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민들의 행위로 볼 수 없는 것들
아래 상황들은 북이 저지른 조직적인 작전지휘였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1) 장갑차를 타고 교도소를 6차례 공격하면서 정규전 형태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5월 21일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무장시위대에 의한 광주교도소 무력습격이었습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습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총 6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쌍방 간에는 정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습니다.(“5.18관련사건수사결과” 91-117) 교도소 습격은 광주시민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첨부9, 9쪽 첨부8, 29,30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5.18의 213-214쪽)
(2) 1985년 5월 국가안전기획부는 5.18광주 사망자 수를 164명에 대한 사망원인 분석자료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을 내놓았습니다.(첨부8) 민간 사망자 164명은 학생 33명, 신원이 확인된 일반민간인 119명, 신원불상자 12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학생 33명은 카빈 및 가타 총상(무기고 탈취)이 22명, M-16 총상이 10명, 미상이 1명입니다. 신원이 확인된 민간인 119명 중 M-16 총상은 26명, 카빈 및 기타 총상이 58명입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과 민간인 152명 중 M-16으로 사망한 사람은 36명, 카빈 및 기타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80명입니다. 신원이 확인된 학생 및 민간인 사망자 152명 중 총상 사망자는 116명, 76.3%가 총상 사망자입니다, 총상 사망자 116명 중 36명이 M-16 총상이고, 80명이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입니다. 즉 총상 사망자 중 69%가 무기고에서 나온 총상인 것입니다. 계엄군은 오직 M-16소총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타 총상은 계엄군에 의한 총상이 아니라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꺼내온 총들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5월21일, 4시간대에 17개 시군,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를, 화순광업소에서 8톤분량의 TNT, 뇌관, 도화선 등을 순식간에 동시다발적으로 탈취한 것은 간첩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첨부9, 100, 101쪽.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20-244쪽)
5.21일 아침 9시, 1시간 전인 오전 8시에 20사단으로부터 빼앗은 14대의 지휘차량 등을 타고 온 시위대 300여 명과 고속버스 5대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 300여 명이 아시아자동차를 점거하여 장갑차 4대와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28대를 탈취했습니다. 이 차량들은 누군가에 의해 17개 시군에 걸쳐 있는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 뇌관저장소, 도화선 저장소 등으로 일사불란하게 할당되었고, 낮 12시부터 오후 4시에 이르는 동안 38개의 무기고 및 폭약저장소들을 마치 외과의사가 족집게 수술을 하듯이 무기고로 곧장 달려가 2개 연대 무장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무기를 탈취했고 8톤 트럭 한 대 분의 다이너마이트와 이를 무기화한 뇌관도 도화선을 탈취했습니다. 이는 군사작전이지 시민들의 시위가 아닙니다.
시민들은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무기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사람들은 오직 간첩이라는 것이 필자의 상식입니다. 시민들이라면 한 두 개의 무기고 위치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에 좌표를 찍어가지고 이러 저리 방황할 시간조차 없는 4시간대에 쏜살같이 17개 시군에 널려 있는 38개의 무기고로 달려간다는 것은 간첩으로 이루어진 지휘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불과 4시간 내에 38개 무기고가 피탈되었다는 것은 38개 팀 한팀 한팀 모두가 위치를 정확히 알고 떠났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특히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한 후,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한 자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었습니다. (첨부9,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91-108쪽)
(4)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죽인 것입니다. 전기톱으로 머리를 반으로 여인의 목을 잘라 나체로 방치한 사진들이 있습니다.(첨부11, 6,7쪽) 그리고 임신한 여성의 목을 대검으로 찔러 창자와 태아가 튀어나온 것을 청소차에 싣고 갔다는 내용을 “찢어진 깃발”이라는 제목으로 작문하여 한국 대학가로 들여와 1980년대의 대자보 내용이 되었습니다. 간첩사의 전문가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 정치학 박사, 경향신문 및 중앙일보 본설위원, 작고)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이 찢어진 깃발을 자세히 소개하면서 이를 남한 지하당의 소행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첨부13, 5.6.7쪽) 1992년 일본 잡지사(현대주간) 사장인 니시오까(西岡 力) 저 [日本誤解의 深淵]의 31-43쪽에서도 이 찢어진 깃발을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이를 지하당의 소행으로 본다 하였습니다.
