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인물,문물

全斗煥 반론, “이게 과연 판사가 쓴 판결문인가” : 전두환 死者명예훼손 1심 재판

全斗煥 반론, “이게 과연 판사가 쓴 판결문인가” : 전두환 死者명예훼손 1심 재판

李知映(조갑제닷컴)      

  •  
  •  
  •  
  •  
  •  
  •  

⊙ 광주 헬기 사격설 유죄 판결에 분노하다!
 ⊙ “지방의 민심에 영합한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개인적 禍를 면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이 나라는 역사 왜곡이라는 큰 화를 입게 되었다”
 ⊙ 1심 재판부 위협사격만 인정, 시민학살은 판단 안 해. 국방부 조사 사실상 부정

전두환 전 대통령은 2020년 11월 30일 광주지법에서 故 조비오 신부에 대한 死者명예훼손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았다. 사진=조선DB

  2년 5개월을 끈 전두환(全斗煥) 전(前) 대통령의 사자(死者)명예훼손 1심 재판이 2019년 11월 30일 막을 내렸다.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문을 입수해 세 번을 읽었는데도 도무지 판사의 논리가 이해되지 않았다. 기자의 독해력(讀解力)·문해력(文解力)·지력(知力)에 문제가 있어 이해를 못 하나 자책도 해보았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 측 변호인의 항소(抗訴)이유서 초안을 보니 과연, 문제는 판사였다.
 
  전 전 대통령 측 정주교 변호사는 항소이유서를 쓰면서 “원심(原審) 판결은 ‘이것이 판사가 쓴 판결인가’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편파적이고 자의적 판단을 자유심증주의(自由心證主義)로 포장하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목격자의 거짓과 착오를 철벽 방어했다”고 개탄했다.
 
  이 재판은 광주지검 형사1부(부장검사 이정현)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소하면서 시작되었다.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했다. 검찰은, ‘조비오 신부와 5·18 희생자, 그 유가족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기소했다. 기소의 주된 근거는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특별조사위원회’(이하 국방부 특조위)의 ‘5·18 당시 국군의 야만적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조사결과였다. 그렇다면 국방부 특조위의 조사결과는 믿을 만했나?
 
  ‘헬기 사격의 실체는 모르지만, 좌우간 사격은 있었다’고?
 
  《월간조선》 지면을 통해 수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국방부 특조위는 과거 국가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했지만, 비약적 논리 구조로 ‘5·18 당시 국군의 야만적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엄청난 결론을 도출해냈다. 헬기 사격을 했다는 사람도 총탄에 맞은 사람도 확인되지 않았다. 헬기 사격 지시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는데도 국군을 ‘양민 학살범’으로, 국가를 야만적 존재로 공인하는 보고서를 냈던 것이다.
 
  〈계엄군은 5. 21. 헬기를 이용하여 일반시민에게 위협사격을 하였고, 무장을 하지 아니하고 시위를 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직접사격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5. 21. 헬기 사격은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것으로서 계엄군 진압작전의 야만성과 잔학성 그리고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또한 시민들과 물리적 충돌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실시되었던 지상군의 사격과 달리 헬기 사격은 사전 계획적·공세적 성격을 띠고 있다. (중략)
 
  대량살상 능력을 갖춘 무장헬기까지 동원하여 사격을 하고 시민을 살상하는 행위는 집단살해 내지 양민학살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국방부 특조위 보고서 중
 
  전두환 재판은 단순히 ‘거짓말쟁이’라고 지칭된 사자(死者)의 명예훼손 문제가 아니라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판가름하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 중요한 재판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판결을 한 광주지법 형사8단독 김정훈 부장판사는 헬기 사격의 실체에 대해 113페이지의 판결문에서 단 한 줄의 설명으로 갈음한다.
 
  〈1980. 5. 21.경 광주천 불로교 및 양림동, 대의동, 학동시장, 기독병원 일대 등에 헬기 사격이 있었고…〉 -전두환 전 대통령 사자명예훼손 판결문 중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헬기를 타고, 어떤 무기로, 어디를 사격했고, 그 사격으로 누가 죽고, 누가 다쳤으며 어떤 피해가 발생했는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국방부 특조위 조사보고서와 대동소이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 변호인은 이렇게 반문한다.
 
  “‘헬기 사격의 실체는 나도 모르지만, 좌우간 사격은 있었다’는 식의 판단을 누가 납득할 수 있나?”
 
