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풍수에서는 혈이 한 곳으로 뭉쳐 큰 명당 터를 형성할 때 벌의 허리 모양으로 산의 지세가 좁아지는 봉요처를 형성한다고 한다. 적멸보궁의 자리가 영락없는 그 형세다. 풍수 전문가들은 사자산 적멸보궁 터에 대해 “사자산의 강한 혈이 뻗어내려 봉요처의 지세를 이뤘다가 다시 둥근 모양의 예약작화형의 명당을 형성하는데, 그 자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말한다. 
다른 문헌도 찾았다. <세종지리지> 원주목 영월편에 ‘명산名山은 치악雉岳(주州 동쪽에 있는데,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 지내기를 소사小祀로 한다)·거슬갑산琚瑟岬山(주천현 북쪽에 있는데, 그 고을 관원이 제사지낸다)·사자산師子山(주천현 동북쪽에 있다)이다’고 나온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 산천의 형승편에선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온다. 
‘사자산獅子山: 치악산의 동북쪽에 있다. 30리에 걸쳐 물과 바위가 있는데 주천강酒泉江의 근원이다. 남쪽에는 도화동桃花洞·두릉동杜陵洞이 있는데 모두 시내와 샘물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산수가 좋고 명산이자 명당이라는 설명은 옛 문헌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 동네 이름 자체가 수주水周면이다. 한마디로 온통 물이라는 얘기다. 전형적인 산 좋고 물 좋은 고장이다. 
그곳에 적멸보궁이 있다. 원래 사찰은 기氣가 아주 센 곳이나 명당에 자리 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가 센 자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서 사찰이 터전을 잡아 그 기를 다스린다고 한다. 옛 고승들은 대개 풍수에 능통해서 명당을 바로 알아본다. 그래서 한국의 유명 사찰은 명당에 자리 잡고 있어, 기도객이 연중 끊이지 않는다.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에 관한 기록을 찾았다. 공식기록으로는 아무리 찾아도 없다. 아예 없는 건지 못 찾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옛 문헌에 나오지 않아서 법흥사 사적비를 들춰봤다. 
이미지 크게보기
사자산 법흥사 주지 대웅 삼보 스님이 아홉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구봉대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라 말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의 본산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평안을 위해 서기 643년 선덕여왕 12년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 창건하고 흥녕사興寧寺라고 이름했다. 그후 886년 신라 말에 이르러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은 철감도윤국가의 제자 징효절중 선사가 이곳에 선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나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후략)’ 
이 정도 기록이라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올 만한데…. 현재 법흥사 주지 대웅 삼보 스님은 “643년 자장율사가 흥녕사를 창건한 건 기록에 나온다. 2018년 절 옆 빈터에서 작업하다 금동좌불상을 발견했다. 전문가들은 ‘신라시대 불상’이라고 하는데, 이것만 봐도 이곳에 유명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현재 강원박물관에 보관 중인 그 금동불상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삼보 스님은 이에 덧붙여 “사자산은 원래 부처님을 지칭하며, 부처님이 앉은 자리를 사자좌라고 한다. 적멸보궁에는 사리를 모시지 않고, 사자산 연화봉 990고지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했다. 연화봉은 멀리서 보면 연꽃이 피어 있는 형상인 동시에 가까이서는 사자가 앉아 있는 형상이라고 유래까지 설명했다. 또 “산 이름에 동물 이름이 들어간 것은 아마 유일하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삼보 스님의 설명대로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적멸보궁으로서 손색없는 터라는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로는 사자산은 법흥사를 처음 건축할 때 어느 도승이 사자를 타고 이 산으로 왔다고 해서 명명됐다고 전한다. 사자산에는 산삼, 옻나무, 흰 진흙, 물 등이 풍부해 ‘사재산四財山’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이미지 크게보기
법흥사 적멸보궁 뒤로 사자산 연화봉이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사자산 법흥사 일주문.
그런데 지금 사자산은 출입금지다. “산세가 워낙 험해 인명사고가 자주 발생해서 아예 출입을 통제한다”고 동행한 영월군 정운중 산림경영팀장이 설명했다. 
