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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두 탕 뛴 정명훈, 생애 첫 피아노 독주회에다 몇시간 뒤 지휘까지


  • 하루 두 탕 뛴 정명훈, 생애 첫 피아노 독주회에다 몇시간 뒤 지휘까지

  • 고은영
    피아니스트
    E-mail : 21c.muse.key@gmail.com
    홀로 남겨져야 할 때 하나의 친구를 선택한다면 아마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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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3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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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나의 첫사랑이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27일 예술의 전당에서 피아노 첫 독주회를 열며 고백했다. 지금은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활약 중이지만 그의 음악 인생에 첫 발걸음은 피아노였다. 정명훈은 5세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2위 입상 기록을 남기며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76년 뉴욕 유스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시작으로 그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쌓아나갔다.

작년 12월 생애 첫 피아노 독주 앨범을 내놓으며 고국에서 40년 만의 첫 피아노 리사이틀 5개 도시 순회 연주가 시작됐다. 그 세 번째 투어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다. 합창석까지 오픈해 2500석이 넘는 무대에 정명훈의 피아노 뵈젠도르퍼만이 조명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번 연주를 위해 자신의 피아노를 가져오는 정성을 보였다. 객석을 가득 채운 채 고요함이 유지되고 있던 그때 텅빈 무대에 검은 셔츠에 카디건을 걸친 편안한 차림의 마에스트로가 등장했고 청중은 박수로 환호했다. 이미 무대는 가득 찬 느낌이었다.

가볍게 인사하고 피아노 앞에 앉은 정명훈은 마이크를 잡고 짧은 인사를 전했다. 먼저 콘서트 날짜를 옮겨 미안하다는 말과 오늘의 콘서트의 취지에 대해서였다. ECM 프로듀서로 있는 둘째 아들 권유로 어린이들을 위한 피아노 음반 작업을 하게 되었고 자신은 태어나기 9개월 전부터 음악을 들었다는 것이다. (관객웃음) 거장의 음악을 듣기 위해 긴장을 하고 있던 청중에게 더없이 친숙한 격의 없는 인사말이었다.
하루 두 탕 뛴 정명훈, 생애 첫 피아노 독주회에다 몇시간 뒤 지휘까지
첫 곡은 드뷔시의 달빛. 이 음악은 손녀딸 루아(포르투칼어로 ‘달’이라는 뜻)를 위한 음악이라고 소개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정명훈은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더니 바로 건반에 손을 내려 연주를 시작했다. 이어지는 피아노 음향. 정명훈의 달빛은 피아노 건반과 현에 의한 소리가 아니라 음향 자체였다. 인상파 화가의 화폭이 펼쳐지듯이.

이어지는 쇼팽의 녹턴 D♭장조. 어느새 눈을 감고 듣게 되었다. 굳이 연주자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있을 뿐이고 그가 듣는 피아노 소리가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듯했다. 그는 마치 피아노를 손가락이 아니라 귀로 연주하는 듯했다. 그의 음악적인 힘은 분명히 귀로 듣는 것에서 오는 것이었다. 얼마만큼의 소리를 내야 할지 어느 만큼의 터치를 해야 할지 매 순간 귀로 조절하고 있었다.
그에게 피아노와 손가락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미스터치도 있었지만 왼손의 비화성음을 강조함으로써 야상곡은 드뷔시의 달빛과 연결되어 어슴푸레한 아름다움을 전해줬다. 이어서 슈만의 아라베스크와 슈베르트 즉흥곡 E♭장조와 D♭장조. 그리고 우리에게는 ‘작은 별’로 친숙한 멜로디를 사용한 모차르트의 12변주곡 ‘아, 어머니께 말씀드리죠’로 1부는 마무리되었다.

2부 프로그램은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 OP.119와 쇼팽 발라드 1번과 4번 두 곡. 1부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이었다면 2부는 어른들을 위한 음악이었을지 모르겠다. 한 곡 연주하고 박수가 이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자리에 앉은 채 짧은 목례로 답할 뿐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잘 안 된 부분을 다시 한 번 소리없이 연주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고 슈베르트 즉흥곡을 연주하고 나서는 아이들이 더 잘 치는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두 시간가량의 리사이틀이 끝나고 나서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해서 박수로 환호하는 고국의 청중을 위해 정명훈은 네 번의 앙코르연주를 들려줬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가을 노래’, 쇼팽의 녹턴 C#단조,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그리고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꿈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슈만의 ‘꿈’으로 거장은 마지막 무대를 장식했다.

이번 리사이틀은 분명히 여느 피아노 독주회와는 달랐다.
첫째 연주 일정이다. 5개 도시 순회 연주를 석 달에 걸쳐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피아니스트는 독주회가 잡히면 일정 기간 전부터는 약속도 하지 않고 심지어는 전화도 받지 않은 채 연습에 몰두하며 심신을 조절한다. 더군다나 2시간가량의 긴 프로그램을 석 달 동안 최고의 컨디션으로 연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명훈은 리사이틀을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담고 다니던 음악을 편안하게 풀어놓은 듯했다. 마치 자그마한 살롱 음악에서처럼 청중들에게 가볍게 즐기라고 권하는 듯했다.

또한 이날 정명훈은 오후 2시 피아노 리사이틀에 이어 저녁 8시 같은 장소에서 서울시향 지휘에 나섰다. 하루에 두 개의 공연을 소화해낸 것이다. 누가 감히 이런 스케쥴을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원래 피아노 리사이틀 서울 공연은 16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빈 국립 오페라단 지휘로 불가피하게 스케쥴 조정에 나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더라도 대단한 도전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피아노 독주를 먼저 하고 저녁공연이 오케스트라 지휘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지휘보다 피아노를 좋아하지만 피아노 연주가 더 어렵다는 정명훈의 말처럼 암보(악보를 외워 기억함)로 혼자 무대를 책임져야 하는 피아노 독주는 그만큼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명훈./조선일보DB
피아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명훈./조선일보DB
두 번째, 프로그램 자체가 달랐다. 피아니스트는 독주회를 생각할 때 레파토아 선정에 신중을 기한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곡이면서도 자신의 기교를 맘껏 뽐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물론 청중도 테크니컬한 피아노 연주를 기대한다. 그러나 정명훈의 레파토아는 달랐다. 1부 프로그램은 어려서 피아노를 시작한 아이라면 초등학교 때 이미 배우는 곡들이었다. 물론 어린이를 위한 피아노 음악이라는 음반 발매에 따른 곡선정이었지만 젊은 피아니스트라면 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자신의 기교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어렵지 않은 곡 안에 음악을 담아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연주 중간 중간 피아노 앞에 앉은 채 편안하게 얘기를 이어가는 모습,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을 인정하는 정명훈의 솔직함이 오히려 프로다웠다. 완벽한 피아노 연주를 기대했던 청중이라면 다소 실망스러운 리사이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꾸미지 않는 그의 진솔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음악을 통한 거장과의 대화였다.

환갑이 되면 일로서가 아니라 진짜 음악을 하고 싶었다는 정명훈!
지금까지 지휘자로 99%, 피아니스트로 1%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자신에게 피아노야말로 진짜 음악이라고 했다. 피아노로 연주할 수 없는 훌륭한 작품들을 표현하기 위해 지휘를 택했던 것처럼 지휘로서 풀어내지 못한 진짜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것일까? 오늘 그의 무대는 피아노 연주자(piano player)의 연주가 아니라 평생 음악인으로 살아온 그의 음악인생을 듣는듯한 연주였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