 
  사실 인정의 이상한 논리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원심 판결이 ‘목격자 진술’만으로 헬기 기총소사가 증명되었다고 판단했다면서 “원심의 사실 인정에 관한 판단이 너무나 자의적이어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며 조목조목 짚어냈다.
 
  (전두환 측) 같은 장면을 목격했다는 두 사람의 말이 서로 다르다.
  → (1심 재판부 판단) 오히려 두 사람이 말을 맞추어 허위로 진술하지 않았다고 볼 근거.
 
  (전두환 측) 목격자가 매번 진술을 번복하였다.
  → (1심 재판부 판단) 시간의 경과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므로 오히려 신뢰할 수 있는 근거.
 
  (전두환 측) 목격자는 UH-1H 헬기를 봤다고 진술했다.
  → (1심 재판부 판단) 목격자가 500MD 헬기를 UH-1H 헬기로 잘못 보았을 것.
 
  (전두환 측) 목격자는 502항공대 헬기를 목격했다고 진술했는데 그 헬기는 사격이 불가능한 가스살포기 탑재.
  → (1심 재판부 판단) 목격자가 본 헬기가 502항공대 헬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전두환 측) 목격자가 증거로 제시한 사진 속 헬기의 불빛은 충돌방지등 불빛으로 밝혀졌다.
  → (1심 재판부 판단) 목격자가 촬영한 사진은 헬기의 사격 장면이 아닐 것.
 
  (전두환 측) 목격자는 헬기의 왼편에 있었기 때문에 오른편을 볼 수 없었다.
  → (1심 재판부 판단) 반대편이라고 하여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두환 측) 10만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있던 광주 시내 상공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그것을 본 사람이 불과 8명뿐인가.
  → (1심 재판부 판단) 모든 목격자를 전부 조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두환 측) 군인들이 전부 헬기 사격은 없었다고 진술하였다.
  → (1심 재판부 판단) 군인들이 부인한다고 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두환 측) 사람들이 밀집한 광주 시내 여러 곳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 왜 피해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
  → (1심 재판부 판단) 위협사격을 배제한 채 조준사격만을 전제로 한 주장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전두환 측) 광주 시내 여러 곳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 왜 헬기 사격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가.
  → (1심 재판부 판단) 현장이 원상태로 보존되지 않았기 때문.
 
  1심 재판부는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판단한 직접증거로 ‘진술증거’ 이외에는 제시하지 못했다. 진술증거에는 입증 대상이 되는 조비오 신부의 진술도 포함되어 있다. 변호인은 “조비오 신부의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진술의 진위(眞僞) 여부를 가리는 재판에서 조비오 신부의 진술로써 조비오 신부의 진술을 증명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한가?”라고 반문한다. 조비오의 진술은 증명의 대상이며 논증되지 않은 전제일 뿐인데 이를 근거로 조비오의 진술이 참이라고 증명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는 것이다.
 
 
  원심 판시 논리에 따르면 ‘헬기 사격 없었다’도 성립
 
  1심 판결문에 따르면, “사실의 부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사회 통념상 불가능”하므로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헬기 사격이 없었다’를 증명하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는 정도’의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뜻인데, 위 1심 재판부의 판단이 그에 부합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나 흥미로운 부분은 ‘군인들이 전부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는 진술에 대한 판단이다. 재판부는 ‘목격자가 헬기 사격을 봤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군인들이 부인한다고 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세웠는데, 전두환 측 변호인은 이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 반대 경우에도 논리가 그대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원심 판시 논리에 의할 경우 ‘목격자가 사격이 있었다고 진술하더라도 군인들이 사격은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명제도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재판부는 “모든 군인들, 특히 제1항공여단 소속으로서 헬기에 탑승한 조종사, 부조종사 및 무장사들의 모든 진술이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으므로 그들(편집자 註-일부)이 헬기 사격을 부인한다고 하여 곧바로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의 이 논리 역시 ‘5·18 시위 참가자의 모든 진술이 증거로 제출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일부)이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하여 곧바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뒤집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어느 집단에 발생한 사건의 경우 그 집단 구성원 전원을 조사하지 아니하더라도 그 진실을 알 만한 위치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그 진술을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라면서 “구성원 전원을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이 규명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말싸움을 위한 억지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헬기 사격 없었다’는 진술을 쓰레기를 (분리) 재처리하듯 유죄 증거로 사용”
 
  전두환 전 대통령 측 변호인은, 판사가 군인들의 진술을 “쓰레기 (분리) 재처리하듯 해 유죄의 증거로 사용했다”며 분개했다. 판사는, 군인들 진술 중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진술임에도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으면 이것만 떼어내어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변호인은 “피고인에게는 쓸모없는 증거지만 그중에 쓸 만한 부분이 있으면 검사가 주워서 사용할 수 있다는 판단”이라며 이렇게 항변한다.
 