법흥사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산세가 매우 좋고 안정감을 주는 기운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적멸보궁 뒤로는 삼국시대부터 명산으로 지명이 전하는 사자산, 서쪽으로는 구봉대산, 동쪽에는 백덕산, 앞으로는 구룡산이 둘러싸고 있다. 동물 이름은 다르지만 좌 청룡, 우 백호, 남 주작에 북 현무까지 완벽한 산세다. 적멸보궁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으며,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실제 명천名泉으로 알려져 있다. 
험한 사자산 대신 서쪽의 구봉대산九峰臺山으로 적멸보궁 산행을 대신한다. 삼보 스님은 “20년 전에 내가 있을 때는 구봉대라고 불렀는데, 왜 구봉대산으로 바꿨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옛 이름은 그대로 둬야 하는데 편의상 임의로 바꾸면 나중에 그 뜻이 변질된다는 설명이다. 실제 답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구봉대산은 전혀 대臺가 없었다. 망경대산이나 백운대, 문장대와 같이 대가 있는 산은 정상 부위에 평평한 자리가 있어 명명됐다. 그런데 구봉대산은 평평하기는커녕 오히려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 아홉 개가 나란히 있는 형국이다. 이름과 실제 형상이 다르다. 이미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삼보 스님은 “구봉대는 아홉 신선이 놀던 산이라 해서 명명됐고, 마주 보는 백덕산에 신선바위가 있어 사자산을 중앙에 두고 신선이 왔다 갔다 해서 붙여졌다”고 설명했다. 적멸보궁의 우백호 역할을 하는 산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봉대산 능선은 아홉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은 형국이라 명명됐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봉대산은 좌우로 경사가 심해 능선 중앙으로 등산로가 조성돼 있다.

부처님 앉은 자리를 사자좌라 칭해

또한 구봉대는 각 봉우리마다 의미가 있다. 불교의 윤회설을 설명하는 것 같다. 제1봉 양이봉養以峰은 부모님의 금실자락으로 어머님의 뱃속에 잉태함을 의미한다. 제2봉 아이봉兒以峰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남을 의미. 제3봉 장생봉長生峰은 유년기를 지나 청년기를 거치는 과정을 의미. 제4봉 관대봉官帶峰은 벼슬길에 나서기 전 기초를 충실히 다짐을 의미. 제5봉 대왕봉大王峰은 인생의 절정기에 이른 것을 의미. 제6봉 관망봉觀望峰은 인생을 되돌아보고 지친 몸을 쉬어감을 의미. 제7봉 쇠봉衰峰은 늙어지는 덧없는 인생을 의미. 제8봉 북망봉北邙峰은 인간이 이생을 떠남을 의미. 제9봉 윤회봉輪廻峰은 산을 사랑하고 덕을 베푼 사람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윤회설을 의미한다고 등산로 입구 안내판에 적혀 있다. 구봉대산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있다. 
‘구봉대산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사자산 법흥사를 지나 삿갓봉(1,028m)으로 이어지는 서쪽의 산줄기 중간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으로, 북쪽의 1봉에서 남쪽의 9봉에 이르는 각 봉우리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뜻하는 단어들이 각각 이름으로 붙어 있다. 9개의 봉우리가 마치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들처럼 늠름하게 솟은 구봉대산은 인간이 태어나 유년과 청년, 중년, 노년을 거치며 생로병사의 원리에 따라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불교의 윤회설에 9개 봉우리마다 각각 그에 맞는 이름이 붙어 있다.’ 
각 대마다 각각의 의미가 있다면 더더욱 구봉대로 명명하는 게 맞겠다 싶다. 삼보 스님은 “내 임기 내 산 이름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강조했다. 20년 전 법흥사에서 상원사 부 지주로 몇 년 가 있다가 다시 법흥사 주지로 돌아오니 구봉대에서 구봉대산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더라는 것이다. 
이름엔 대가 있지만 실제론 전혀 대가 없는 구봉대산으로 향한다. 이쯤이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산 밑에는 봄이 왔지만 산 위로 올라갈수록 밑과는 전혀 다른 날씨를 보인다. 등산로 주변엔 아직 눈이 쌓여 있다. 험한 산세로 곳곳에 돌이 많다. 악산이다. 계곡으로 제법 물이 흐른다. 주천강으로 합류한다. 주천강 발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사자산과 구봉대산, 백덕산 등이다. 법흥계곡은 여름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봉대산 능선 위로 올라서면 완만한 능선으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사자산은 너무 험해 사고 잦아 통제

제법 가파른 등산로로 오르다 능선 위로 올라선다. 시원한 바람이, 아니 잠시 시원하지만 이내 추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역시 능선 위의 산은 아직 겨울이다. 
