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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님의 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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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  중앙일보

 

              

                        
                               박정희대통령의  혈서(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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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사전엔 4389명이 들어 있다. 비판자들은 의도가 불순하다고 공격한다.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해방 후 기득권 세력의 친일행위를 부각시킴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런 의도가 있다 해도 사전의 가치를 부정해선 안 된다. 사전의 하자(瑕疵)는 본질적인 존재가치와는 다른 문제다. 일부 허위가 있으면 사법적 책임을 물으면 된다. 좌파 인물이 빠졌다면 스스로 권위를 해친 것이다. 사전을 만든 이들의 성향이 어떻고, 친북파는 놔두고 왜 친일파만 때리느냐는 얘기도 부차적인 것이다. 존재가치로 볼 때 이런 식의 기록은 필요하다.

   물론 많은 경우 친일의 동기는 이해할 만하다. 일제 35년은 긴 세월이었다. 합병 초만 해도 국민적 저항이 있었으나 20년, 30년이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일제는 저항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살려면 순응해야 했다. 그래서 판사도 되고 국방헌금도 내고 일제를 칭송하기도 했다. 비판자는 프랑스를 말할 것이다. 프랑스는 나치 부역 혐의자 12만여 명을 법정에 세웠다. 하지만 두 나라는 다르다. 나치는 4년2개월, 일제는 35년이었다. 나치 점령이 20년, 30년으로 이어졌으면 프랑스도 단죄(斷罪)의 양태가 달랐을 것이다. 일제 35년은 그렇게 불가피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기록하는 건 다르다. 용서는 하지만 잊지 않는 것과 같다. 35년 동안 모든 이가 순종했다면 친일사전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적잖은 이가 가족을 위험과 가난 속에 버려두고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상하이로 떠났다.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친일사전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정의란 없다.

     대표적으로 박정희를 사전에 넣어야 한다. 최근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를 보냈던 사실이 드러났다. 23세의 초등학교 선생 박정희는 입학 자격이 19세 이하라는 걸 알고 특혜를 구했던 것이다. 그는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이라고 적었다. 박정희는 일본육사까지 나오고 만주국 소위가 된다. 만주가 어떤 곳인가. 항일투사의 피와 안중근의 혼백이 담긴 곳이다. 그런 땅에 박정희는 독립투사가 아니라 일본 괴뢰국의 장교로 갔다. 그것도 혈서를 쓰고…. 혈서가 있는데도 그가 사전에서 빠진다면 사람들은 정신적 혼란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와 기록이 다른 것처럼, 기록과 평가도 달라야 한다 역사적 평가는 인생 전체로 이뤄지는 것이다. 한 부분에 친일행위가 있다 해서 인생 전체가 친일은 아니다. 친일행위와 친일인생은 다르다. 친일행위가 있어도 해방 후 건국·반공(反共)수호·근대화, 그리고 언론창달에 기여했다면 그는 애국자다. 친일행위가 있다 해서 안익태의 애국가와 서정주의 시가 상처를 받는 건 아니다.

                 나폴레옹의 조국 코르시카는 프랑스 식민지였고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식민모국(母國) 프랑스의 심장부로 들어가 장교가 되고 황제가 되었다. 리콴유의 조국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리콴유는 식민모국의 심장부에 가서 변호사가 되었다. 그런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살렸다. 박정희도 식민모국 일본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그가 이룩한 근대화 조국이 많은 부문에서 일본을 따라잡았다. 하면 박정희는 친일파인가 극일(克日)파인가.

     살아 있다면 박정희는 친일사전에 대해 뭐라고 할까. “내 이름을 빼선 안 된다”고 하지 않을까. 박정희는 일본과 연결된 과거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1961년 대한민국 최고권력자란 신분이 되었는데도 드러내놓고 일본육사의 은사(恩師)를 만나려 했다. 대통령이 돼서는 만주군관학교 동창생을 중용했다. 그런 박정희가 친일사전을 피했을까. 거목은 가만히 있는데 바람만 분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대한민국이 왜X들로부터 해방된지 6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왜 국론을 분열시키려는지 범부인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그것도 국민의 혈세를 사용해서 말이다.

