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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뚫은 혈로, 미군이 앞장서자 부하들은 "이럴 수 있느냐"면서 울분


  • 우리가 뚫은 혈로, 미군이 앞장서자 부하들은 "이럴 수 있느냐"면서 울분

  •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E-mail : q5423q@hanmail.net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출생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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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12.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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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우야 잘 자라

쇠사슬에 묶인 북 기관총 사수

먼저 12연대장 김점곤 중령과 함께 둘러본 적의 점령지역은 참혹했다. 북한군 진지 여기저기에서 일어나 항복을 하는 기관총 사수들의 발목에는 한결같이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이미 죽어 엎어진 북한군 사병들의 발목에도 사슬이 둘러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길가 산에는 북한군의 시신이 잔뜩 쌓여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폭격으로 처참하게 헐벗은 산과 길 곳곳이 다 그런 모습이었다. 북한은 전선에 진출하는 장병들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독전대(督戰隊)를 운영하면서 원래의 북한군과 남쪽에서 강제 징용한 사병들을 그렇듯 잔혹하게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북진(北進)의 길에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럼에도 묘한 긴장감이 먼저 흘렀다. 혈로를 뚫고 북상한 우리 1사단의 12연대 덕분에 적은 퇴로가 막히면서 크게 흔들렸다. 아니, 그저 흔들린 정도가 아니었다. 이미 거센 물길에 밀린 둑처럼 무너지는 형국이었다.

가슴 벅찬 북진의 길에 올랐다. 미 1기병사단의 호버트 게이 소장은 북진하는 길의 한 삼거리에서 만났다. 상주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안동에서 대구를 향하는 길의 교차점이었다.

우리 1사단 병력으로는 최영희 대령이 이끌고 있던 15연대가 그곳에 당도했고, 미 1기병사단도 그곳을 거쳐 북진에 오르던 참이었다. 미 1기병사단의 사령부는 다부동을 적에게 내주면서 대구의 경마장으로 밀려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덧 모든 행장을 꾸리고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미 1기병사단은 앞에서 잠시 소개한 대로 맥아더의 지휘 아래 마닐라를 먼저 점령했고, 이어 맥아더가 진주하기 직전 도쿄에 선착(先着)한 부대였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평양이었다. 적의 심장부를 먼저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 1기병사단의 구호는 “마닐라, 도쿄, 그리고 평양”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미군 함정과 상륙부대 등이 뭍에 올라선 모습.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미군 함정과 상륙부대 등이 뭍에 올라선 모습.
미 1기병사단의 선두 점령 욕심은 그래서 남달랐다. 당시 호버트 게이 미 1기병사단 소장은 예하의 한 연대장이 진격을 서두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즉석에서 그를 경질했을 정도라고 했다. 그는 전투력을 크게 증강한 777 연대전투단을 선두에 세워두고 야심차게 진격을 서두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디를 향해 그렇게 급히 나서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매우 자신에 찬 어조로 “서울에서 보자”고 말했다. 선두를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이제 우리의 공로(攻路)가 직접 서울을 향하고 있으며, 머잖아 적의 수도인 평양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우선 기뻤다.

‘미군에 뒤지기 싫다’

그러나 내 마음 한 구석에 찾아드는 섭섭함도 적지 않았다. 북진의 혈로를 직접 뚫었던 우리 1사단을 뒤로 제쳐두고 다부동에서 적에게 10㎞를 밀렸던 미 1기병사단이 선두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당시 미 1군단은 휘하의 미 1기병사단과 미 24사단을 북진 공로의 선두로 세웠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이해했다. 그들은 우리 1사단에 비해 기동력이 탁월했고, 전투를 수행하는 장비와 화력에서도 뛰어났다. 그런 점을 고려해 신임 미 1군단장인 프랭크 밀번 장군이 그 둘을 선공(先攻) 부대로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전장(戰場)에서나 전투를 수행하는 부대는 사기(士氣)를 바탕으로 싸움을 벌이는 법이다. 우리 1사단은 혹심했던 시련을 이기고 적의 3개 정예사단에 맞서 대구의 길목인 다부동을 지켰던 부대였다. 미군도 나름대로 분전을 했지만 하루 700~800명에 달하는 부대원의 희생을 무릅쓰고 적을 꺾은 우리의 사기를 따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엉뚱한 명령으로 크게 마음이 상했다. 미 1군단의 명령은 “경북 군위로 진출해 잔적(殘敵)을 소탕한 뒤 공격 대열에 합류하라”는 내용이었다. 선두에 나서지 못할 뿐만 아니라 후방을 정리한 다음에 천천히 북상하라는 지시였다.

