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인 Homer Hulbert >
- 잊지 맙시다
중국어나 일본어를 대하다 보면 불편할 때가 많다
중국어와 일본어는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글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당시에는
중국어와 일본어 처럼 띄어쓰기가 없었다.
나랏말싸미중국에달아문자와
서르사맛디아니할세이런전차로
어린백성이~~~~
이렇게 시작되는
훈민정음 서문 부터 띄어쓰기가 없는 글이였다
띄어쓰기가 없는 글을 잘못
읽으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 가신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글이 되고 만다
띄어쓰기 없는 한글의 불편을
맨처음 지적하고
띄어쓰기를 사용하도록
啓導(계도)해 준 사람은
미국인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였다.
헐버트 박사가 띄어쓰기를
계도해 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아직도
중국어나 일본어처럼
띄어쓰기가 없는 불편한 글을
그대로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23세 청년이었던
헐버트박사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서양문화와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고 1886년 제물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했다.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헐버트 박사는 조선인보다도
조선을 더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에 들어온 지
3년 후인 1889년에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의
사민필지(士民必知)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순 한글로 만들어진
조선 최초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미국인으로서
짧은 시간에 한글 학자가 된
그는
다수의 논문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시작했고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행했는데
그 신문은 최초로 띄어쓰기를 한 한글신문이었다.
누구보다
한글의 우수성을 잘 알고 있던
헐버트 박사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중국의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그만 버리고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할 정도였다
헐버트 박사는 1949년 8월 5일
서울에서 눈을 감았고
대한민국 정부는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헐버트의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거행한 후
현재의 양화진(楊花津)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했다
그리고 1950년에는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또 2014년 한글날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 했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되는
1999년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더 헌신했던 호머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라는 글귀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이렇게 편리하고 좋은
띄어쓰기 마침표 등은
글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우리의 삶에
띄어쓰기와 마침표가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쉬는 일요일이 있어야 하고
친구들과 차 한 잔 술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루 일과도 쉼표와 마침표가
있어야 하고
일도 농사도 배움도 예술활동도
모두 쉼표와 마침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쉼표 없는 인생
마침표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우리말에
바쁠수록 둘러가라 라는
말이 있고
일본어에는
いそがばまわれ(급하면 돌아가라)
영어에는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천천히 꾸준히 가는 자가 이긴다)
라는 말이 있다
독일어에는
Eile mit Weile(천천히 서둘러라) 말도 있다.
이러한 말들은 우리의 인생이
일장춘몽이라고들 하지만
인생 100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니
살아가는 동안 한글을 사랑하며
한글처럼 띄어쓰기와 마침표 등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것이
현명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月松 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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