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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물,문물

全氏家門[펌]

지금으로 부터 약1800년 전 全氏家門 3百濟王朝郞將의 신분으로 入漢하여 漢王朝 軍서열 제2인자의 자리인 驃騎大將軍이 되어 조정에 공을 세워 關西弘農侯에 봉하여 지며 명실상부 弘農郡의 임금이 된다.

百濟王朝의 개국공신의 손자이면서 승상의 아들 신분으로 어떠한 사유로 入漢하게되었는지늘 궁금하게 생각해오다가 20151226일 드디어대망의 弘農(.靈寶)행에 나섰다.

全氏는 한국에 50만명정도 중국에 50만명 정도 살고 있으며 그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약2000년 전 으로부터 시작되고 중국에서는 약3000년 전 周王朝 시대부터시작된다.

한국에서 姓氏를 보편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高丽王朝 중반 즉 지금으로 부터 1000년 전이었는데 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부터 姓氏를 가지고 있었으며 백제개국공신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보면 이전의 한국全氏의 역사는 중국全氏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지금으로 부터 약3000년 전 周王朝泉府(.재무부와 비슷함)의 관료들도 姓氏의 필요에 따라 泉府자와 자가 발음이(quan)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글자 모양이 +자를 姓氏로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

이때 부터 이 역사에 등장할 때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변화에 따른 역사와 全氏의 흐름을 살펴보면 장안을 수도로 봉건제를 바탕으로 한 비교적 안정기였던 약400년 정도의 西周시대는 全氏들도 天子와 함께하는 중앙정부의 관료로서 비교적 영화를 누렸던 시기였으나 西周를 마감하고 春秋戰國東周시대는 全氏들도 힘 없는 天子를 따라 장안에서 낙양을 떠도는 신세였을 것이다.

이후 秦王朝를 거쳐 AD8漢王朝의 전반기인 前漢도 외척세력인 新王朝王莽에 의하여 멸망되는 이무렵 한국全氏1이 현재 만주벌일대인 졸본부여에서 역사적으로 등장한다.

1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하던 시기를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고조선 멸망이후 신생고대국가들이 탄생하던 시절이었고 중국에서는 前漢이 멸망하고 王莽新王朝가 세워졌다가 다시 劉秀에 의하여 後漢이 복원되는 정치적 격변기 였고 ,서양에서는 예수가 태어날 무렵이었다.

3入漢하였던 시기를 살펴보면 한국에서는 백제 漢城都邑期이며 중국에서는 後漢의 쇠퇴기로 황전적의 난이 일으나면서 魏蜀吳 삼국시대가 열릴 즈음이다.

3세 부터 8까지는 중국에 거주를 하다가 이 한국으로 이주를 하면서 부터 직계후손은 한국에 살게 되고 방계후손은 중국에 살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 중국全氏의 본거지이자 한국全氏 3의 직할통치구역인 홍농군은 동서로는 서안에서 낙양에 이르는 약400km,남북으로는 黃河이남 南陽尙洛을 아우르는 약400km의 방대한 영역의 漢王朝 정치 경제 군사적 최고 요충지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역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三皇五帝시대로 부터 夏殷周시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도읍지였으며 또한 도덕경으로 유명한 老子의 고향이기도 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咸陽공항에 도착하니 삼성물산 中國通인 고교동창 손희가 부인과 함께 우릴 반긴다.

옛 고향도 우릴 반기는지 화창한 날씨에 손희 부부는 wonderful을 연발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공항내 중국집에서 짬뽕 한그릇 하고 함곡계명으로 유명한 函谷關을 향하여 함양공항을 출발한다.

連霍고속도로를 1시간30분쯤 달리니 오른편으로 華山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약간의 스모그 현상에 어렴풋이 보이는 봉우리들이 신비감을 더하며 도교의 본산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예전엔 전씨들이 서안에서 화산에 이르는 일대에 많이 살았다고 한다.

 

 

휴게소에 들러 사진만 몇장 찍고 다시 다시 고속도로를 1시간30분쯤 달려 함곡관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니 엄청난 규모의 황금빛 老子像이 눈앞에 나타나며 느닷없이 새벽닭이 끊임 없이 울어재낀다.

황금빛 도복의 老子가 고향을 뽐내는 함곡관은 나라 맹상군이 鷄鳴으로 위기를 모면하면서 관문을 통과하였다 하여 함곡계명으로 유명하다.

