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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소고(現代史 小考) ~1961년 05월 15일 밤 11시

현대사 소고(現代史 小考)  

 

1961년 05월 15일 밤 11시

권총을 차고 혁명동지들과 집을 나선다

 

1961년 05월 15일 밤.

바야흐로 대한민국에 거대한 대운(大運)의 기운이 열리고 있었다.

혁명을 앞둔 박정희장군집에는 김종필, 박종규, 이낙선, 이원엽, 최재명등의 혁명동지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모여있었다. 군복에 군화를 신은채로 혁명개시의 카운트만 기다리는 방으로 언제나 그랬듯 소박하고 기품있는 육영수가 조용히 들어섰다.

“가시기전에 근혜숙제 좀 봐주고 가세요”
“음~ 그러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거사를 앞두고 박정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2층 아이들 방으로 올라갔다. 숙제를 하고 있는 근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고, 자고있는 지만이와 근영이를 둘러 보고 난뒤 박정희는 권총을 차고 혁명동지들과 집을 나선다.


작전개시는 5월 15일 밤 11시, 완료일시는 5월 16일 새벽 3시.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혁명의 작전시간은 불과 4시간이었다.
한강교를 건너던 혁명군 해병여단 2중대가, 헌병대와 교전이 벌어졌다.
이 교전으로 헌병3명, 해병대원 6명이 부상당했지만 박정희는 흔들림없이 교전중인 한강교를 꼿꼿하게 걸어서 도하한다.
5.16혁명의 유일한 교전이자 인명피해였다.


새벽 03시.
마침내 6군단의 혁명군 포병단 1,283명이 육군본부를 완전히 장악한다.
사망자 한명 없는 완벽한 무혈혁명이었다. 04시 30분에 공수여단과 함께 KBS라디오 방송국 에 도착한 박정희는 05시 정각, 6개 항목의 혁명공약을 국민들에게 발표하였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는다.
2. UN헌장을 준수하고,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이다.
3.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는다.
4.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과업이 성취되면,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

 

일제치하 36년.


그리고 느닷없이 다가온 8.15 해방. 곧이어 3년에 걸친 6.25동족상잔.
말그대로 초토화된 삼천리 산하는 전쟁의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전쟁의 후유증은 좌.우의 격렬한 대립으로 이어졌고, 이미 삼천리강산은 만악이 횡횡한 어지러운 세상이 되어 있었다. 부정과 부패와 혼란은 정권의 심장부까지 침투했고, 이승만 정권은 점점 유약하고 무능한 늙은이가 되어갔다.


전쟁후 10년만인 1960년,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인해 4.19학생혁명이 일어났고, 80세의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을 하야하고 미국 망명길을 떠났다.


그리고 4월27일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었다.
과도정부는 6월 15일 헌법을 개정하여 권력구조를 대통령제에서 내각제로 바꾸고 양원제를 도입한다. 사회적 혼란에, 감당치도 못할 정치적 분란의 씨앗을 또 뿌린 것이다.
여당,야당,신파,구파로 사분오열된 정치권은 1960년 7.29 총선을 통해 민주당이 승리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8월 12일 국회의원 투표로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항상 그랬듯이 불안한 정권은 내각을 장악하는 총리선출에서부터 대립하게 된다. 윤보선은 같은파인 김도연을 지명했으나, 반대파의 반대로 부결되고, 결국 장면을 다시 지명하여 가까스로 통과시킨다.


그렇게 태동한 윤보선과-장면내각.


참으로 대한민국 정치사에 두 번다시 태어나지 말아야할 당파싸움의 반면교사라 할것이다. 신파 구파에, 노장파와 소장파, 합작파와 원외파 등으로 나누어져 끝없는 정쟁으로 하루도 바람 잘날이 없었고, 임기 9개월 동안 개각은 3번씩이나 단행해야할 정도 였다.
이런 정부가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뭘 할수 있었겠는가?


