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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6.25 한국전쟁 "북한군의 미군 포로 학살"

북한군의 미군 포로 학살



학살 생존자 맨링 일병의 넋나간 표정- 라이프지
유명 사진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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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7일 오후  낙동강 전선의 왜관 북방 303고지라는

곳에서 이틀 전에 포로로 잡힌 온전한 일개 소대의 미 1기병사단

병사들이 북한군에게 모두 학살당했다.

미군들은 이틀간 밥도 못 얻어먹고 맨발로 끌려 다니다가
총살 당하는
비운으로 젊은 인생들을 마감했다.


학살의 총탄세례 속에서 기적적으로 세 명이 살아남았다.  

위의 사진은 생존자중의 한 명이 18살의 로이 맨링 일병이다.

그들은 이틀 전 낙동강 왜관의 수마일 북동쪽 튀어나온 303고지

근처에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 북한군이 미군 방어선을 몰래

넘어 침투해 들어오자 대대본부에 증원을 요청했다.


학살 현장 303고지 -  남쪽에서 북쪽으로 본 사진
사진 오른쪽 아래 작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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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 본부로부터 한국군 60명이 곧 증파되니 기다리라는
회담이 있었다.   

소대가 회신을 받고 대기 중 하던 중 산 아래 과수원에서
한국군들이
나타나 접근해오는 것을 보았다.


당연히 한국군들이라 생각했던 미군들은 방심하고 그들이

수 십 미터 앞에까지 올 때까지 지켜만 보았다.

그러나 몇 십 미터 앞에서야 그 한국인 부대가 국군이 아니라

북한군임을 발견했다.


미군 소대장은 너무도 손쉽게 항복을 지시했다.
소대는 총 한방 쏘지도 않고 모두 포로가 되었다.

무기와 소지품을 다 빼았긴 미군 포로들은 굶은채
이곳저곳
끌려 다녔다.


학살된 포로들의 시신과 기도하는 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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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미군 포로들을 끌고 낙동강 건너로 복귀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방어선 뒤로 침투한 북한군을 발견한 미군은 강하게
압박해왔다.

미군들의 탈출을 두려워했던 북한군은 도중에 미군들의
군화를 다 벗기고
군화 끈으로 미군들의 손을 묶었다.

이에 저항하던 두어 명의 미군들은 북한군에게 타살되었다.


8월 17일 오후 서 너 시쯤, 북한군은 303 고지에서  

포로들을 데리고 내려가 20명씩 두 패로 나누어
양쪽의 도랑에 앉혔다.

그리고 느닷없이 포로들을 향하여 따발총을 난사했다.

북한군은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난사를 거듭했다.

삽시간에 도랑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손을 묶인채 학살당한 미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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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맨링은 다리에 총탄을 맞았다.

그는 상처에서 나오는 피를 머리에 바르고 쓰러진
죽은 
전우 시체의 밑으로 파고들었다.

줄끝까지 사격을 해서 미군들을 거꾸러뜨린 북한군들은

다시 돌아와서 권총으로 확인 사살을 했다.

죽은 체했던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팔에 총탄을 또

맞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미군 포로들을 모두 학살한 북한군 현장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군들이 303 고지로 전진해왔다.

맨링은 총 맞은 몸으로 그들을 향하여 비틀거리며 도망쳤다.

미군들은 그를 북한군으로 오인하고 사격을 하다가 그가

“사격중지! 난 미군이다!”하고 외치자 사격을 멈췄다.

미군들은 그의 총상을 응급처치하고 후방으로 후송했다.


맨링 이외에 두 명의 미군들이 총격을 입고 부상당했지만
살아남았다.

그들은 엘 파소 출신 로이 데이 일병, 다른 미군은 켄터기
살리에스빌
출신의 제임스 러드 병장들이다 .

맨링 구출 된 후에 미군의 계속된 작전으로 다음날 북한군
다수가
사살되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혔다.


학살에서 생존했던 미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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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이 학살당한 꼴을 보고 눈이 뒤집힌 미군 대대장은
생존 미군들에게
북한군 포로들을 보여주고 학살에 가담한
북한군을 찾아 내라고 명령했다.


맨링은 북한군 한명을 학살 가담자로 지적했다.

그는 미군에게 총질을 한 북한군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을 보자 공포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대장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고개를 돌려!”

그가 보자마자 고개를 돌린 북한군은 발포 명령을 내린
북한군 장교였다.


북한군에게 항복했던 맨링의 소대원 31명중 26명이 사살되고
4명이
살아남았다.

한명이 중상을 입은채 시체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열 명에서 열다섯 명의 다른 소대 소속 미군들이 맨링보다
먼저 항복해서
포로가 되었다가 역시 모두 살해되었다.


학살 생존자의 북한군 시체 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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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학살 생존 미군들이 모두 학살자라고 지적했던
북한군들은 북한군
105 전차사단 206연대 소속으로서
학살을 지휘했던 장교로서
김 광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사병으로서 사격을 했던 전 병덕이었다.

두 명에 관한 자료는 둘 다 현장에서 사살당하지 않고 부산으로

이송되어 구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끝으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학살 사건이 나자 미국 메스컴에 이사거니 대서특필로
크게 보도되고 미군들은 크게 경악했다.

그들은 항자불살(降者不殺)이라는 전장의 미덕은 북한군에게

한갓 공염불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황이 아무리 불리해도

죽을 때까지 저항했다.

더해서 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처형하는 나쁜 사례도 몰래 성행했다.

북한군으로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학살이었다.


미군 생존자의 북한군 학살자 색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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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포로들을 학살한 105사단[105여단이었슴]은 침공 선두
전차 여단으로
개전 첫날부터 그 지휘관 유경수가 그들 전차에
특공을 했던 국군 포로를
학살했고 서울 시내에 들어와서
전차를 몰고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 병원에 찾아가 
색출해낸 국군 장교 포로들을  학살한 악랄한
전차 중대장도 있었다.
 

학살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전통이 있었던
부대였다고 하겠다.

맨링은 1990년대 말에 한국에 돌아와 자기가 기적같이 살아났던
학살 현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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