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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

♡아내와 나 사이♡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
으로 다투기도 많이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열고서 우두커니 서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
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
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가올 시간이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된탓에 낯설지 않은 미래를 이렇게 부릅니다.

노후(老後)야말로 
‘오래된 미래’ 중 하나지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피해갈 수 없는 외길에서 
지금의 이 단계를 지나면, 

다음 코스에서는 뭐가 나올지 우린 다 알지요. 

다 알기 때문에 오래되었고, 

그럼에도 아직은 오지 않았기에 미래
(未來)인 거지요.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이 작품입니다. 

7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돌아가는 세월”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김남호/문학평론가)


음악산책
https://youtu.be/wTe1ljdLt1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