일년동안 국가채무 2,700억환에, 무역적자만 2억6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60년 94달러에서 1961에는 87달러로 오히려 후퇴했다. 당시 수출 1억달러가 얼마나 힘든 고지였는지는 박정희시대를 보면 알것이다.
그무렵 북한의 경제력은 이미 남한의 2배를 훌쩍 상회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경제 7개년 계획을 세워놓고 가열차게 경제부흥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 계획이 완료되면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에 기와집이 돌아갈 것이라며 북한주민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미국의 저명한 잡지는 이런 남한의 실상을 보도하며, 먹고살기 위해선 차라리 평양으로 가 라고 할정도였다. 미대사사관의 보고서에는 남쪽지역에 수해가 나고, 기근이 들어 국민들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는데 총리나 각료중에 그 수해지역을 한번이라도 돌아보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4.19혁명을 겪은 이념논쟁은 사회를 더욱 혼란으로 몰고 갔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통일을 해야한다, 일자리는 통일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의 데모가 연일 거리를 메웠다.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훨씬 높으니, 통일이 되면  경제적분배면 에서 유리하다는 황당한 논리도 나왔다.
남한의 분위기에 자신감을 얻은 김일성은 그해 8.15경축사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 하고, 공산화가 두렵다면 남북연방제를 실시하자고 제안하였다. 그 연방제 통일안도 받아 들일 수 없다면, 경제교류부터 한후, 미군을 철수 시키고 남북한 군대를 10만명 아래로 감축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후방으로 간첩들을 침투시켜 테러와 암살을 일삼았다.


외우내환에 무능한 정부는 속수무책이었고, 이때부터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워 졌다. 학생들은 우리의 살길은 통일뿐이라며 남북학생회담을 추진하겠다고 길거리로 연일 쏟아져 나왔다. 좌익 단체들은 분단의 원인을 외세와 사대주의자들 때문이라며,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철폐, 정권 퇴진을 주장하며 혼란을 부채질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좌익의 선동질은 변함없이 똑같았다.


민중봉기가 발생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에 국가위기설마저 떠돌아 다녔다.
장면내각 일년동안 전국의 시위는 1,835회나 일어났고 969,630명이 참여했다.
매일 3,876명이 하루에 7.3회의 시위를 벌인 꼴이었다.

학생시위는 726회에 달했으며 전체학생의 절반이 넘는 471,779명이 참가했다.
노동조합은 675회의 시위에 연인원 219,303명이 시위를 벌였다.
바야흐로 민족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였고, 제2의 동족상잔이 예고되고 있었지만 이나라 정치인들은 여전히 진흙탕속에서 공허한 당파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그시절 박정희장군의 메모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정국은 난마와도 같이 헝크러지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만 커가고 있다. 가도가도 시관이 보이지 않는 정국의 불안정,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의 문란 이러한 도정으로 줄달음질 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일까.


공산당의 독소가 침투되고 잠식하기 쉬운 병약적인 사회 즉 공산당의 밥이 되는길 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여!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우리 다시 범할 것인가.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후손을 사랑하거든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사월혁명 정신을 다시 상기하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대정신으로 돌아가자."


혁명을 한달 앞둔 61년 4월 어느날....
박정희는 구미 금오산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한번 구국의 혁명을 다짐한다.


“황파에 시달리는 삼천만 우리 동포
  언제나 구름 개이고 태양이 빛나리
  천추에 <한>이 되는 조국통일 못잡으면
  내 민족 앞에 선혈바쳐 충혈원혼 되겠노라“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있거라
  삼사걸쳐 성공 못한 흥국일념(興國一念) 박정희는
  일편단심(一片丹心) 굳은 결의 소원성취 못하오면
  쾌도할복(快刀割腹) 맹세하고 일거귀향 못하리라.“


그 장면내각이 일년동안 4번째 개각을 했을때, 마침내 박정희는 혁명의 이름으로 분연히 일어났고, 부정와 부패과 부조리, 그리고 무능 까지 더한 장면내각에 철퇴를 가하였다. 한마디로 무능하고 부패한 친일파정권을 혁명으로 심판한 것이다.


5.16혁명을 폄훼하는 일부 혹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구국의 일념은 허울이고 철없는 군인들이 이기적인 동기로 일으킨 쿠데타이다. 평생 전쟁 기술만 배운 3,4십대 군인들이 세상과 나라, 인생과 역사를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이나라의 지식인라는 이름이 부끄러울정도로 한심하고 단순한 주장이다. 당시 군인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다. 미국 또는 외국 유학을 통해 정규화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만 1만명이었고, 이는 당시 외무부 공무원들보다도 비율이 높았다.


