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urrent I

해외 재난구호체계, 한국은 '천막진료 수준'

해외 재난구호체계, 한국은 '천막진료 수준'

  • 입력 : 2010.01.22 06:25

선진국은 종합병원을 그대로 옮겨 놓는데…
소규모 진료팀이 대부분 전신마취 설비 등 못갖춰
수술실 운영도 엄두 못내 "國格 맞는 대응체계 시급"

'종합병원' 대 '천막 진료소'. 대규모 지진 피해를 본 아이티에 각국의 의료지원이 봇물을 이루는 가운데, 선진국들은 정부 차원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장비를 대거 싣고 와 현지에 야전 종합병원을 차린 반면, 한국은 천막 친 진료소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G20(주요 20개국) 정상 회의를 유치하고, 해외원조를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나선 나라의 국격(國格)에는 한참 못 미친다는 지적이다.

선진국, 종합병원 그대로 옮겨놔

지진 발생으로 아이티엔 팔다리 두개골 골절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외상에 따른 복강 출혈이나 내부 장기 손상 환자들도 쏟아져 신속한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진으로 의료시설은 파괴되고, 수술에 필요한 전기와 물 공급도 끊어졌다. 의료 인프라가 전무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일본은 지진 발생 후 48시간 안에 대형 컨테이너 30여 개를 비행기로 날라 아이티에 소규모 종합병원을 차렸다. 컨테이너 박스는 서로 연결돼 순식간에 종합병원으로 변신했다. 여기에는 수술실, 회복실, 중환자실, 일반 병동, 의료기기 소독실 등 완벽한 형태의 의료 시설이 들어섰다. 24시간 수술이 가능한 대용량 발전기와, 구정물도 식수로 사용할 수 있도록 걸러주는 정수기도 작동되고 있다. 모두 긴급 재난 상황에서 '이동형 종합병원'을 만들 수 있도록 사전에 제작된 세트들이다. 비용은 200억~300억원쯤 한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프랑스가 세운 야전 병원 의료진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프랑스는 12명의 의료진을 아이티에 파견해 야전 병원을 세웠고, 지진 현장의 구조팀과 신속하게 연락하기 위해 첨단위성통신 장비도 갖췄다. /AFP 연합
일본은 이 같은 병원 세트와 진료에 쓰일 약품의료기기 등을 공항에 항상 비치해 놓고 있다. 해외 재난이 발생하면 수송기로 즉시 실어 나르기 위해서다. 재난 발생 뒤 이틀 안에 진료가 가능하도록 하는 게 일본 국제협력단(JAICA)의 목표다. 재난 피해 환자들에게 48시간이란, 치료를 받느냐에 따라 생명이 엇갈릴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다.

진료를 담당할 의료진은 대학병원별로 한 팀에 6명씩 대기하고 있다. 통상 4개 팀을 묶어, 외과 내과 등 분야별로 20여 명의 의료진이 전용기를 타고 현지로 출동한다. 이들은 모두 평소에 재난 발생 시 응급 환자 분류 요령, 처치법 등을 40~50시간 교육받은 의료인들이다. 일본 정부는 이들 병원에 인력 공백에 따른 인건비를 지불한다. 이후에는 자위대가 치안을 위해 파견된다.

대한재난응급의료협회 서길준(서울대 의대 응급의학과 교수) 이사장은 "미국도 재난 상황에 대비해 각종 의료 세트와 대응팀을 사전에 구성해 놓고 6시간 이내 출동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이번에도 많은 팀이 아이티 현장으로 즉시 날아갔다"고 말했다.

현재 아이티 지진 피해 현장에는 일본을 비롯, 미국·프랑스·노르웨이·요르단 등 9개국이 이 같은 이동형 종합병원을 설치해 운영 중이다. 프랑스는 의사 12명을 파견하여 고등학교 운동장에 야전 병원을 설치했다. 지진 현장 구조팀과의 신속한 교신을 위해 첨단 위성 통신 장비도 갖추고 있다.

선진국들이 재난 현장에 세우는 야전 병원의 모식도(模式圖). 보통 30여개의 컨테이 너를 연결해 만드는데, 수술실과 병동을 갖춘 야전 병원이 하루 만에 완성된다. /Normeca(노르웨이 재난구호의료장비 회사) 제공

한국은 천막 진료소

한국은 의사 3~6명과 의료진 10여명이 아이티 지진 피해 현장에서 천막 치고 의료봉사활동에 참가하는 수준이다. 그것도 정부가 아니라, 대부분 대학병원과 민간단체들이 주선한 소규모 진료 팀이다. 전기 발전 용량이 작아서 수술실을 운영할 형편이 못 되고, 전신 마취할 설비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이 갖고 있는 이동형 종합병원 세트는 국내에 없다.

설사 수술하더라도 병동(病棟) 시설이 없다. 대형 정수 설비도 없어 마실 물을 국내에서 가져가기에도 짐이 벅차다. 골절 환자에게 부목 대주고, 살이 찢어진 환자에게 봉합술을 해주고, 설사 고열 등 내과적 질환을 약물 치료하는데 그친다. 물론 이런 의료지원 활동도 현지에는 큰 힘이 되지만, 좀 더 실질적인 구호활동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2005년 인도네시아 쓰나미, 2007년 파키스탄 지진 피해 현장 등에 긴급구호 활동을 다녀온 의사들은 우리의 해외재난 대응 체계가 선진국과 비교해 민망한 수준이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대 의료정책실 권용진 교수는 "일본·호주·독일 등은 군함에 트럭과 중장비까지 싣고 와서 국기 꽂고 병원을 세우는데 우리는 삽으로 배수구 파서 텐트 진료소 설치하는 형편"이라며 "정부와 국회에 해외 응급구호 지원 체계 혁신을 수차례 건의했으나 묵묵부답이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응급의학과 신상도 교수는 "선진국들은 적극적인 해외 의료지원을 제3세계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한다"며 "정부 차원의 대규모 시설과 장비 지원이 없으면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형 재난을 대비한 의료기기와 물품 등은 국내 재난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대한병원협회 이왕준 정책이사는 "해외 의료지원 활동을 하려는 국내 의료진은 많지만 진료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 국격에 맞는 좀 더 체계적인 해외 재난 대응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