 

  물론 왜X 들에게 나라를 적극적으로 팔아먹고, 사리사욕을 채웠다고 역사시간에 배운자들과, 비록 역사시간에는 배우지 않았으나 애국지사들을 못 살게 군 악덕 친일인사들을 응징하는데 까지는 나도 찬성한다.  그러나 논란이 있는 부분은 반드시 빼놓고 발간을 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35년간이나 왜X들에게 국권을 찬탈당한, 식민국민이었다. 이사실을 망각해서는 절대로 되지 않는다. 

 

  35년이라는 기나긴 질곡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 그 당시를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모두가 친일일수도 있고, 또 악덕 친일파를 제외하면 모두가 애국지사 일 수도 있다.

 

  보는 관점에 띠라, 할복자결을 하여야만 애국지사인가???????

  반드시 총을 들고 독립군에서 근무해야만 애국지사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왜X 군대가 사용할 도로를 건설하는데 강제로 동원된 선조들은 왜 매국노인 친일인사로 발굴하여 게제하지 않는가?????????

 

  왜X 교장이 근무하는 학교에서 왜X의 국가를 부른자들은 왜 인명사전에 게제하지 않는가???????????

 

  6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오늘에 있기까지, 조국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명예를 더럽히는가?????????

 

  친일인사인 박정희 대통령님의 지도력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이 번영하고 있는데, 지금에와서 그분의 명예에 흠집을 내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짓거린가??????????  그분의 지도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역사에서 가정을 해서 죄송합니다) 

 

  손자병법에 의하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고 하지 않았던가!!!!!!!!!! 

 

  국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분들을 지금에 와서 왜????????????

 

  친일인사인 안익태선생께서 만드신 애국가를 왜 지금도 불러야 하나요????????

  지금당장에라도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다시 제정해야지요!!!!!!!!!!!

  그 동안 불렀던 애국가는 친일 이고 일본을 찬양한 노래이었던가!!!!!!!!!!!

 

  이등박문을 폭살한 민족의 쾌거를 이룩하신 안중근의사님의 아드님이 친일행적을 많이 하였다고 (김구 선생께서도 대노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그 아드님을 생산하신 안중근의사님을 친일이라고 매도할 것인가????????????????

 

  안중근의사님의 아드님 입장에서 본다면, "총칼을 쥔 왜X 총리를 지낸 X 을 폭살한 아버지로 인한 삶이 얼마나 곤궁하였으면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겠느냐"고 는 생각할 수 없는가??????????????????????

 

  또 왜X 입장에서는 안중근 의사님의 아드님을 친일로 돌림으로 인한 "상징성"을 감안하여 얼마나 집요하게 회유나 협박을 하였겠느냐는 식의 당시의 시대상황을 오ㅔ 고려하지 않는가??????????

 

  "시일야방성대곡" 이라는 사설을 학교에서 열심히도 읽고 쓰고 외웠다. 이를 쓰신 장지연선생께서도 친일사전에 올랐다고하니...........

 

   박정희 대통령님께 투표하신 모든 대한민국국민, 애국가를 가르치고 부른 모든 대한민국국민, 안중근의사님을 존경하신 모든 대한민국국민, 장지연선생의 사설을 읽고감격해 했던 모든 대한민국국민............

   이들도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여야만 하는가!!!!!!!!!!!!!!!

   

 

 

  미국의 초대 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미국이 건국하기전인 식민지 시절에 영국군으로 복무한 적이 있다는데.  미국에서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을 매국노로 폄하하던가???????

 

  35년 이라는 길고도 긴 질곡의 세월속에서 살아남아야만 조국의 광복을 이룰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때 모든 대한민국국민이 할복자결을 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이 있겠는가????????

 

  원죄로 따지자면,  우리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조선의 건국 시조인 태조 이성계부터 고종황제까지 모두를 민족의 반역자로 단죄해야만 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서울에 있는 조선의 모든 흔적들을 불살라 버리고, 이제야 대한민국의 자존을 지켰다고 세계만방에 고해야만 옳은것 아닌가???????????????

 

 

  지금도 왜X들은 35년간의 식민통치가 대한민국 발전의 주춧돌이 되었다는 망언을 계속하지 않는가????????