공무원이나 학자들 즉 민간인들의 유학생은 그 절반인 5천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선을 넘으며 신념화된 국가관이 투철했고, 과학적인 조직운영기술을 습득함으로 서 이미 관료조직을 리드할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혁명이후 장면내각을 사퇴시키고, 일거에 국가조직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은 그러한 역량이 십분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자유당-민주당정권으로 이어진 혼란스런 사회상에 지친 국민들 역시 혁명정부에 우호적이었고, 4.19에 참여했던 서울대 고려대 학생회도 5.16지지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대표적 지식인 장준하도 5.16은 4.19 정신을 이었다고 인정할 정도로 학생들과,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5.16이 4.19 혁명의 계승임을 분명히 했었다.


특히 장준하를 중심으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하여 발간한 [사상계]의 1961년 6월호의 권두언에 실린 5.16혁명(革命)과 민족(民族)의 진로(進路)라는 제하의 글은 5.16의 의미와 그 정의를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民族的) 활로(活路)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 4.19혁명(革命)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無秩序)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民族主義的) 군사혁명(軍事革命)이다.
- 따라서 5.16혁명(革命)은 4.19혁명(革命)의 부정(否定)이 아니라,계승(繼承),연장이 되어 야 하는 것이다.


5.16혁명(革命)과 4.19혁명(革命)에 대한 이보다 더 명쾌한 평가가 있는가?


후일 3공화국에 대한 평가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라 엇갈리게 되지만 적어도, 혁명 당시 양심세력이었던 학생, 지식인들의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었다. 순수 청년 학생들이 주체가 된 4.19가 미완의 혁명이었다면, 5.16은 당시 가장 개혁적이고 엘리트조직이었던 젊은 군인들이 민족주의 도상에서 완성한 혁명이었다.


쿠데타니 하극상이니 또는 군사정변이라고 떠드는 망언의 저변에는 비겁한 욕심과 기득권에 대한 미련이 숨어있는 것이다. 혼란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좌파거나 낡은 이념에 매몰된 일부 종북주의자 들이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순전히 얼치기 비양심세력에, 비겁한 친일 변절자들 인 것이다.
국민소득 100불도 안되는 지지리도 궁핍하고 피폐했던 시절에, 무슨 고매한 민주팔이 논리로 5.16을 평가절하 하는가?


자유민주주의는 백척간두에 서있었고, 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시기였다. 후일 김일성이 남한 적화통일의 천재일우 기회를 놓쳤다고 했던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란 구호가 이땅에 유행처럼 번지고, 김일성의 연방제 통일론에 남한의 좌파와 대중들이 속절없이 무너져가던 그때, 5.16 혁명이 없었다면 이 나라는 진작에 공산화가 되었거나, 가난과 혼란, 그리고 어둠이 지배하는 천덕꾸러기 국가로 오랜 세월 남아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그시절 누가 정권을 잡아도 그정도는 이룩할수 있었다는 가소로운 주장을 펴기도 한다. 자유당 10년, 민주당 1년 그 실상을 보고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것은, 박정희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다.


무인으로 살아온 20년, 국가지도자로 살아온 18년.
난세에 영웅이 나타난다는 것은 고금의 진리인가?
5.16혁명은 역사의 필연이자 순리였고, 이 나라의 홍복이자 대운이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 어느 누가 있어서 박정희의 업적을 대신할수 있을까?

훗날 정권의 입맛에 따라 인간 박정희와 박정희시대가 부침을 거듭해왔지만, 그것은 정권 의 질투와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시샘일뿐, 민초들의 정서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이나라 최고의 지도자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것이다.

5.16혁명은 5천년 가난을 몰아내고 민생고를 해결해준 <근대화 혁명>이자, 잠자고 있던 민초들에게 굴종의 정신을 타파하고, 민족혼을 일깨워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심어준 <정신혁명> 이었다. 


100년쯤 세월이 흐른뒤..
격동의 한국사를 기록한 국사책에는 과연 어느 대통령의 이름이 올려질까?
건국대통령 이승만, 근대화대통령 박정희, 아마도 나머지 한명은 미래의 통일대통령 이 될것이다. 그때쯤이면 비로소...


세종대왕과 비견될수 있는,
한국 현대사의 가장 역동적이고 위대한 지도자로 박정희 대통령이 당당히 올려질 것인가? 살아있는 역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것이다.


2009. 08. 26 풍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