  〈예를 들어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이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장군으로부터 무장헬기를 동원하여 시위를 강경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자신은 그 지시를 거부하고 대화를 통해 수습하였다고 한 진술은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진술입니다. 그런데 원심은 김기석의 진술 중 무장헬기를 동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 부분은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원심이 김기석의 진술과 공소사실이 부분적으로 부합한다고 한 판단은 마치 ‘발가락이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 항소이유서(초안) 중
 
  전두환 측은, “한 사람의 진술은 전체적 맥락에서 진술의 취지를 발견해야 마땅한데 이를 무시한 채 진술에 사용한 일부 용어가 유사하다고 하여 공소사실에 부합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악의적 사실 왜곡”이라면서 ‘헬기조종사들이 500MD 헬기의 무장사실을 자인(自認)한 진술이 헬기 기총소사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1심 판단을 강하게 규탄했다. 헬기 조종사들의 진술은 무장한 사실을 ‘자인’하면서 기총소사는 강경하게 부인하는 내용이었다. 기총소사에 대한 ‘적극적 항변’을 기총소사를 입증하는 것으로 조작했다는 뜻이다.
 
  1심 재판부가 ‘쓰레기 재처리하듯’ 선별적으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한 헬기 조종사들의 진술은 취지가 ‘사격 부인’이었다. 이들이 과거 조비오 신부를 서울지검에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서 제출한 고소장에 무장헬기의 출동 경위, 광주에서 수행한 임무 내용,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설명한 내용이다. 1989년 2월 MBC가 〈어머니의 노래〉에서 조비오 신부의 헬기 사격설을 방영하자 당시 광주에 출동했던 헬기 조종사들이 일제히 조비오의 인터뷰가 거짓말이라며 진술 철회를 요구하고 끝내 고소에 이르렀다. 헬기 조종사들은 당시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500MD 헬기 무장에 대해 설명했는데, 1심 재판부는 이 진술 취지를 반대로 뒤집어 헬기 사격에 부합하는 증거로 판단한 것이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국방부 특조위는 과거 여러 차례 국가 조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새로운 증거를 찾지 못했고, 헬기 사격을 했다는 사람도 총탄에 맞은 사람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명령이 있었으므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괴상한 논리를 폈는데, 1심 재판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명령’에 대한 진술에서도 재판부는 진술자의 취지를 무시하는 ‘왜곡’을 계속했다.
 
  1심 재판부는 ‘황영시 육군참모차장이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에게 무장헬기를 동원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지시했다는 진술이 헬기 기총소사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김기석이 황영시로부터 무장헬기 동원 지시를 받았지만 면전에서 그 지시를 거부하고 무장헬기를 동원하지 않았다’는 진술의 일부분이었다.
 
  판사는 또 5·18 당시 506항공대장 김동근의 증언 중 ‘500MD 헬기에 탄약을 적재했다’ ‘보는 각도에 따라 7.62mm 기관총의 총구에서 섬광을 볼 수 있다’는 진술이 헬기 기총소사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김동근 506항공대장은 1995년경부터 일관되게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진술해왔고, 이 재판정에서도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증언한 사람이다.
 
  김순현 준장이 1980년 5월 22일 이정부 103항공대장에게 AH-1J를 이용해 광주천에 위협사격을 지시한 점, 같은 날 김동근 506항공대장에게 전남도청 옥상의 대공(對空)화기 진지를 제압하라고 지시한 점도 판사는 헬기 기총소사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김순현 준장의 사격 지시는 이정부·김동근 항공대장이 ‘사격 지시까지 받았지만 거절했다, 헬기 사격은 없었다’는 취지로 진술한 내용의 일부였다. 1심 재판부는 이 역시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진술의 취지를 ‘헬기 사격에 부합하는 증거’로 뒤바꿔 판단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변호인은 재판부의 이런 판단에 “제정신을 가진 사람의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판사는 개인적 禍를 면했지만 나라는 역사 왜곡의 禍를 당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쟁점은 1980. 5. 21. 광주 시내에서의 헬기 사격 여부에 한정”된다면서도 “1980. 5. 27. 전일빌딩 등에 대한 헬기 사격도 그 이전에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한 주요한 간접 사정”이라고 판단했는데, 5월 27일의 상황을 5월 21일 상황의 간접증거로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서도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합리적 근거가 없는 자의적 추론”이라고 반박했다.
 
