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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등 끄고 샤워는 5분… 유럽은 어쩌다 러시아의 에너지 인질이 됐나

 

신호등 끄고 샤워는 5분… 유럽은 어쩌다 러시아의 에너지 인질이 됐나

[WEEKLY BIZ]
[Cover Story]

입력 2022.08.25 22:00
 
 
 
 
 
그래픽=김성규

오스트리아 빈에 사는 직장인 닉샤 마르코바츠(41)씨 가족은 최근 세탁기와 식기세척기를 전기료가 저렴한 오후 9시부터 오전 6시 사이에만 돌리고 있다. 1kWh(킬로와트시)당 9센트였던 전기료가 7월부터 29센트로 3.2배나 올랐기 때문이다. 가스료도 3배 가까이 올라 샤워할 때도 온수를 거의 쓰지 않는다. 전원 플러그를 수시로 뽑고, 안 쓰는 전등을 바로 끄는 것은 기본이다. 이렇게 아끼는데도 4인 가구인 마르코바츠씨 가족의 전기·가스 요금은 요즘 월평균 450유로(약 60만원)씩 나온다. 올 상반기 180유로(약 25만원)가량 내던 것에 비해 두 배 넘게 늘었다. 휘발유 가격도 너무 올라 최근엔 차량도 거의 주차장에 세워두고 있다. 이에 더해 오스트리아 정부는 주택 면적에 따라 전기·가스 사용 한도를 정하고 이를 넘을 경우 범칙금을 부과하는 정책까지 추진 중이다. 마르코바츠씨는 “벌써부터 겨울이 두렵다”며 “난방을 거의 하지 않은 채 가족들이 집안에서 패딩 점퍼를 입고 버틸 작정”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오스트리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3267달러. 독일과 프랑스도 1인당 소득이 각각 5만달러, 4만달러가 넘는다. 이런 나라 국민이 온수도 마음대로 못 틀 만큼 곤궁한 처지에 몰린 것은 유럽의 최대 에너지 조달처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西方) 진영의 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가스관을 수시로 걸어 잠그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인 유럽은 어쩌다 이토록 무력하게 러시아의 에너지 인질이 됐을까.

◇에너지, 유럽의 오랜 아킬레스건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둘러싼 유럽의 에너지 안보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독일·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은 역내 에너지 자원 매장량의 한계, 육로를 통한 용이한 공급망 확보 등을 이유로 냉전 시대부터 줄곧 러시아(당시 소련) 에너지에 크게 의존해왔다. 서유럽은 급속도로 진행되는 산업화 속에 안정적 에너지 공급원이 절실했고, 소련 입장에서 서유럽은 국가 재정을 채워주는 든든한 구매처였다. 팽팽한 체제 경쟁 속에서도 두 진영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을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을 통한 석유·가스 거래는 꾸준히 증가했다.

소련에 대한 에너지 의존이 과도하게 높아지는 상황에 대해 서유럽 내에서 경계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대 우방(友邦)인 유럽이 에너지를 볼모로 소련에 예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도 1950~1960년대 소련의 대(對)유럽 석유 수출이 크게 늘자 서유럽의 송유관 건설을 저지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뉴욕타임스에는 “소련의 석유, 서방을 분열시키다”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소련과 치열한 군비 경쟁을 벌이던 미국은 이러한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1980년대에는 가스관 건설에 필요한 기술 및 정보가 유럽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이런 우려는 2000년대 들어 현실이 됐다. 러시아는 부정선거 논란 끝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선 우크라이나 정부와 천연가스 가격 협상 및 가스관 통제권을 두고 갈등을 빚다 2006년 1월 우크라이나로의 천연가스 공급을 갑자기 중단해버렸다. 이 여파로 서유럽까지 가스 부족 사태가 빚어졌다. 가스 공급은 곧 재개됐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기 싸움은 계속됐고, 결국 3년 뒤인 2009년 1월 러시아는 아예 우크라이나를 통과해 유럽으로 향하는 모든 가스관의 밸브를 다시 2주 넘게 걸어 잠갔다. 유럽과 우크라이나를 단번에 코너로 몰아세운 것이다.