영월에 있는 몇 개의 산을 둘러본 결과 공통점 한 가지는 산마다 진달래나 철쭉이 있다는 점이다. 관목으로 최대 개체수를 자랑한다. 이 관목들만 제대로 관리해도 진달래나 철쭉명산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것 같다. 
본격 구봉대산을 느낄 수 있는 능선 위로 올라선다. 제1봉 양이봉이다. 칼날 같은 능선 위로 오뚝이같이 솟은 봉우리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좌우로는 급경사. 한쪽은 90도에 가깝고 다른 쪽은 그나마 조금 덜하다. 산세가 정말 희한하다. 90도 경사진 능선 아래로 저 멀리 사자산 자락 아래 있는 법흥사가 보인다. 
사자산 산세가 정말 예사롭지 않다. 사자산 연화봉에서 내려뻗은 능선은 벌의 허리 모양을 이루다 적멸보궁을 앞에 두고 다시 절벽을 이룬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형세를 만든 것이다. 적멸보궁이 터전을 잡은 앞으로 완만한 능선이 내려 법흥사가 자리 잡고 있다. 맞은편에서 바라보니 사자산에서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사자산에서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없다고 보면 된다. 바로 절벽 낭떠러지 같은 형세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봉대산 등산로 초입엔 소나무와 잎갈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구봉대산 어느 봉우리에서 봐도 사자산과 적멸보궁의 형세는 똑 같다. 좌청룡은 백덕산이다. 오히려 사자산보다 더 큰 맥을 오른쪽에 두고 있는 셈이다. 실제 그 산세는 백덕지맥이다. 사자산도 그중 하나의 산이다. 
아홉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총 2.1km쯤 된다. 2km 남짓 되는 능선 위로 아홉 개의 뾰족한 봉우리가 솟은 형국이 신기할 뿐이다. 그렇기에 산 이름에 대가 없거나 아예 신선이 놀던 봉우리라는 개념으로 구봉대라고 해야 타당할 것 같다. 
원점회귀로 다시 법흥사 적멸보궁으로 돌아온다. 계속 의문은 남는다. 왜, 언제부터 적멸보궁으로 자리를 잡았을까? 사자산이 명산과 명당인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어느 문헌에도 자장이 법흥사에 적멸보궁을 봉안했다는 기록은 없다. 단지 유사한 단서 하나는 신라 말 구산선문 선풍이 크게 일어났을 때 사자산문의 본산이었다는 점이다. 사자산문은 도윤(798~868년)이 825년 당나라에 가서 남천보원의 선법을 전해 받고, 847년 귀국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그의 법을 제자 징효 절중折中(826~900년)에게 전했고, 절중이 사자산 흥녕사를 사자산문의 본산으로 했다고 전한다. 
적멸보궁과 사자산문의 본산 영월 사자산 법흥사.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던 흥녕사는 1902년 폐사지로 있다가 대원각 스님이 법흥사로 개칭하고 중창하면서 지금까지 명칭이 이어져 오고 있다. 
기록에 없는 적멸보궁은 믿음의 산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적멸보궁의 역사를 엄격히 따지면, 통도사의 경우 계단 남쪽에 현재와 같은 배전拜殿이 세워진 것은 1645년이고, 적멸보궁이란 현판은 1970년대까지 걸려 있지도 않았다. 오대산 중대의 적멸보궁도 기껏 19세기 말 형식이다. 그렇다면 적멸보궁도 결국 믿음의 산물이지 실제 기록에 의한 연구의 산물은 아니란 점이다. 그것도 현대 들어서 믿음의 한 트렌드일 수 있다. 초기 불교가 신앙의 대상을 탑 중심으로 삼다가 후기 들어 불상 중심으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신라 말 사자산문의 본산 사자산 법흥사, 한국의 오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사자산 법흥사. 명산·명당 터에 자리 잡은 분명한 사실과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혼재하지만 더 중요한 건 수많은 불제자들의 믿음이 그 자리에 뿌리 내리고 있다는 사실일 것 같다. 지금도 전국의 많은 기도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