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실종 경제 / 유강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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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기타를 고치러 서울 종로 낙원상가에 갔다. 아내가 얼마 전 딸아이에게 기타를 사준 모양인데, 냉장고에 기대둔 기타가 넘어지면서 줄 하나가 끊어졌다.
상가에 들어서니 기타 가게를 기웃거리는 이들이 꽤 많다. ‘세시봉’이라는 1970년대 음악감상실에서 노래하던 이들이 방송을 타면서 덩달아 기타의 인기도 치솟았다더니, 정말로 그런 듯했다. 살다보면 세상의 유행과 한 번은 꼭 마주치게 된다.
거리로 나오니 미니스커트나 핫팬츠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활보한다. 옷의 길이가 짧다는 말로는 모자랄 정도로 짧다. 엉덩이까지 내려온 재킷에 가려 뒤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요즘 유행하는 ‘하의실종’ 패션이란다. 상의는 길게, 하의는 짧게 입어 다리를 강조하는 게 특징인데, 언뜻 보면 하의를 입지 않은 듯해 붙여진 이름이라나.
인터넷 검색창에 ‘하의실종’을 치니 연예인 이름이 쏟아진다. 어떤 배우에겐 ‘원조’라는 딱지가 붙고, 어떤 가수에겐 ‘종결자’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하의실종 패션을 입으려면 근육과 지방이 적절하게 조화된 허벅지와 종아리가 필수라며 성형수술을 권하는 광고도 줄을 잇는다. 레이저니 초음파니 수술법도 다양하다.
백화점에서도 하의실종 패션이 대세인 모양이다. 손님들이 긴 셔츠나 짧은 원피스만 찾고, 여기에 어울리는 미니스커트나 핫팬츠만 집는 바람에 진열대의 90% 이상을 이런 종류의 상품으로 채운 매장이 많다고 한다. 한 대형 인터넷 쇼핑몰에선 올봄 핫팬츠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갑절 이상 늘었다. 3∼4월은 블라우스나 티셔츠 같은 옷이 잘 팔리는 철인데, 올해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단다.
패션업계엔 경기가 나쁘면 치마가 짧아진다는 속설이 있다. 불황기엔 패션업체들이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옷의 길이를 줄인다는 데서 비롯했다. 실제로 2차대전 당시 영국은 옷감을 아끼려 치마를 짧게 입으라는 법령까지 제정했다. 1970년대 지구촌을 휩쓴 석유파동 와중에는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격적인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다. 불경기에는 소비자들이 우울한 심사를 달래려 화려한 색상과 과감한 패션을 선택한다는 심리학적 연구도 이 속설의 근거로 쓰이곤 한다.
경제학에선 이런 일치를 우연의 산물로 치부한다. 미국 컬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의 폴 니스트롬 교수가 쓴 <패션경제학>이라는 책을 보면, 불경기엔 오히려 치마가 길어졌음을 보여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여성의 치마는 경기가 호황을 구가하던 1920년대엔 무릎까지 올라갔으나, 1930년대 대공황이 닥치자 발목까지 내려갔다. 경기 변동과 치마 길이의 상관성은 그때그때 달랐던 셈이다.
하의실종 패션은 우리 경제의 어떤 상태를 반영하는 것일까? 한국은행은 최근 발표한 통화정책 방향에서 “국내 경기는 해외 위험요인이 상존하지만 상승 기조를 계속 이어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역시 한국은행이 내놓은 2010년 가계금융조사 결과를 보면 최근 6개월간 이자를 제때 내지 못한 가구가 조사 대상의 13%에 이르렀다. 이자를 연체한 이유로는 ‘소득 감소’가 47.3%로 가장 많았다. 경기는 좋다는데 가계에는 빚이 쌓이고 있는 형국이다.
경기도 패션처럼 체감이 중요하다. 올해 1분기 우리 경제(국내총생산·GDP)는 성장세를 이어갔으나, 국민들의 실질구매력(국내총소득·GDI)은 2년3개월 만에 감소세로 돌아섰다. 기업들은 돈을 벌었지만 국민들의 호주머니 사정은 오히려 나빠진 것이다. 제조업이 3.2% 성장했으나 건설업은 6.1% 감소하는 등 업종별 양극화도 심했다. 아랫목만 있고 윗목은 없는 ‘체감실종’ 경제였던 셈이다.
유강문 경제·국제 에디터moon@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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