하지만 가스 비축분으로 가까스로 대형 위기를 피한 서유럽은 수입원을 다변화하거나 비축 시설을 늘리는 등 에너지 안보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대신 외교적인 해결책 모색에 주력했다. 유화책과 교역으로 러시아를 길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예컨대 1968년 서유럽 국가 중 최초로 소련의 가스를 수입한 오스트리아의 경우 지난 50여 년간 가스 수입량이 70배 가까이 늘어 작년 기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86%에 달한다.

◇반격카드 없어 코너에 몰려

러시아는 이러한 약점을 파고들어 지난 2월 우크라이나 침공 후 에너지로 유럽의 숨통을 조이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유럽의 천연가스 수입에서 러시아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작년 기준 43%에 달할 만큼 절대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올 상반기 유럽에 공급한 가스 규모를 작년 평균 공급량의 70% 수준으로 줄였다. 7월에는 가스관 터빈 정비 문제 등을 핑계로 발트해를 거쳐 러시아에서 독일로 연결된 ‘노르트스트림1′의 가스 수송량을 작년의 20% 수준까지 낮췄다. 지난달에는 약 열흘간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하기도 했다. 이달 초에는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헝가리·슬로바키아·체코로 향하는 드루즈바 송유관으로의 석유 공급을 일시 중단했다.

러시아가 목덜미를 쥐락펴락하는데도 유럽은 뾰족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먼저 EU 전체 발전량 중 원자력(31.7%)에 이어 둘째로 큰 비율을 차지하는 가스(24.5%)의 경우, 육로의 파이프라인 외에 선박에 LNG(액화천연가스)를 싣고 들여오는 방안이 있지만 유럽 내 LNG 터미널이 많이 부족해 러시아산 가스를 대체하기에 역부족이다. 현재 유럽 LNG 수입 터미널이 수용할 수 있는 용량은 유럽 가스 수요의 40% 정도에 불과하다.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49%에 달하는 독일은 현재 운영 중인 LNG 터미널이 한 곳도 없다. 지난 수년간 원전 폐쇄를 추진해온 유럽은 원전 가동률을 다시 높이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지만 노후 시설 장비 교체 등으로 원전 가동의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유럽이 적극 확대해온 풍력, 태양광 등의 신재생에너지는 생산 불안정성이 높은 데다 단기간에 발전량을 늘리기 어려운 분야여서 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가운데 가스 비축량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지난 2009년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 사태 때 유럽이 한파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비축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는 사정이 다르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유로존 내 천연가스 재고량은 약 427억㎥로 지난 5년(2016~2020년) 평균치보다 20% 가까이 적다. 컨설팅업체 우드매킨지의 카테리나 필리포 컨설턴트는 “노르트스트림1 공급량이 작년의 20% 수준에 머문다면 유럽은 내년 3월 말 가스 비축분이 20%인 채로 난방 수요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중단될 경우 유럽 내 가스 재고는 내년 초 바닥을 드러낼 전망이다.

 