  1심 재판부는 5월 27일 헬기 사격설의 유력한 증거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의 전일빌딩 탄흔 감정 결과를 들었다. 국과수는 감정결과서에서 “(전일빌딩 10층 방송실 내에서 발견된 탄흔은) 호버링 상태의 헬기에서 발사되었을 가능성이 유력하게 추정되나 탄흔의 크기와 탄흔의 생성 형태가 상충하는 현재의 결과만으로는 사용 총기의 종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단할 수 없음”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재판부는 국과수 감정 결과에 치우쳐 “UH-1H 헬기가 마운트에 거치된 M60 기관총을 이용해 전일빌딩에 대하여 사격을 실시하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전일빌딩 옥상에 대공화기가 설치되어 있다는 첩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작전상황은 전남도청을 점령하기 전 전일빌딩에 대한 빠른 점령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주고, 실제로 계엄군은 전일빌딩을 점령한 뒤 약 35분이 지나 전남도청을 점령하였다”고 판단했다. 전일빌딩 옥상에 설치된 대공(對空) 화기의 제압을 위해 UH-1H 헬기 사격이 필요했다는 뉘앙스다. 하지만 국과수 감정인은 전일빌딩 옥상에서 탄흔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광주 투입 조종사들은 헬기가 공중에서 사격했을 때 절대로 전일빌딩과 같은 탄흔(彈痕) 분포가 나올 수 없다고 실감 있게 증언하였으나 배척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판결문의 “삼인성호(三人成虎·여러 사람이 우기면 거짓말도 꾸밀 수 있다)의 잘못을 범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문장을 인용하면서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그 말만 듣고 진술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고는 비겁하게도 권세에 눌려 거짓을 추종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로 인하여 원심은 그 지방의 민심에 영합한 판결을 선고함으로써 개인적 화(禍)를 면하게 되었지만, 그로 인하여 이 나라는 역사 왜곡이라는 큰 화를 입게 되었다”고 비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은 “5·18에 관한 재판을 광주에서 하게 한다는 것은 대놓고 불공평한 재판을 하겠다는 것”이라며 관할 이전을 신청했다. 광주지검은 2019년 12월 3일 1심 판결에 대해 “형량이 지나치게 가볍다”며 광주지법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국방부의 ‘양민학살’은 부정되었다!
 
  이 판결문이 계엄군에 유리한 측면도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 서두에 사건의 쟁점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건 회고록 중 쟁점 부분에서는 피해자(註-조비오)의 주장을 ‘헬기 기총소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기재하였으나, 피해자의 진술은 헬기에 의한 사격에 중점이 있고 피고인(註-전두환)도 헬기에 의한 사격 사실 자체가 없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으며, 이 사건 회고록의 전체 취지도 피고인의 주장과 같으므로, 적시의 대상이 되는 사실은 헬기 기총소사가 아닌 헬기 사격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보아야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자명예훼손 판결문 중
 
  판사는,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엄청난 희생이 있었을 것’이라는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반론이 “피해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위협사격을 배제한 채 시민들을 향해 조준사격하는 것을 전제로 주장하는 것이어서 그 전제가 잘못되었다”며 배척한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혐의가 없다고 인정한 대부분의 근거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실제 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리라는 전제에 터 잡은 것이므로 위협사격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다”라면서 이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판단한다. 판사가 갑자기 사건의 쟁점을 ‘인명살상 사격’이 아니라 ‘위협사격’으로 이동시켰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목격한 바와 같이 1980. 5. 21. 광주에 무장상태로 있었던 505항공대 또는 506항공대 소속의 500MD 헬기가 위협사격 이상의 사격을 하였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했을 뿐 국방부 특조위가 주장해온 ‘집단살해’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국방부 특조위는 ‘헬기 사격’을 ‘국군에 의한 국민 학살’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시민을 향한 조준사격’이 아닌 ‘위협사격’에 한정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판사는 국방부 특조위 조사결과를 참조할 뿐 “이 법원이 그 조사결과에 구속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국방부 특조위 보고서가 사실상 부정된 것이다.⊙

[ 2021-01-27, 1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