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위해 배우자"… 日육사 출신 한국인의 고뇌와 배신
조선일보
입력 2020.08.08 05:00
"일본군 장교였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 단정하는 건 온당치 않아"
비극의 군인들
이기동 지음|일조각|736쪽|4만2000원
망국(亡國)을 맞은 1910년 8월,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엔 조선인 40여 명이 유학 중이었다. 대한제국이 세운 무관학교 1·2학년에 다니던 이들은 1909년 통감부 압력으로 학교가 문을 닫은 뒤 국비로 유학 온 스무 살 안팎 청년들이었다. 육사(陸士) 예비 과정인 중앙유년학교에 들어온 지 채 1년이 안 된 이들은 절망했다. '전원 자퇴하고 귀국하자'…. 격론이 벌어졌다. 연배가 높은 지석규가 말했다. '배울 것은 끝까지 배운 뒤 중위가 되는 날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궐기하자.'
'대한제국의 유복자'로 알려진 이들은 1914년 5월 졸업한 일본 육사 26기생(13명)과 이듬해 졸업한 27기생(20명)이다. 일본군에 배속된 이들에게 3·1운동은 충격을 줬다. 지석규(26기), 이종혁(27기)은 부대를 탈출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철호(26기)도 1918년 중위로 승진하자 예편하고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석규(1888~1957)는 훗날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청천의 본명이다.
'비극의 군인들'은 구한말부터 일제 말까지 일본 육사에 몸담은 조선인 141명의 생애를 추적한 노작(勞作)이다. 원로 국사학자 이기동(77) 동국대 명예교수가 1982년 낸 책을 38년 만에 대폭 수정했다.
◇혁명 꿈꾼 육사 11기생
1935년 의친왕 아들 이우의 결혼 사진. 아내는 박영효 손녀인 박찬주다. 1933년 일본 육사 45기로 졸업한 이우는 일제에 저항적이었으나 1945년 히로시마 원폭으로 희생됐다. /일조각
1895년 유학을 떠난 11기생 21명은 갑오개혁 때 실력자로 떠오른 박영효가 직접 뽑은 국비 유학생이었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관비 지급이 중단되고 친일파로 몰렸다. 1899년 11월 졸업한 이들은 도쿄 1사단에서 견습 사관을 마치고 1900년 7월 대한제국 참위(소위)로 임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귀국 지시도 없고 봉급도 보내주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다. 일부는 비밀결사 혁명일심회를 결성, 일본에 망명 중인 유길준과 접촉하면서 혁명을 모의했다. 귀국한 회원 8명은 곧 체포됐다. 장호익 등 3명은 1904년 3월 러일전쟁 발발 직후 사형당했다. 만민공동회 운동으로 복역 중이던 청년 이승만은 감방 창문으로 이 장면을 목격했다. 처형 직전 만세를 세 번 외친 장호익의 당당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은 강제 병합 이후 뜸하다 1933년부터 다시 이어졌다. 조선군사령부에서 학교를 찾아다니며 입학을 권했다. 채병덕과 이종찬이 1933년 4월 49기생으로 4년제 육사에 들어갔다. 이듬해 50기생 이용문·지인태가 들어왔다. 채병덕과 이종찬은 조선인 사관생도 모임인 '계림회'를 만들었다. 1933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육사에 유학한 계림회원은 72명이다. 만주국 장교와 군관학교 예과 출신으로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정일권 등 24명을 포함한 숫자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사자가 속출했다. 1939년 소련군과 노몬한에서 공중전을 벌이다 전사한 지인태, 인도네시아 팔렘방 비행장 공습 중 불시착해 자결한 최명하, 오키나와로 출격한 최정근 등이다.
◇6·25 한 달 만에 전사한 채병덕 소장
광복을 맞은 계림회 회원들은 미 군정 아래서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이응준과 채병덕이 육군본부 총참모장을 잇달아 맡았고, 이용문은 채병덕 아래 육본 정보국장이 됐다. 김정렬은 초대 공군본부 총참모장을 맡았다. 육군과 공군 모두 계림회 출신들이 장악했다.
1903년 육사 15기생으로 졸업한 조선인 유학생들이 예비과정인 도쿄 세이조학교 시절 찍은 사진. /일조각
6·25 전쟁에서 앞장서 싸운 것도 이들이었다. 6·25 전쟁 발발 닷새 만에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채병덕 소장은 그해 7월 경남 하동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서른다섯 살이었다. 이용문 준장은 1953년 6월 24일 지리산 공비 토벌 중 비행기 사고로 산화했다. 박범집 장군은 1950년 11월 고향인 함흥 부근 상공에서 작전을 지휘하다 비행기가 추락했다. 전쟁 초 한강 다리 폭파 책임자였던 최창식 공병감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
구한말에서 일제 시대까지 일본 육사로 간 조선인의 선택을 어떻게 봐야 할까. 시베리아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이갑(15기), 일본군 기병 중위에서 독립군 사령관으로 변신한 김경천(23기), 전범 재판에 회부돼 사형당한 홍사익 중장(26기), 히로시마 원폭에 희생된 왕족 이우(45기)…. 영화 주인공처럼 극적인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이다. 중위 진급과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겠다고 결의한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들조차 실천에 옮긴 사람은 소수였다. 이기동 교수는 "일제 시대 일본군 장교였다는 사실만으로 친일파로 단정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해방 이후 창군(創軍)과 6·25 전쟁에서 기여한 몫도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08/20200808002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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