 

  이 인명사전은 이러한 왜X들의 망언에 묵시적인 찬성을 보내는, 새로운 친일 매국행위라고 단정하고 싶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여러가지라고 하지만,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참여한 분들이 세상을 보는 눈은 "나 이외에는 전부 잘못된" 식으로 생각하는 비관적인 사고만을 가진사람들이 아닌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대한민국국민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보자. 과연 우리 모두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아 왔다고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 민족앞에서 떳떳하게 자신할수 있는가!!!!!!!!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목숨을 내 던지신 숭고한 분들에게 떳떳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 시대의 시대상황에 맞게 해석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친일인명사전발간에 목메인 자들은 과연 일본과 일본X 들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지금이라도 왜X들을 폭살 시키던지, 아니면 하다못해 돌팔매질이라도 해야만 되는 것이 아닌가??????????????????????

 

 

 

   발간에 목멘 분들의 사상

 

 

에 의심이 든다.

 

 

 

 

두서없는 글로 인하여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이 있다면,  사과드립니다.  단순히 나 개인적인 생각일 따름임을 밝힙니다.

 

 

 

 

관련기사  :  조선일보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57] 일본 유학생들의 나라사랑


     1909. 8. 29.~1910. 8. 29.

   "도쿠가와 시대에 우리나라 선왕이 내조한 것은 역사상에도 전무하거늘 일개 인형공장이 무근거한 괴괴한 인형을 망조(妄造)하여 이웃나라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데 관청에서 보고도 못 본 체하니 이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1906년 10월 27일 일본 유학생 이우진(李祐珍)과 류승흠(柳承欽)은 산책 도중 도쿄의 한 인형 제조점에 들어갔다가 괴이한 인형을 발견하였다. 구막부의 도쿠가와(德川家康) 쇼군에게 우리나라 선왕이 납공 내조하여 뜨락 아래에 엎드려 절하고 있는 형상의 인형이었다. 이에 분개한 두 유학생은 경찰서로 찾아가 경찰서장에게 항의하였던 것이다.


 

 
 
 
 
 
도쿄 권업 박람회장
 
 

   '인형을 속히 처분하라'는 한국 유학생들의 요구에 일본 경찰은 두 학생의 충절을 칭찬하면서 인형의 매매를 금지하는 한편 그러한 기괴한 인형을 제조하지 못하도록 하는 엄령을 내렸다. 유학생들의 역사 왜곡 시정 요구에 어떻게 일본 경찰이 선뜻 받아들여 처리할 수 있었을까? 유학생들은 '국제상 교의에 위반'되므로 '한일 양국의 돈의를 생각하여' 인형을 처분해 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일본 유학생들이 간행하던 태극학보는 이들의 지혜로운 행동을 '양씨 의거'라는 제목으로 제4호(1906년 11월 24일)에 게재하였다.

   태극학보 제11호(1907년 6월 24일)에는 이와 유사하게 한국인을 모독하는 '박람회 내 한국 부인 사건'의 전말이 게재되었다. 당시 대성황을 이룬 도쿄 권업 박람회장 조선관 안에는 관람용으로 한국인 부인 1명과 통역 1명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 모델은 '천업에 종사하는 여인 복장인 데다가 붉은 연지를 덕지덕지 발라 각국 관람인으로 하여금 일종 괴괴(怪怪)한 관념을 불러일으켰다.' 이를 본 한국인 유학생들이 놀라 조선관 책임자에게 항의하니 한국 여인을 고용하여 그렇게 한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내부 참서관 민원식(閔元植)

 

 

   이에 '몇 년 전 오사카박람회에서 간상배가 한국 부인 2명을 야만 인류관에 두고 관람료를 받았던' 사례와 다를 바 없다면서 한국의 '체면을 손상'하는 '중대한 모욕'이므로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계약을 해지하고 여인을 귀국시키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내부 참서관 민원식(閔元植)이 마침 일본에 와 있다가 유학생들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수백 원을 일본인에게 지불하고 한국 여인을 귀국시켰다. 일본인들은 한국을 천박하거나 야만적인 사회로 보고, 박람회장에 한국인을 모델로 고용하여 구경거리로 삼는 짓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유학생들이 힘을 합쳐 한국인이 모욕당하는 사태를 막아낸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들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실망스러웠다. 류승흠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여 중추원 참의에까지 올랐다. 민원식은 친일여론 조성에 앞장서 참정권 운동을 벌이다 도쿄에서 양근환 의사에게 처단당하였다. 젊은 시절의 순수한 뜻을 오래 지키기 어려움을 이들의 삶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서구인들이 담아낸 구한말의 일상과 전쟁

 

 

   아무리 민족에 대한 충정을 가진 분들이라 할 지라도 그 질곡의 세월 35 년을 이겨내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류승흠과 민원식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