(5) 유언비어입니다. “경상도 군인만 뽑아서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으로 광주시민을 죽이러 왔다. 70%를 죽여도 좋다는 말이 떠돈다”는 등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수많은 유언비어들이 있습니다.(첨부17, 3쪽, 첨부8, 9, 첨부20) 시민이 작성할 수 없는 대량의 유언비어를 적시에 살포하였습니다. 5.18.에는 “화려한 휴가라는 암호 작전명령에 의해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 전라도 주민의 70%를 죽이러 왔다, 벌써 수십 명이나 죽었다. 대검으로 여인의 유방을 도려내고, 머리 가죽을 벗겨 나무에 걸어 놓았다”는 등 경상도에 대한 증오감을 유발하는 유언비어로 광주시민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이런 유언비어들은 광주시민이 만들어낼 수 없는 심리전 전문가들이나 만들어 내 룻 있는 작전의 일환이며 이런 유언비어 작전은 제주4.3사태에서나 10.1 대구 폭동 등 빨치산이 일으킨 소요사태에는 늘 있는 현상입니다. 유언비어들의 일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첨부8,9,15 등) 5.18단체측은 이런 유언비어를 광주시민이 만들어 유포시켰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대다수 국민 역시 이를 광주시민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들 할 것입니다.
북한이 관련돼 있다고 의심하는 사실들
1. 거물간첩 김용규는 북한에서 영웅칭호까지 받은 사람으로 동료간첩 4명을 살해하고 귀순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남공작 비화, 소리 없는 전쟁”(원민출판)을 1999.11.에 발간하였습니다.(첨부18) 이 책의 413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돌이켜 볼 때, 1970 및 1980년대 전 기간에 걸쳐 나라의 안보를 위태롭게 했던 갖가지 극렬사태가 바로 북쪽의 공작에 의해 야기된 필연적 결과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도, 재론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광주에만 북한의 공작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으며, 이는 일종의 정신적 도그마로 인식됩니다.
2. 1996.2.29. 조선일보에는 북한에서 귀순한 최주활 대령(상좌)의 증언이 실렸습니다. “광주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지 등의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북한 정찰국 정찰대원 3개조를 광주에 파견했다”(첨부19)
3. 북한에서 망명한 최고의 거물 강명도씨는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라는 책을 냈습니다.(첨부14) 이 책의 240쪽에는“광주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며 기대했다가 북이 예상한 것보다 남한 정부가 소요를 조기에 진압했기 때문에 김일성과 전두환 간의 싸움에서 김일성이 패배했다”는 글이 있습니다.
241쪽에는 “나의 친구 이화섭은 5.18이 터지자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대남선전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다고 말해주었다”는 구절도 있습니다.
240쪽 끝줄로부터 241쪽 4줄에는 "북한 최대의 대남 연락소인 청진연락소에는 전문공작원만 1,200명이 있다. 명령을 받은 수십명의 정예공작원들은 남조선 침투에 대비해 쾌속정을 준비했다. 이 쾌속정은 일제 보트에 탱크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최대속도가 60 노트에 이른다. 그런데 이미 유서를 서놓고 쾌속정에 무기를 싣고 있는 공작원들에게 작전중지 명령이 떨어졌다. 김중린이 시기를 놓친 것이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이번 탈북자들의 수기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의 내용들과도 일치합니다.
4. 1980.5.23. 06:15분, 서울역에서 간첩 이창용(평양시, 중구역, 계림동 36번지)을 주민의 신고로 남대문 경찰서 경장 한규용이 검거했습니다. 이창용은 광주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광주로 가는 도중 잡혔습니다. 현금 1,935,000원, 난수표 3매, 무전기 1대, 독침 1개, 위장 주민등록증 2개, 환각제 등 22종 339점을 압수했습니다.(첨부4, 310쪽 )
5. "당시 정보기관에서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북괴가 9개조의 비정규전 부대를 투입함과 동시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광주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으니 더욱 전국적으로 확대되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한다"(첨부17, 육군본부 1982.3. 발간 ‘계엄사’ 157쪽 6-8줄).
