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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선진국의 자격과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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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재칼럼]

- 진짜 선진국의 자격과 국적 -

 

1·4 후퇴 피란살이에서 돌아온 그 해 봄 학교에 들어갔다.

컴컴한 군용천막 속 흙바닥에 거적을 깐 교실에서 책상도 없이 엎드려 공부하는 가교사 학교였다.

그러다가 개다리 소반 같은 상을 메고 가서, 그 위에 책과 노트를 펴놓고 공부했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학교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었다.
벚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공부하는 여름이 좋았다.

퇴비 풀 숙제는 싫었지만, 어둡고 습기 찬 교실을 벗어나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어 새 교실이 생겼다.

판자로 지은 교사였어도 나무 향이 나는 교실이 너무 좋았다.
학교에서 우유가루나 옥수수가루 배급이 있는 날은 오래 결석하던 아이들도 다 나왔다.

농사 일 거드는 것보다 낫다고 어른들이 등을 떼밀었다.

그런 때면 이튿날부터 배탈난 아이들로 냄새나는 변소가 한동안 붐볐다.
교과서마다 뒷장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악수하는 그림이 선명했다.

미국이 제공한 종이로 만든 책이었다.

교회에 다니는 애들은 구제품 옷을 줄여 입고 다녔다.

빨아서 다려도 한번만 앉으면 무릎이 쑥 나오는 삼베나 무명옷에 비해,

얼마나 따뜻하고 질기고 맵시 나는 옷이던가.

그 옷에서 나던 향내가 방충제 냄새라는 것을 안 것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뒤였다.

꿈같은 개발원조위원회 가입
까맣게 잊었던 옛일이 떠오른 것은 이제 우리도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뉴스 때문이다.
살아생전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의 이야기 같지 않다.

1996년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한 것도 대단한 일이었는데,

진짜 선진국 회원자격이라는 개발원조위원회(DAC·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 회원증이라니

꿈만 같지 않은가.
중학교 3학년 겨울,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서울에 오던 날 너무 추위에 떨어 지독한 감기에 결렸다.

영하 20도 혹한의 새벽 신작로에서 세 시간 넘게 버스를 기다리다가 얻은 감기가 기관지염이 되어

평생 고질병이 되었다. 그 뒤로 값싸고 따뜻한 방한복만 보면 그 때 일이 억울해진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째인 1962년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연간 82달러였다.

그때 아프리카 가나300 달러, 북한은 200달러였다고 한다.

 

세계에서 한국보다 더 가난한 나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가나의 국민소득이 500달러, 북한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한국의 DAC 가입은 이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놀라운 뉴스다.
받기만 하던 나라가 주는 나라가 된 사례는 없었다는 사실도 우리를 기쁘게 한다.

제대로 빚을 갚게 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동양적인 윤리도덕관이 아니라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일이니 홀가분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소식을 전한 26일 아침 어떤 신문은 ‘진짜 선진국이 되었다’는 제목을 달았다.

OECD 33개 회원국 가운데 스물네번째로 DAC에 가입함으로써

‘반 선진국’에서 진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 당국도 “신흥 공여국 지위를 벗어나 선진 공여국으로 공식 인정을 받아, 국격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선진국 원조클럽에 들어갔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선진국이 된 것인가.
DAC 규정에 따르면 아직 한국은 회원자격 미달이다.

OECD 국가의 평균 원조액은 국민순소득(GNI) 대비 0.28%이고, 자격기준은 0.2%로 규정돼 있다.
우리는 2000년 이후 0.1%도 채워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회원국들이 만장일치로 가입을 승인한 것은,

받기만 하던 나라가 주는 나라도 될 수 있다는 성공의 모델로 한국을 택한 것일 뿐이다.

2015년까지 0.25%로 DAC 비율을 올리겠다는 약속과,

2011년 제4차 DAC 회의를 유치한 ‘성의’를 높이 산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대외원조액은 국민소득에 비하여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액수도 적었지만 조건 없는 비구속성 원조가 적어, 개도국 지원에 인색하다는 평판을 들어 왔다.

오죽하면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창피스러운 수준”이라고 말했을까.

아직 부끄러운 대외원조액
물론 돈을 많이 낸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동 산유국들이 돈은 많아도 선진국이 못 되는 것과 똑같은 원리다.

외교부 당국은 국격이 높아졌다고 말했지만, 그것도 낯간지러운 말이다.

우리는 빚을 갚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인사도 닦지 못하였다.
6·25 전쟁을 도와준 참전 16개국에 대하여 우리 정부가 예를 갖추어 공식적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한 일이 있었던가.

‘국격’을 입에 담는 것은 스스로 인격자를 자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진짜 선진국’도 남들이 인정해주어야지,

우리 스스로 입에 담는다면 자화자찬이 되고 만다.

 

- 내일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