또 함곡관은 관중에서 산동6국으로 나가는 관문으로 군사적 요지일 뿐만 아니라 산동6국의 풍부한 물자들이 장안으로 들어오는 경제적 요지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弘農郡 弘農縣에 속하며 행정구역상으로는 河南省 三門峽市 靈寶市에 속한다.

특히 춘추전국시대는 秦王朝의 수도방위상 최고 요충지였다.

이러한 정치 경제 군사적 요충지인 홍농군을 우리 할아버지가 다스렸다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함곡관 입장료가 1인당 80위엔(한화14400원 정도)이며 전동셔틀카가 1인당 20위엔으로 한국의 공원 입장료 수준을 능가한다.

함곡관에 어둠이 내리니 우리도 둥지를 찿아 영보시내에 들어왔다.

제일 제일 중심가에 위치한 紫金宮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中食이었지만 담백하고 맛있었고 4명분 식대가 288위엔(한화 약52000)으로 호텔식치고는 저렴했으며 술은 친구가 술공장에서 직접 가져온 五粮液으로 분위기를 살렸다. 호텔 숙비는 350위엔으로 내부시설 대비 비교적 저렴 했다.

익일은 본격적으로 조상의 흔적을 찿아서 靈寶시내를 투어를 계획하고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아니 눈이 왔나?

창을 딱고 눈을 딱고 다시 봐도 온통 뿌였다.

알고보니 요즘 중국의 심각한 현실인 스모그가 우리 옛 고향 땅도 비켜가지를 않는 모양이다. 바로 앞 건물만 보일뿐 조금만 떨어지면 형체만 보이고 산은 아예 형체도 보이지 않는다.

! 이일을 어쩌나

옛 고향 산천경개를 보러 왔는데…ㅠㅠㅠ

그래도 내친 걸음 이니 숙소에서 약10km떨어진 娘娘山을 둘러 보기로 했다.

낭낭산에 도착해 보니 역시나 였다. 형체만 어렴풋이 보일뿐으로 관광및 답사는 불가하여 아쉬움을 뒤로하고 华山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쪽으로 黃河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潼關부근에서 로 접근할 수 있는 톨게이트가 나오길래 내렸더니 여기가 바로 黃河의 두물머리 였네

청해성 곤륜산맥에서 발원하여 한줄기는 관중을 통과하여 동관현으로, 한줄기는 감숙성을 가로질러 내몽고자치구로 흘러들어 몽골고원의 모래를 싣고 黃河가 되어 동관현에서 두줄기가 합류하여 홍농을 거쳐 三門峽통과하여 최종 발해만을 거쳐 황해로 흘러 간다.

동관현 두물머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4120위엔 정도) 화산으로 출발했다.

화산에 도착했는데 이일을 어쩌나

화산은 스모그속에서 흔적이 없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안으로 가서 서안시내 야경을 구경하기로 했다.

황하 두물머리에서 소주로 목을 좀 축였더니 비몽사몽간에 서안에 도착하였다.

서안 제일 중심가 종루 바로옆 종루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구경을 나섰는데 스모그에 안개까

지 더하여 쌀쌀한 찬기운이 볼을 스치니 구경할 기분도 사라지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다 저녁식사차 다시 시내로 나갔다. 친구가 안내한 식당으로 갔는데 들어서는 순간 중국음식의 특유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시킨 메뉴중 다른 것은 그런대로였지만 양고기구이는 한점을 못 먹겠다. 니끼하고 묘한 향내에 비위가 상하여 결국 제일비싼 요리인 양고기구이를 그대로 남겼다.

식사를 마치고 안 양반들은 호텔에서 쉬고 손희와 나는 다시 회족먹자골목 구경을 하고 홍주 한병을 사들고 발맛사지집으로 갔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주단정한 아가씨의 발맛사지 써빙을(198위엔)받으니 여독이 말끔히 가시는 것 같다(참고로 전신 맛사지는 300위엔으로 이것도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제 중국도 천원 천원 여행 시대는 다 지나갔나 보다.

호텔로 돌아와 여행의 마지막밤을 보내고 익일 아침 예약한 택시를 타고 약 한시간 거리의 함양공항으로 갔다. 택시비가 180위엔으로 이 역시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다.

스모그가 비교적 덜한 여름 여행을 기약하며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살기 좋은 옛고향이 되기를 바라면서 여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