6. 위 첨부17의 계엄사 114p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1979년10월27일, 전군에 ‘전투태세강화’(폭풍5호)를 지시했고, 10월29일에는 동구를 방문 중인 오극렬 총참모장 일행이 급거 귀환하여 군사 회의를 소집했고, 12월18일에는 군-당 전원확대회의를 개최하면서 전군에 ‘통일에 대비한 무장’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1980년 2월에는 해주, 세포, 곡산, 양덕 등에서 전쟁물자동원훈련을 실시했고, 철도역에 비상열차를 24시간 대기시켰다. 1980년 3월에는 남파돼 있는 간첩들에게 남한의 시위조직을 확대하여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고, 시위군중이 폭도로 변질되도록 ‘점화 기폭조’를 시위 군중에 잠입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조총련에는 공작원을 침투시켜 시위대를 거리로 유도하고, 민중봉기의 계기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이 내용은 탈북자들의 5.18수기 내영들과도 일치합니다.
7. 김일성은 간첩들에게 남한에 ‘전민봉기’(전국민봉기)를 적극 유도하라는 지령을 이래와 같이 내렸습니다.
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은 2004년 6월 22-27일에 걸쳐 “김일성 비밀교시”(1)-(5)까지를 연재했습니다. 이는 탈북한 북한 간부의 증언(거물간첩 김용규)과 각종 비밀자료에 의해서 엮은 것이라 합니다. 이중 당시 김일성이 무슨 일을 추진했는지에 대한 부분만 발췌합니다. (수사기록으로본 12.12와 5.18의 209-257)
“10·26사태는 결정적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12·12사태는 미제의 조종 하에 신 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계엄사령관 관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남조선 정세가 그만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 (1979년 12월 20일 중앙당 확대간부회의)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일어났습니다. 사북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지금 남조선에서는 노동자뿐만 아니라 청년학생, 도시 빈민 할 것 없이 전 민중들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빈민 등 각계각층 에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 1980년 5월 3호청사 부장회의)
8. 소준열 당시 상무대 계엄분소장과 시위대에 참여했던 이재춘시는 광주에 조직적인 간첩활동이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1996.7.11. 5.18사건 제1심 21차 공판에서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은 “전남 도청 안에 적색분자가 섞여 있다. 그 근거로는 북괴의 개성 통혁당 방송에서 상무관하고 도청 사이에서 시위를 한 사실이 있은 지 불과 몇 시간 후에 위와 같은 사실을 방송한 것을 정보참모로부터 들었다”고 진술했습니다.(첨부4, 377쪽)
위컴회고록(첨부21)에서도 “문형태(전남출신의 당시 함참의장)의 생각은 ‘공산당들이 시내에 들어와 있거나 아니면 외부에서 과격분자들을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 ”는 내용이 있습니다.(첨부21. 2쪽)
당시 광주에서는 KBS, MBC 방송국들이 불에 타서 방송을 하지 못했고, 시민들이나 군은 북한방송을 들었다고 합니다. 5.18 시위대에는 13명의 방위병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이재춘씨는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우리는 전반적인 광주의 상황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주 이북방송을 청취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의 방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히 광주에 간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그곳에서 그렇게 빨리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첨부22, 3쪽)
그 밖에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장군, 당시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 등 많은 이들이 광주작전의 실황이 북한 방송을 통해 중계됐기 때문에 광주에서의 상황전개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9.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12명 있습니다.(첨부7, 2005.1월호 조선일보 별책무록 “5.18사건 수사기록: 234쪽) 이들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고 식별도 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10. 위 자유북한군인연합은 곧 탈북자 100여명의 서명이 들어간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집이 9월 내로 발간할 예정입니다.
11. 5.18에서 경찰관 15명을 인질로 잡는 등 혁혁한 공로를 이룩한 윤기권은 국가로부터 2억원을 보상받은 후 북한의 안내에 의해 북한으로 가서 광주의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북한이 안내하여 데리고 가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첨부23) 그는 북한에서 5.18에 대한 선전을 한다고 합니다. 북한이 5.18에 개입한 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이 내용은 탈북자 수기집에도 들어 있습니다.
12. 북한은 해마다 5.18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고 있으며 돌마다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내려보내고 있습니다.(첨부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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