◇에너지 문제로 쪼개진 유럽

남은 방법은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뿐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올해 8월~내년 3월 천연가스 소비량을 지난 5년 평균보다 15% 감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독일, 스페인, 프랑스 등 주요국 정부는 공공기관이나 쇼핑몰, 사무실, 상점 등에서 에어컨 온도를 27~28도 밑으로 내리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독일 베를린은 전승기념탑, 샬로텐부르크 궁전 등 공공 명소의 불을 모두 껐고, 뮌헨은 ‘피크 시간’이 아니면 시내 절반 정도의 신호등을 꺼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샤워를 5분 내로 끝내자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스페인에서는 에어컨 가동을 줄이기 위해 ‘노타이’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에어컨을 튼 채 문을 열어놓는 상점에 범칙금을 부과한다. 유럽 최대 유통업체인 프랑스의 카르푸는 “생선 보관용 얼음을 녹을 때까지 사용하고, 영업시간 매장 조명은 30% 어둡게 조절한다”는 사내 지침까지 마련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최근 여름휴가를 갔다가 바다에서 제트스키를 타는 모습이 공개돼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에너지 절약에 앞장서야 할 지도자가 자동차보다 연료가 훨씬 많이 드는 제트스키를 탄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올겨울 난방 온도 상한을 18~21도로 미리 못 박아두는 조치도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하지만 강도 높은 에너지 절약 방침에 대해 유럽 내에서는 볼멘소리가 커지고 있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 않거나 에너지 소비를 줄여 경제에 부담을 주는 것을 원치 않는 국가들이 단일대오를 거부하는 것이다. 평소 친러 행보를 보여온 헝가리가 대표적이다. 헝가리는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물가가 치솟자 가스 소비 15% 감축안에 반대표를 던지고, 아예 러시아와 7억㎥ 규모의 가스 공급 계약을 맺었다.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키프로스와 폴란드 등 5국도 가스 소비 15% 감축안에 반대의 뜻을 밝혔다. 회원국별로 에너지 비축분과 러시아 의존도가 다른 상황에서 감축 비율을 동일하게 적용받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가스 감축안이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높은 독일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2010년대 들어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인 노르트스트림 1·2 건설이 추진될 때도 유럽 내에서는 자국의 외교·경제적 입장에 따라 격렬한 반대와 시위가 있었을 만큼 에너지 문제는 유럽을 계속해서 분열시키는 요소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 편집장 출신의 안드레아스 클루스는 블룸버그에 “푸틴은 유럽의 가짜 연대를 잘 알고, 이를 이용하려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산 에너지를 둘러싼 유럽의 위기는 난방 수요가 급증하는 올겨울 최고조에 달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연말까지 장기화할 경우 유럽 상당수 국가가 ‘가스 배급제’를 시행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이번 겨울은 유럽의 연대에 있어 역사적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수렁에 빠진 유럽...“전쟁 끝나야 산다”

통합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유로존의 분열과 에너지 부족에 따른 전기료 급등 및 가파른 인플레이션은 유럽 경제를 점점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유럽 천연가스 가격의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 선물 지수는 작년 말보다 4.2배나 급등(63.317→269.049)했고, 지난달 물가 상승률은 8.9%로 1997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최고치를 찍었다. 성장률도 작년 3분기 2.3%에서 올해 1·2분기 각각 0.5%, 0.6%로 하락했다. 그나마 관광 산업 비중이 높은 스페인과 이탈리아 등은 비교적 선방 중이지만, 제조업 강국이자 유럽 최대의 경제국인 독일은 성장이 정체(0.0%)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럽이 가스 배급제를 시행해야 할 만큼 최악의 사태에 직면할 경우, 향후 1년간 국내총생산(GDP)이 2.7%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관건은 전쟁의 향배다. 유럽은 에너지 위기를 자체적으로 극복할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전쟁이 길어질수록 분열은 심화되고 침체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제재에 익숙한 러시아가 전쟁을 질질 끌며 유럽·우크라이나를 압박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러시아 역시 오래 버티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달 제프리 소넨필드 미 예일대 경영대학원 교수 등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정부 수입의 60%를 에너지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대(對)유럽 가스 수출 비율(83%)이 워낙 커서 중국·인도 등으로 수출을 돌린다 해도 만회가 어렵다. 원유의 경우 중국에 매우 싼값에 판매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수익 규모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전쟁 이후 러시아에서는 10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이 빠져나갔는데 해당 기업들의 러시아 내 투자액은 GDP의 40%인 6000억달러에 달한다. 메리츠증권 황수욱 연구원은 “러시아가 현 상황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근거들이 나올수록 정전 및 휴전 기대감 역시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 당장의 위기를 모면한다 해도 유럽이 단기간 내에 러시아산 에너지 의존증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자유대학의 마이클 데이비스-벤 연구원은 “EU가 지난 5월 발표한 리파워(RePower) EU의 세부 지침도 대부분 현 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라며 “이상 기후, 추가 전쟁 가능성, 유럽의 취약한 구조 등을 감안할 때 에너지 문제는 상당 기간 유럽을 괴롭힐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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