사단을 이끌고 있던 내 마음은 이미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진 상태였다. 속으로 ‘우리도 할 수 있는데…’라는 푸념만이 거듭 쌓여가고 있었다. 사단 예하의 연대장들과 참모는 나보다 더 직접적으로 울분을 토로하고 있었다. 12연대장 김점곤 중령은 미 1군단 참모들과 아주 심한 말을 섞어가며 다퉜다고 했다.
동부 전선에서는 일찌감치 북진을 시작한 국군이 38선을 넘었다. 북진하는 국군과 격려하는 인파의 모습.
동부 전선에서는 일찌감치 북진을 시작한 국군이 38선을 넘었다. 북진하는 국군과 격려하는 인파의 모습.
나는 그래도 부하들을 설득해야 했다. 12연대장에게 군위 일대의 잔적을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연대장은 내게 “적도 보이지 않는데 뭘 어떻게 소탕하라는 얘기냐”라면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다른 연대장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작전을 위해 통제하는 ‘도로 우선권’을 먼저 타내 북진 길에 오르는 미군을 눈앞에서 그저 지켜보고 있어야 했던 부하들의 심정을 내가 모를 리는 없었다.

우리 1사단 사령부는 일단 가산~팔공산 일대에서 북진하면서도 당초의 전선이 있던 하양에 지휘소를 그대로 둔 상태였다. 그래도 차분하게 작전을 벌여야 했다. 우리는 상주에서 보은과 미원을 거쳐 약 1주일 동안 작전을 벌이며 길을 나아갔다. 골이 깊었던 속리산 일대에는 잔적이 조금 남아 저항을 벌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들이 출몰하면 바로 소탕했다. 적은 후퇴 대열에서 낙오한 병력이라 저항이 변변치 않았다. 우리는 그들을 곧 진압하면서 길을 재촉했다.

남몰래 다녀온 청주

10월 1일 경인가 그랬다. 나는 잔적 소탕에 나선 본대를 뒤에 두고 사령부 지휘소를 떠났다. 사단 참모들과 휘하 연대장에게 기별도 하지 않은 채였다. 무장한 헌병 병력이 지프 한 대에 올라 타 내가 탄 지프를 수행하는 정도였다. 나는 상주를 거쳐 국도를 따라 청주까지 갔다.

우리보다 먼저 길을 떠난 미 1기병사단 덕분에 길을 오가는 데는 별 위험이 없었다. 그러나 산 깊은 곳에는 아직 후퇴 대열에서 낙오한 적군이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따라서 안전한 이동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길을 나섰다. 선두에 서지 못하는 부대의 사령관 심정 때문이었다.

우선은 앞을 둘러본 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상황을 먼저 점검한 뒤 나름대로 복안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나를 믿고 다부동의 그 참혹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우리 1사단의 사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를 리는 없었다.

청주에 도착했다. 북한군 전선 사령관이었던 김책이 “조치원에서 도망 중”이라는 정보를 앞서 수색대로 길을 떠난 우리 1사단 공병 소대장에게 들었다. 나는 이미 그곳에 진출했던 미 1기병사단의 5기병연대장 마셜 크롬베즈 대령에게 알려줬다. 그들은 내가 잡아준 조치원 역 일대의 좌표에 따라 포격을 벌였다.
1950년 10월 북한 해안을 따라 도보로 북진하는 한국군.
1950년 10월 북한 해안을 따라 도보로 북진하는 한국군.
조금만 서둘렀더라면 우리는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을 생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책은 요행히 북으로 빠져 나갔다. 조치원 일대에 머물렀다는 그의 행적은 우리로서는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김책은 이듬해 1월 북한에서 사망했다.

미 1기병사단은 신나게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곧 경기도 오산으로 가서 인천으로 상륙한 미 7사단과 링크 업(rink-up)을 한다며 분위기가 한껏 오른 상태였다. 나는 길을 떠나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내가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청주에서 길을 떠난 나는 한밤중에 우리 1사단 사령부로 돌아왔다. 참모들은 내가 청주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군대의 사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격전에 격전을 거듭하며 분투를 이어왔던 우리 1사단의 명예와 사기를 꺾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마음속으로 고민이 자꾸 깊어만 갔다.

우리 1사단 본대는 곧 청주에 도착했다. 사단 지휘소를 청주에 있던 충북도청에 차렸다. 다부동의 막바지 전투, ‘볼링장 엘리’의 격전을 치러냈던 존 마이켈리스 미 24사단 27연대장이 그곳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우리 1사단의 후방 작전을 맡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마이켈리스 대령이 반가워 우리는 작은 술자리를 마련했다.

그는 우리 후방의 잔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았던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1사단도 진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격 방향은 어디일까.’ 마이켈리스와 막걸리를 나누면서도 나는 그 생각에 깊이 빠져들기만 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