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과 기생 강아(江娥)의 러브 스토리
송강 정철의 묘 조선시대 전라도 기녀인 진옥(眞玉)은 파란많은 인생을 살다간 송강(松江) 정철(鄭澈)로 인해 이 시대에 기억되는 여인이다. 원래 이름은 ‘진옥’이었으나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江)’자(字)를 따라 강아(江娥)라고 불렸다. 강아는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강아 뿐이다. 기명을 적었으나,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위 때문에 획득된 것이리라 생각되는데, 이를 반추해 보아도 송강 정철과 강아의 사연이 당시 사람들 기억속에 남다른 의미로 남아 있었음이 분명한 듯 싶다.
전라도 관찰사로 등용된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전라 감영에 있을 때 노기(老妓)들의 청을 들어서 당시 동기였던 강아를 처음 만나게 된다. 불과 십여 세 남짓의 어린 소녀였던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다만 명예로운 첫 서방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정 철의 인간다움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철 또한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한가할 때면 강아를 앉혀 놓고 틈틈히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을 외어 주고 장진주 가사를 가르쳐 주며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강아는 기백이 넘치고 꼿꼿한 정철에게서 다정한 사랑을 받으며 그를 마음 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582년 9월 도승지로 임명받은 정철은 열 달만에 다시 서울로 떠나게 된다.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채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그러한 강아의 마음을 눈치챈 정철은 서울로 떠나면서 작별의 시를 주어 그녀의 마음을 위무한다.
一園春色紫薇花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그가 남기고 간 시에는 강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당부의 마음이 담겨져 있었다.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담긴 시였던 것이다.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긴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철부지 어린 나이에 정철을 만나 머리를 얹은 이후로 단 한순간도 그를 잊지 못했던 강아는 열망으로 십년고절의 세월을 버텨낸다.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깊은 애모와 여심의 끝에 들려온 소식은 정철이 북녘 끝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기막힌 소식이었다. 그녀는 이제야 정철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작은 발로 삼천리 길을 걸어 강계로 달려온 강아는 위리안치되어 하늘 한자락 보이지 않게 가시나무로 둘러쌓인 어질어질해져 왔다. 정철의 초췌한 모습에 진주같은 눈물만 통곡이 목구멍을 짓눌러 오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자기 앞에 엎드려 우는 어여쁜 여인을 본 정철은 당황하며 그녀가 누구인지 물었다. 정철이 강아를 몰라본 것이었다. 성장한 강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달빛아래 엎드려 우는 여인을 보던 정철은 그네의 모습이 한 마리 백학처럼 느껴졌다. 울음을 그친 강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를 몰라보시는지요. 10년 전 나으리께서 머리를 얹어 주셨던 진옥이옵니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정철은 다시 한번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곳까지 찾아왔느냐?” 그의 귀양소식을 듣고는 적거(謫居)생활을 보살피고자 부랴부랴 달려왔다는 것을 고백했다. 가혹해 보였다. 현실을 받아 들이고 있었다. 강아는 정철을 앞에 두고도 정녕 믿기지 않았고, 말을 잃은 두 사람 덕분에 방안엔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때 조용히 강아가 입을 열고 노래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을 네가 아직도 외우더냐?” 정철이 물었다. 강아의 뺨은 이미 붉은 홍시처럼 물들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거나해진 정철이 입을 열었다.
"진옥아, 내가 한 수 읊을 테니, 너는 그 노래에 화답을 해야 한다." 가다듬어 시를 읊는다.
옥(玉)이 옥이라커늘 번옥(燔玉)만 여겼더니
탁월한 시인이었던 정철은 강아에게 흠뻑 빠져 노골적인 음사(淫辭)를 시의 옷을 빌어 내비쳤다. 합일을 바라는 정철의 육정이 배어 있는 시였다.
철(鐵)이 철(鐵)이라거든 석철(錫鐵)만 여겼더니
화답을 들은 정철은 탄복했다. 할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만나면 자신의 골풀무로 흔들어 놓을 수 있다며 바람을 불어 넣는 풀무'인데, 은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만하면 글자 그대로 이윽고 살송곳을 가진 멋있는 사내와 뜨거운 골풀무를 지닌 기생의 하룻밤은 뜨거운 정염으로 하얗게 무르익어 갔다.
이에 대한 일화는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鄭松江 與眞玉相酬答'의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아는 늘 그의 곁에서 기쁨을 주었고, 가야금을 연주해 주었다. 그러면 헝클어진 정철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흘러들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으며
정철은 유배지에서 부인 안씨에게 서신을 보낼때면 강아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냈다.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강아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 불우한 남편의 생활 속에서 남편에게 위로를 주는 여자라면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정철은 고마웠다. 강아 역시 부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고마워하며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의 강물이 애정관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서울로 부른다. 정철은 유배지의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나라에 대한 우국 그리고 강 아와의 이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강아의 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밤도 이별하는 사람 하 많겠지요.
부인 안씨는 강아와 함께 서울에 올라올 것을 정철에게 권했지만 강아는 끝내 거절하고 강계에서 혼자 살며 정철과의 짧은 사랑을 되새기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우거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이 세상에 정철이 없다는 가혹한 슬픔 앞에 몸부림치다가 홀연히 강계를 떠났다. 그리고 그 후 강아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강마을에는 송강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모셔져 있다. 그 뒷면엔 다음 글이 새겨져 있다.
강계로 귀양가 위리안치 중인 松江은 다시 소환되어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적병에게 붙잡히자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둘로 갈라졌다. 거점으로 강아가 의기(義妓)로 활약하는 내용이다.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강아가 난리중에 조국을 지키고 큰 공을 세우고 그 이후에는 ‘소심(素心)’이란 법명을 얻은 뒤에 실제로 의기로서 강아를 조명한 예는 박종화의 역사소설 모두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공을 지낸 대 정치가 송강 정철. 그의 일생은 크게 관로의 생활, 은거의 생활, 적소(謫所)의 생활로 나뉘어 진다. 불을 밝혀준 강아가 있었다. 그를 찾아온 강아의 구애(求愛)는 결국 정철을 감탄시켰다. 요컨대 이들이 적소에서 나눈 사랑에는 애틋한 여심이 이루어낸 고귀한 사랑... .... 아마도 지금 강계의 땅에는 청산처럼 기대고 선 송강 정철과 강아의 혼이 슬프게 맴돌지도 모르리라. 강아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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