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피를 부르는 독재자 카다피의 최후,
결국엔 목숨 구걸..
카다피의 사망 소식에 리비아 국민은 환호했다.
트리폴리·미스라타·벵가지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승리를 자축했다.
▲ 청년 카다피
카다피는 27세 청년이던 1969년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1942년 6월 7일 리비아 중부 지중해 연안 도시 시르테에서 태어난 카다피는
벵가지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다 군에 투신했다.
27세 육군 대위 때인
1969년 9월 1일 벵가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세웠다.
정권을 잡은 후 쿠데타 동지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1인 체제를 구축하여
자기 부족인 카다파족을 중심으로 정권 기반을 구축하고
저항하는 세력은 철저히 응징했다.
그러나 가족과 자신은 치부했지만 국민의 요구에는 귀를 닫았다.
"중동의 미친개"
카다피는 집권 이후 반(反)서구의 선봉을 자처하여
1972년 미국·영국 등 서방에 맞서 이집트·시리아 등과 함께 전 세계 아랍 민족이 단결하는
단일 아랍국가 건설을 추구했으나 주변국의 호응이 약해 실패했다.
1975년에는 인민이 직접 통치에 참여해 권력을 행사한다는 정치 이론을 담은 '
그린북'을 통해 자기 정치 이론을 설파하고 1977년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했다.
그는..
1980년대에는 서구에 대한 테러리즘을 호소했다.
1986년 서베를린 미군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사건.
1988년 270명이 사망한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 등
서방 세계에 대해 잇따른 테러를 벌여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2003년 이후에는 팬암기 사건 유족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며
서방과 유연한 관계를 갖기도 했으나 그는 국제사회에서 불편한 존재였다.
2008년 '범아프리카주의'를 선언하면서 "리비아 남자들은 흑인 여자와 결혼하고,
리비아 여자들은 흑인 남자와 결혼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2009년 처음 참석한 유엔 총회장에서 그는 당초 예정 시간 15분을 넘겨 90분간 연설하면서
서구는 식민주의의 대가로 아프리카에 72조7700억달러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를 '테러 이사회'라고 부르면서 유엔헌장을 찢기도 했다.
2009년 카타르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의에서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중왕'이라고 불러 빈축을 샀다.
집권 기간 중 최소 5차례 암살 위협을 받으며 일정한 곳에서 잠을 자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카다피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잠을 자는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그는 자주 베두인 텐트에서 기거하고 40여명의 미녀 경호원이 그의 신변을 지켰다.
지난 8월 21일 트리폴리 함락 때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의 은신처로 고향 시르테와 사막 도시 사브하 등이 거론됐지만 두 달 가까이 그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카다피에게는 부인 사피아와 7남 1녀가 있다.
넷째 아들 무타심도 20일 시르테에서 시민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무타심은 카다피의 후계자로 거론됐었고 알사누시 역시 카다피의 오른팔로 통했던 인물이다.
▼ 카다피의 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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